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과 삶은 예술가들에게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길러줬고 창조적인 문화를 탄생시켰다.
찬란한 예술과 다이내믹한 문화로 가득한 창조적인 도시에서의 유쾌한 표류기
홍등가 밖에서 찾은 자유와 관용의 매력
전 세계 여행자들이 암스테르담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화제는 ‘성과 마약을 자유롭게,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는 도시’라는 것이다. “대낮에도 홍등가가 절찬리에 영업 중이라죠?” “도심 한가운데 섹스 박물관이 있다면서요?” “마리화나는 물론 마리화나가 들어간 커피·케이크·사탕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 많은 여행자들이 이런 점에 ‘낚인다’.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지적인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도 다르지 않았다. 저서인 ‘발칙한 유럽 여행’에서 그는 암스테르담을 처음 찾았을 당시 짜릿한 일탈에 탐닉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고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엔 내용이 없듯, 홍등가와 커피숍에 실망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홍등가엔 취객과 쓰레기가 나뒹굴고 섹스 박물관은 이제 암스테르담의 것만이 아니며(심지어 제주도에도 성 박물관이 있다. 수위는 조금 다르겠지만), 커피숍과 관련한 규제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세계의 몇몇 언론은 ‘자유와 관용의 도시, 암스테르담의 쇠락’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지만, 천만의 말씀. 암스테르담이 지닌 자유와 관용의 정신은 중앙역 앞 홍등가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암스테르담을 포함해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과 치열한 삶이 빚어낸 것이다.
먼저 네덜란드(Netherlands)라는 이름을 들여다보자. 네덜란드어로 ‘neder’는 ‘낮은’, 그리고 ‘land’는 땅을 의미한다. 이름 자체가 ‘낮은 땅’인 네덜란드는 국토의 4분의 1 가량이 해수면보다 낮아 댐과 제방을 건설하고, 바다를 간척해 평지를 만들고, 풍차로 물을 퍼내며 생존을 이어왔다. 모네의 화폭에 담겨 있던 평화로운 튤립 꽃밭도, 농가나 강변에 위치해 낭만적인 풍경을 지닌 풍차, 운하 주변으로 늘어선 아름다운 건축물도 네덜란드인들이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세우고 또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됐지만 네덜란드만은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란 말이 있을까. 아, 눈물겹다. 아무래도 이들에겐 지구 온난화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느껴질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21세기 중 투발루·몰디브·방글라데시 등과 함께 네덜란드도 가라앉을 수 있다고 한다.
극한 환경은 네덜란드인에게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심어줬다. 그러다 보니 권위와 편견 등을 지양하고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국민성, 즉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갖게 됐다. 이는 ‘유럽 최고의 장사꾼’으로 성장하는 귀한 덕목으로 작용했다. 1602년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만든 것도 네덜란드 아닌가. 당시 네덜란드는 황금기를 맞아 세계를 호령했다. 20세기 초 북해를 강타한 끔찍한 태풍과 해일이 1,8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기 전까지. 틈틈이 북해의 범람이나 태풍과 같은 태클이 없었다면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경제 1·2위를 다투는 독일과 프랑스를 일찍이 추월했을지도 모른다.
환경의 한계는 경제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술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유명한 화가는 워낙 많지만 대표적인 세계적 거장을 몇 꼽으라면 17세기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 19세기 후기인상파의 천재 화가인 고흐, 그리고 19세기 말 추상회화의 창시자인 몬드리안이다. 건축도 빼놓을 수 없다. 수세기에 이르는 간척의 역사가 건축을 발달시키고 훌륭한 건축가를 배출한 까닭이다. 특히 네덜란드 건축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렘 콜하스·벤 판 베르컬은 각각 삼성미술관 리움과 서울대학교 미술관·갤러리아백화점과 수원 아이파크시티를 설계해 국내에서도 친숙할 정도. 그 외에도 대세로 떠오른 네덜란드 디자인, 월드클래스의 DJ가 위용을 떨치는 일렉트로닉 뮤직 또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이들은 모두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에서 만날 수 있다. 장담하건대 홍등가와 커피숍 밖에서 경험하는 문화적 충격은 훨씬 강렬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암스테르담의 매력에 홀딱 빠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교차하는 미술관
암스테르담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뮈제엄플레인이었다. 의미를 풀이하자면 ‘박물관 광장’으로 이곳엔 암스테르담의 3대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크스 미술관(국립미술관)·스테델레익 미술관(시립미술관) 그리고 반 고흐 미술관이 한데 모여 있다.
지난해 4월 13일 레이크스 미술관은 긴긴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열었다. 19세기에 건립되었던 레이크스 미술관은 2003년 개보수를 결정하고 잠정 폐쇄했다. 그 뒤 ‘필립관’이라는 별채만 부분적으로 오픈해 방문객들을 맞곤 했다. 10년 만에 전체 모습을 공개한 레이크스 미술관은 총 4층인 빌딩 규모로 4만 4,500제곱미터, 800개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중세시대 작품을 모아둔 0층(네덜란드에서는 0층이 우리의 1층)에서부터 20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신조형주의인 데 스테일을 만날 수 있는 3층까지 둘러보는 동안 총 1.5킬로미터를 걷게 된다. 여기에 전시된 8천여 점의 작품은 800년간의 네덜란드 역사와 예술을 보여준다.
“3억 7천5백만 유로(약 5천5백억 원)짜리 프로젝트였어요. 스페인의 건축사무소인 크루스 이 오르티스 아르키텍토스가 전체적인 건축을 담당하고 루브르박물관·대영박물관·서울 가나아트센터를 설계했던 프랑스 건축가 장 미셸 윌모트가 인테리어를 담당했죠. 이 둘은 교회를 연상시켰던 19세기 고딕-르네상스 풍 건물을 21세기형의 밝고 넓은 최첨단 박물관으로 변신시켰죠.” 레이크스 미술관의 제너럴 디렉터인 빔 페이버스가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설명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미술관의 입구인 아트리움이다. 이곳은 본래 안뜰로 새롭게 창조된 공간이다. 먼저 유리 지붕의 선택이 탁월했다. 자연광이 스며들어 밝고 따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과거의 모습을 재현한 붉은 벽돌색 벽과 옅은 미색의 석조 바닥은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이미지를 자아낸다.
이곳에서 가이드 투어나 오디오 투어를 신청하는 것이 좋다. 가이드 투어의 경우 화가나 작품에 대한 자세한 정보 외에도 역사적 배경과 그 당시의 문화까지 귀띔해준다. 이를테면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인 요하네스 베르머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의 경우를 들어보겠다. 이 작품은 빛과 질감의 섬세한 차이를 표현하는 베르머르의 명작이다. 가이드가 대뜸 질문을 던진다. “방을 보세요. 그 어떤 장식도 없죠? 검소한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파란색 직물이 부를 상징할 정도로 굉장히 비쌌다는 거예요. 과연 하녀가 값비싼 파란색 앞치마를 두를 수 있었을까요?” 함께 투어를 돌던 이들이 온갖 추측을 내놓는다. “부인?” “팔뚝을 보면 하녀죠.” “그렇다면… 정부?” 세계 어디서나 ‘뒷얘기’는 재미있다.
전시실은 0층부터 3층까지 시대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렘브란트를 비롯해 네덜란드에서 가장 추앙받는 작가라는 요하네스 베르머르, 북유럽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던 얀 판 에익, 17세기를 주름잡은 풍경화가 야코프 이자크스 판 라위스다엘, 고흐 등 곳곳에서 네덜란드의 걸출한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처럼 놓치지 말아야 할 대작이 있는데, 렘브란트의 ‘야경’이다. 렘브란트만의 역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낸 이 초상화는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불린다.
레이크스 미술관을 나서서 광장을 쭉 가로질러 걷다 보면 오른편에 반 고흐 미술관과 뒤이어 시립미술관인 스테델레익 미술관이 나온다. 반 고흐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200여 점의 회화, 500여 점의 소묘 등 고흐의 작품을 시기별로 나누고 삶의 주요 여정에 따라 그의 작품을 함께 보여준다.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테델레익 미술관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도 좋다. 19~20세기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명화·사진·설치·비주얼아트·디자인 등 다양한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
글·사진 서다희(‘더 트래블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