남산의 변화, 그 중심에 선 국립극장장 안호상

작품만이 답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2월 1일 12:00 오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건만. 남산 자락으로 이사한 지 30년이 지나도
국립극장은 굳은 화석처럼 변할 줄 몰랐다. 안호상은
지난 2012년 1월, 그 거대한 화석과 처음 마주했다

2012년 1월 국립극장장에 취임한 안호상이 최초 2년 임기를 마치고 계약 연장서에 서명했다. ‘1년’이라는 연장 기간을 두고 극장 안팎에서 아쉽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안호상의 남산시대는 성공적으로 평가된다. 감히 점쳐보건대, 내년 이맘때면 ‘벌써 1년’이란 얘기가 또 나오리라. 허옇고 차갑고 딱딱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던 맘모스 화석. 거기에 작은 꽃을 피우고 가꾼 사람과 그 첫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안호상과 국립극장의 첫 열매는 다름 아닌 ‘국립 레퍼토리 시즌’이다.
‘국립 레퍼토리 시즌’. 다소 얄궂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표현 속에서 국립극장의 변화를 가능케 한 두 가지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자체적으로 ‘레퍼토리’를 제작할 수 있는 요소, 즉 전속단체를 보유한 제작극장. 그리고 일정 기간(보통 9월에서 이듬해 6월까지)의 전체 프로그램을 미리 내놓고 티켓을 판매하는 마케팅 방법인 ‘시즌제’. 신임 극장장이 내건 ‘국립 레퍼토리 시즌’의 기치하에 국립극장은 2012/2013, 2013/2014 두 시즌을 보내는 중이다.
안호상은 예술의전당의 첫 삽을 뜰 때부터 그곳에 있었고 이후 20년 넘게 그곳에서 일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극장에 다니면서도 그는 남산 국립극장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유행 지난 현수막이 펄럭이는 풍경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동시에 부러웠다. 당대 최고의 공연을 ‘소개’한다는 예술의전당과 달리, 국립극장은 상대적으로 그 시설이 노후했을지언정 ‘제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프레젠터로서 프로듀서를 바라보는 마음이랄까. 돈 많은 화상이 가난한 화가를 질투하는 마음이랄까.
“단체가 있는 게 부러웠어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소속단체를 통한 자체 제작을 내놓을 수 있는 곳은 국립극장·세종문화회관 정도입니다. 국립극장은 1950년에 생겼고(1973년 남산으로 이사), 세종문화회관은 1978년 지금의 건물을 세웠죠. 내 생각에 두 극장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전속단체가 생길 때 그 단체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보통 서양의 극장 안에 단체가 있으니 그렇게 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식으로 서울의 극장들이 시작을 하니까 우리나라 각 지방의 문예회관들도 전속예술단체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근데 어떤 극장은 무용단·국악관현악단·오페라단·합창단, 이렇게 있는 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오페라, 특정 장르를 떠올렸을 때 전속단체만으로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극장이 없는 셈이죠.”
단체를 보유한 각 극장들이 스스로 ‘제작극장’이라는 임무를 부여해왔는지 그마저도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결국 소속 예술단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작품이 불가능하니 단체는 단체대로 하나 되기 어렵고, 극장은 콘텐츠의 주체가 될 수 없어 구속력을 지니기 어려워졌다. 결국 극장 예술가들과 극장이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어쩌다 ‘의무방어전’으로 올리는 제작 공연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긴 역부족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대관 공연이 늘어났다.
여기까지가 국립극장과 세종문화회관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국공립 제작극장이 걸어온 길이다.
“국립극장으로 올 때,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극장의 주인은 이곳의 예술단체이고, 이 극장은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게 레퍼토리 시즌제가 시작됐습니다.”
취임 초기 안호상의 질문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국립극장의 고유한 레퍼토리가 있는가. 둘째, 자신이 국립극장에 속했다고 여기는, 즉 충성도 높은 관객이 있는가. 끝으로 국립극장 변화의 주체가 될 인물이 내부에 있는가.
이 세 가지 문제를 안고 올린 첫 작품이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국립창극단 ‘수궁가’ 재공연이었다. 2011년 초연 당시 전통을 기반에 둔 새로운 시도라는 점은 높이 평가됐으나, 연출가의 색이 너무나 강하고 굳건한 탓에 ‘아힘 프라이어 발표회’라는 혹평도 피해갈 수 없었던 작품이다. 재공연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그래도 워낙 명성이 높고 국제적인 예술언어를 아는 분이라서… 기대를 했어요. 이분이 창극을 하면 관객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게 궁금했거든요. 한편 ‘국립 레퍼토리 시즌’ 프로그램으로 처음 올리는 작품이니, 국립극장에 과연 얼만큼의 저변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관객은 물론 공연계 오피니언 리더들도 이 작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즉 ‘업계’에서부터 화제가 안 되더라고요. 국립극장·창극·아힘 프라이어… 이 모두에 흥미를 못 느끼는 듯했어요. 내가 보기엔 작품이 좋은데, 우리 애호가들이 봐야 할 참신한 면이 많은데. 예상과 달리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아주 움찔했죠.”
움찔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안호상은 국립극장 부임 직후 부대사업을 다 접었다. 그간 국립극장의 대표 기획물이던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마저 접었다.
“그나마 국립극장에서 잘 된 게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 하나였는데 그걸 접고 우리 단체만으로 승부를 보겠다? 완전히 도박이었어요. 야외 토요문화광장·청소년 페스티벌·사계절 페스티벌도 다 접었습니다. 국립극장은 책임운영 기관으로서 관람객 목표가 있어요. 내가 와서 보니, 한 해 50만 4천 명이 목표더라고요. 극장은 무대 설치 날짜, 리허설 날짜가 필요하고, 그렇게 따지면 우리 극장 시스템에서 한 해 150~170일 정도 관객을 받을 수 있어요. 극장 좌석 전체를 합치면 2,500석인데 전체를 꽉꽉 다 채워도 일 년에 40만 명이 안 된다는 계산이 나와요. 그런데 목표가 50만 4천 명. 그러다 보니 다 야외행사로 돌리는 겁니다. 야외행사는 1천 명만 와도 3천 명 왔다고 부풀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매년 조금씩 관람객 목표가 늘어난 겁니다. 난 그렇게 할 재주도 없고, 그렇게 늘리는 게 의미 있다고도 생각지 않았어요. 그건 결국 극장을 망치는 거죠. 그래서 못 하겠다고 하자, 이미 목표 설정이 됐는데 그럼 평가를 포기하는 거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포기한다고 했어요. 최하등급을 받으면 어떤 불이익이 있느냐 물으니 기관장 성과급이 안 나온대요. 좋다, 직원들에게 불이익 없으면 됐다! 그렇게 포기하고, 그 사업비를 다 레퍼토리 제작에 넣었어요.”
도박에 가까웠던 안호상의 강수가 조금씩 그 가능성을 내비친 건 2012/2013 시즌에 오른 ‘장화홍련’부터다. 여기에 창극이라는 장르, 혹은 국립창극단·국립극장이라는 ‘브랜드’가 지닌 매력도가 얼마나 작용했을지는 의문이다. 안호상 자신도 “한태숙의 스타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거꾸로 창극의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보다 명확한 조짐은 2013년 3월에 오른 국립창극단 ‘서편제’였다. 총 6회 공연을 올렸는데 뒤로 갈수록 일반 관객이 점점 늘어나 첫 회와 마지막 회가 전석 매진됐다.
“우리 직원들은 ‘서편제’가 다 끝날 때까지도 반응이 미적지근했어요. 모두 같이 하는 일인데 흥분을 안 하니 얼마나 야속했는지 몰라요. 나 혼자만 용쓰는 것 같고. 그때 내 짜증이 극에 달했어요. 이어 ‘단’을 할 때는 이 사람들이랑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한번 갔으면 망하더라도 끝까지 가봐야지. 직원들 반응이 어쨌든, 나는 그때 보였어요. 이거 되겠다!”
가능성을 감지한 안호상은 지난해 상반기부터 국립창극단·국악관현악단·무용단, 소속단체 단원들과의 면담을 시작했다.
“결국 작품의 밀도가 무대에서 객석으로 전달되며 승부가 나는 거니, 단원들의 진심이 가장 중요하죠. 어떤 무용단원은 ‘단’을 할 때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대요. 외식을 하는 건지, 외도를 하는 건지… 너무 낯설었대요. 그러면서 과거에 올렸던 ‘도미부인’ 얘기를 꺼냈어요. 그때는 미학적 근거가 있었고, 철학이 있었다고…. 새로운 변화에 발을 담그는 게 쉽지 않았겠죠.”
안호상은 과거 국립극장의 실패 요인으로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세를 꼽았다. 몇몇 예술가들에 의해 특정한 방향으로만 끌려다닌 세월이 너무 길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소속 단원들도 관객이 아닌, 특정 예술권력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러다가 무용계의 미아가 되는 게 아니냐”라며 불안을 호소하던 국립무용단 단원들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한 건 ‘춤, 춘향’을 올리면서. 2013년 10월 공연된 이 작품은 총 세 번 올랐고 그중 한 회가 매진됐다. 최근 새롭게 변화한 국립무용단을 만나보지 못한 독자라면 ‘전통무용단’ 혹은 ‘한국무용단’으로 추정되는 이 단체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관객으로 꽉 채웠다는 얘기가 믿기 어려울지 모른다. 국립무용단은 변했다. 이들이 최근 올린 ‘전통’은 그저 단순한 과거 유산이 아닌 ‘현대가 바라본 전통’이다.

빠른 변화, 이제 가속을 붙일 때
지난 2년간 국립극장이 제작한 레퍼토리 가운데 나는 개인적으로 국립창극단의 ‘메디아’를 최고로 꼽는다. 지난해 봄, 이 가슴 후벼 파는 작품을 보고 나서 남산길을 걸어 내려오며 우리 기자들은 함께 결심했다.
“기자가 기록하는 자라면 이거야말로 기록해야 할 작품이지. 특집감이야!’
실제로 다음 달 ‘객석’은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메디아’에 대해 크게 떠들었다. 메디아 역을 맡아 열연한 창극단의 젊은 단원 정은혜의 인터뷰도 실었다. 창극이 판소리·악극·오페라·뮤지컬 등 다양한 주변 장르의 특성을 두루 섭렵하고 수용한다면 스타 발굴도 간과해서는 안 될 요소다. 그러나 여전히 단단한 사제 관계, 도제 제도로 배움이 이뤄지는 국악계에서, 또 그 연장선에 놓인 창극단 환경에서 오직 실력과 스타성으로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나서는 게 가능한 일인가.
“스타는 우수한 재능과 희소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건 말 그대로 ‘기본 조건’입니다. 스타가 되려면 좋은 모판을 만나야 해요. 좋은 작품과 그걸 보러 온 관객들 말이죠. 과거 안숙선 선생 시절에는 경쟁 장르가 없었어요. 그러다 오페라가 주류로 나서고, 뮤지컬이 대중화되면서 창극은 관객을 잃어갔어요. 정은혜가 스타가 될 인재이긴 한데, 그러려면 우선 우리가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객이 와서 배우를 만나죠.”
극장 및 단체에 대한 주목을 넘어 단원 ‘개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가능해진 국립극장의 오늘. 외부 사람들이 봤을 때도 그 변화의 2년은 이틀처럼 느껴질 만큼 강도가 셌고, 속도는 빨랐다. 큰 극장을 책임지는 자리에 갖다 붙이기엔 옹졸함 감이 없지 않은 숫자, ‘벌써 1년’을 예고한 겨우 1년. 안호상은 이제 어떤 변화를 꿈꾸는가.
“‘대한민국’과 ‘국립’이라는 가치에 대한 인식 전환이 온다고 생각한 시점에 마침 국립극장을 맡았습니다. 인식 변화가 불러올 가능성, 그 기대심리에 편승해서 뭔가 이뤄질 줄은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빨라서 불안한 감도 없지 않아요. 그래도 지금보다 속도가 세 배는 더 나야 하고, 작품도 세 배는 더 만들어야 합니다. 한 작품에 투입되는 단원 수를 줄이면 작품 수를 그만큼 늘릴 수 있어요. 예전엔 80명 내외로 작품을 만들었다면 이젠 20명 내외의 단원을 투입시킵니다. 모자란 인원은 외부 단원으로 보충합니다. 이런 식으로 작품 수를 서너 배 늘리면 우리 단원들 가운데 주역도 서너 배 늘어납니다. 여기 와보니 주역을 해본 단원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단원의 태도가 너무 다릅니다. 주역은 주역끼리 경쟁하고, 서로 다른 작품에 투입된 단원들은 작품 대 작품으로 경쟁하면서 그렇게 실력이 느는 게 맞습니다. 관객의 사랑을 받으면서 예술가는 스스로 자랍니다. 그런 식으로 국립예술단체의 예술가들을 키우는 게 국립극장의 본질입니다.”
안호상이 특유의 빠르고 정확한 말투로 열변을 토하는 동안, 기획팀 이주연 PD가 그 앞을 조용히 지키고 앉아있었다. “세 배 속도로, 세 배 많은 작품을 올릴 겁니다!”라는 안호상의 두 번째 출사표를 들으며 이 PD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저러실까’ 아니면 ‘파이팅!’, 둘 중 하나일 거라 예상하며 안 극장장과 함께해온 소감을 물었다.
“저에겐 네 번째 극장장입니다. 2001년 김명곤 극장장 시절부터, 즉 민간 기관장 도입부터 지금까지 일했으니까요. 예전에는 어떤 사업을 추진하다가, 심지어 스스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업을 추진하다가도 극장장이 바뀌면 그마저 엎어져버렸다는 일종의 패배감에 빠지기 쉬웠어요. 직원으로서 자존감도 낮은 편이었습니다. 안호상 극장장님은 지난 2년간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그 토양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자리에서도 직원들이 “극장장님, 어디 딴 데 가실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라고 말하는데 입바른 소리는 아닌 것 같아요. 육아휴직 써야 될 사람이 극장장님 계실 때 내가 쉬는 건 너무 아깝다며 휴직을 미루기도 했으니까요. (그냥 ‘실화’가 아닌 충격)실화입니다. 우리가 이제 바라는 건 외부의 도움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국립극장의 기획·교육·홍보 직원들은 현재 단원 자격이 신분이다. 반면 무대 스태프와 행정직은 공무원 신분이다. 내부 의사 결정이나 기관 전체 운영에 대한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획·교육·홍보의 상위직은 문화부에서 온 공무원들이다. 맡은 업무에서 아무리 능력을 발휘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구조란 뜻이다. 이는 안호상 극장장의 또 다른 고민거리다.
“일본의 신국립극장도 비슷한 구조예요. 그래도 거긴 다른 게 민간 전문가들이 팀장·부장·국장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게다가 공무원들이 위에서 오면 좀 오래 있게 한다든지 해야지, 왔다가 가길 반복하니 극장에서 오래 일한 전문 인력들과는 전문성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직원들은 정말 열심히 해요. ‘단테의 신곡’을 할 때는 서울 시내 온갖 인문학 강좌를 다 쫓아다니며 홍보를 했고, ‘배비장전’ 때는 청계산·북한산… 서울의 온갖 산 아래 식당에 전단을 뿌리고 다녔어요. 그만큼 열심히 일하는데 (상위직에 올라가지 못하고) 후에 허탈하지 않을까. 나로서는 그것도 걱정이에요.”
그럼에도 국립극장을 감싼 남산 하늘이 희망의 푸른 하늘임은 분명하다. 극장장이 성과급을 포기하고, 직원이 육아휴직을 포기했단다. 뭘 더 어쩌랴. 최근 만난 문화부의 어느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국립극장의 변화를 이끈 건 맨파워, 즉 그곳의 사람들이며 그들이 짜낸 창의력이다.”
좋은 작품이 모든 문제를 푸는 궁극의 해결책이라는 안호상 극장장의 믿음. 그 믿음대로라면 국립극장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열쇠도 결국 ‘좋은 작품’일 것이다. 좋은 작품이 관객을 모으고, 모두의 뜨거운 시선이 집중된 극장은 언젠가 그 스스로 고름을 짜낼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오늘도 우리는 남산에 오른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gaeksuk.com) 사진 박진호(studio BoB)


▲ 국립창극단 ‘메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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