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은밀한 기쁨’의 두 주인공 추상미&이명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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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2월 1일 12:00 오전

연기는 인간을 이해하는 탁월한 방법 중 하나다. 배우의 대화는
동시대 인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자 두터운 사유의 파편이다

지난해 공연된 데이비드 헤어의 ‘에이미(Amy′s View)’를 기억하는가. 1970년대 후반 영국을 배경으로 시대 문화의 변모, 신구 세대의 갈등, 사랑과 배신, 진정한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에이미’에 우리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까닭은 동시대의 보편적인 문제와 가치가 한 개인의 가족사와 함께 버무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데이비드 헤어는 인간과 사회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냉철한 통찰로 그 시대의 사회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담아온 작가다.
데이비드 헤어의 이름을 알린 작품의 대다수에는 사회 비판적인 맥락과 함께 강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어린 시절 작가는 항해사인 아버지의 부재로 집안에서 어머니와 여자 형제들 사이에서 성장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여성의 고결함’은 이 시기 그가 받은 영향에서 비롯된다.
“내 작품의 주제가 종종 ‘선’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룹니다. ‘남자들의 선함’이란 왠지 어리석게 느껴지거든요.”
이러한 작가의 경향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작품 중 하나가 1988년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은밀한 기쁨(Secret Rapture)’이다. 언뜻 번역된 제목만 보면 ‘빨간 성인물’을 상상하기 쉽지만, 데이비드 헤어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오해(?)는 이내 풀리게 된다.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문제적 작가’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은밀한 기쁨’은 1980년대 영국, 마거릿 대처 수상 시절의 정치 세태를 풍자한 것으로 정치와 가족의 층위가 촘촘하게 겹쳐 있다.
‘은밀한 기쁨’ 국내 초연(연출 김광보, 2월 7일~3월 2일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을 앞두고, 한창 리딩 연습 중인 추상미와 이명행을 만났다. “결혼과 출산 이후 5년 만의 복귀작을 꼭 연극으로 할 생각”이었다는 추상미와 “이렇게 처절하게 로맨틱한 배역은 처음”이라고 지그시 웃는 이명행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데이비드 헤어의 작품 세계로 이어졌다. 이윽고 한참을 오고 간 두 배우의 이야기 속에는 캐릭터에 대한 고민 가운데 치열하게 문을 두드려온 흔적들이 뚝뚝 묻어났다. 이날의 대화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켜켜이 쌓아올린 세계관, 그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 두터운 사고의 층위를 툭 잘라낸, 단면을 지면에 옮겨본다.


▲ 배우 이명행
극공작소 마방진의 창단 멤버로 그간 고선웅 연출식 연기 화법을 능숙하게 소화해왔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서 무대에 서는, 그 고통과 기쁨에 사로잡혀 배우로 사는 중이다. ‘들소의 달’ ‘칼로막베스’ ‘푸르른 날에’ ‘뜨거운 바다’ ‘리어외전’ ‘히스토리 보이즈’ ‘스테디 레인’을 통해 캐릭터로 기억되는 무대를 만들어왔다


▲ 배우 추상미
어린 시절 두발로 걷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인 배우 추송웅을 따라 극장을 다녔다. 그 덕분에 연극과 극장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살아왔다. ‘가을 소나타’ ‘블랙 버드’ ‘프루프’ ‘빠담빠담빠담’ ‘로리타’ ‘제국의 광대들’ ‘가라마조프의 형제들’로 연극 무대에 섰다

탐욕의 시대, 고결함과 희생에 관한 성찰

연인 어윈(이명행 분)과 함께 작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저벨(추상미 분). 그녀 아버지의 죽음으로 극은 시작된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돌보며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이저벨은 조용히 아버지와 작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환경부 차관인 언니 매리언과 성공한 기업가인 형부 톰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아버지의 젊은 정부인 캐서린과 매리언이 부딪히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매리언과 톰은 알코올 중독자인 캐서린을 이저벨에게 떠넘기고, 이저벨의 사업 확장을 도와주겠다며 투자를 제안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꿍꿍이다. 가족도, 오갈 곳도 없는 캐서린을 자신의 회사에 취직시킨 이저벨. 그로 인해 캐서린을 못마땅해 하는 어윈과 갈등이 깊어지지만, 이저벨은 캐서린을 차마 놓아버리지 못한다.

추상미 이저벨은 죽은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추종하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자야.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하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과는 굉장히 구별된,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야. 때문에 그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여과 없이 말하는 것이 어윈을 포함한 타인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또 매리언 같은 정치인에겐 양심을 건드리는 일이 되어 갈등을 낳는 거지. 극 말미에서 매리언이 이저벨에게 “넌 모든 걸 망쳐버려. 어딜 가든 분란을 일으키고, 고통의 원인이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저벨의 진실이 타인에게 고통이 되는 지점이 오히려 나한텐 매력적으로 다가왔어.
이명행 극중 이저벨이 고결한 가치를 대변한다면, 어윈은 이저벨의 역설적인 모습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립의 축이 되는 인물이죠. 이저벨이 천사처럼 올곧게 살아가려고 하는 방식이 어윈한텐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거예요. 이저벨을 너무 사랑해서 결국 힘들어지는 상황을 맞이하니까. 제 캐릭터에서 매력적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에요. 고백하자면 너무 사랑해서, 연인을 파괴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역할을 지금껏 해본 적이 없어요. 그동안 맡은 배역들은 어설픈 뽀뽀 정도만 했거든요. 이번 작품은 대본에서 지문으로 처리된 키스를 한다거나… 그런 게 무대 위에서 어떻게 표현될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기대가 되네요.
추상미 그런 역을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의외인 걸! 어윈과 이저벨의 대립 구도가 극 전체에서 가장 볼 만하지만, 관객 입장에선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해. 재밌는 건 이저벨이 아버지의 정부이자 알코올 중독자이자 모두에게 천덕꾸러기로 여겨지는 캐서린을 보살펴주잖아? 나름 숭고한 가치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저벨 안에도 선과 악의 목소리는 존재해. 어윈은 “네 진심은 이게 아니잖아”라는 식으로 그걸 끄집어내지. 연인의 목소리가 이저벨에겐 부정하고 싶은 소리로 들려오니까 자꾸 밀쳐내게 되는 것 같아.
이명행 어윈은 이저벨을 향한 사랑이 너무나 큰, 사실 평범한 남자죠. 감정선이 크고 변화되는 지점도 확실하고. 나중에 저지르는 일들이 좀 과격하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거부할 때 보이는 남자의 반응은… 요즘 시대에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캐릭터는 역시 이저벨이에요.
추상미 그 이저벨을 연기하는 사람은 어떻겠니(웃음). 난 인물의 내적인 요구나 심리적인 변화는 알겠는데, 그걸 몸 밖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워. 대사 이 외의 것들로 캐릭터의 의지나 변화를 보여줘야 하니까. 이저벨은 등장만으로 존재감을 뿜어내야 하는 배역인데, 그게 정말 쉽지 않아. 이저벨의 가치관이 클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을 지켜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과정이 작품의 큰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명행 맞아요. 게다가 모두가 이저벨을 비난하죠. 이저벨은 어디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불쌍한 여자예요. 심지어 연인인 어윈조차도 그녀에게 계속 자신을 이해해달라고만 하잖아요.
추상미 이저벨이 이상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묘사된 것 같아. 그런데 1980년대 영국의 정치적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그 가치관이 너무 다르지. 사실 드라마나 영화에만 진정성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현실에선 이저벨의 주변인들처럼 실리를 따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잖아. 이저벨 같은 사람은 정말 왕따가 되는 거지. 때문에 극중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 상황처럼 다가오기도 해. 사회 구성원들의 면면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까. 이번에 인간 내면에 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어. 이저벨은 이상주의자인데, 그녀가 외치는 정의와 이상이 과연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결국엔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만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해. 이저벨이 취하는 자세는 스스로를 내던지면서도 조금은 냉정한 방법이랄까. 한편으론 나보다 스케일이 크고 차원이 높은 사람을 연기할 때 느끼는 희열이 있는 것 같아.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을 연기할 때 느끼는 재미도 있고. 명행이는 어때?
이명행 어윈이라는 캐릭터가 저와 비슷한 면도 있어요. 일반적인, 보통 남자라는 면에서. 정말 사랑해서 소유하고 싶어 하고, 그게 안 되면 어찌할 줄 모르는 것도 그렇고. 전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희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요. “넌 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려고 하는 거야?”라고 어윈이 이저벨한테 말하잖아요. 사랑이 최고의 가치지만 사랑 때문에 희생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지점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 것 같아요. 저는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부모님과 아내가 아이를 돌보는데 곁에서 보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서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힘들어도, 정말 사랑하니까 희생할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됐어요.
추상미 그 개념이 중요한 거 같아. 인간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 나도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나왔는데, 아마 부모님도 그 일이 백 퍼센트 기뻐서 하시는 건 아닐 거야. 희생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변화된다면 그 가치는 엄청난 거 같아. 결국 이 작품이 인간의 실존에 관한 이야기니까, 앞으로 무대에 서는 시간들이 우리 스스로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성찰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글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사진 이규열(라이트하우스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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