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지현준

‘달’을 가리키는 배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데뷔 11년 차, 지난해 ‘나는 나의 아내다’ ‘단테의 신곡’으로
신인 연기상을 휩쓸며 그 이름을 새롭게 아로새긴 지현준을 만났다

1978 대전 출생
2012 더뮤지컬어워즈 남자 신인 연기상
2013 대한민국연극대상 남자 신인 연기상
2014 동아연극상 신인 연기상
‘고양이 늪’(2005) ‘격정만리’(2006)
‘햄릿’(2010) ‘아미시 프로젝트’(2011)
‘모비딕’ ‘여섯 주 여섯 번의 댄스레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2012)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나는 나의 아내다’ ‘단테의 신곡’
‘스테디 레인’(2013)

말을 시작하나 싶었는데, 곧이어 춤을 췄고, 이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극과 뮤지컬 무대 위 ‘11년 차 신인 배우’ 지현준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달라져왔다. 지현준은 달을 가리키는 ‘배우’가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배우다.
올해로 서른여섯 살. 뒤늦게 배우 생활을 시작한 지현준에게 지난 2013년은 그 이름을 새롭게 아로새기는 해였다. 대한민국연극대상과 동아연극상 신인 연기상 수상이라는 타이틀 때문만이 아니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단테의 신곡’ ‘스테디 레인’까지, 지난해 그가 오른 작품의 면면을 살피고 나면 지현준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폭넓은 팔레트를 펼칠 줄 아는 배우인지 충분히 가늠하게 된다.
지현준은 자신을 시험대 위에 서슴없이 올려놓곤 한다. 젊은 날 오기와 무모함으로 저울을 재기보다 한계와 경계의 끝을 대면하고 돌아왔을 때의 유익을 잘 알기에 도전 앞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앞으로 끊임없이 변화할 그의 발걸음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폭풍 속 파도타기 같던 인생에서 두 발을 땅 속에 뿌리내리게 된 시간, 지현준의 이야기는 연희단거리패로부터 시작됐다.

나, 지현준의 시작 내가 연극을 시작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동아방송대를 졸업하고 방송 PD 생활을 먼저 시작했다. 하루는 다큐멘터리 촬영 때문에 편집실에서 일주일을 밤새고 있자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문득 ‘무엇을 해야 늙어서도 재밌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순간 ‘연극배우’가 떠올랐다. 공연장을 오간 적도 없었는데, 군복무 시절 누군가 “전역하면 연출가 이윤택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 인터넷에 ‘이윤택’을 검색했다. 그러곤 연희단거리패에 연락하니 김소희 선배가 전화를 받았다. “내일부터 워크숍이니 참석해보라”라는 말에 다음 날 무작정 찾아갔다. 처음 연기를 배우던 날, 이윤택 선생님은 칠판에 ‘배우’라는 단어를 쓰시곤 “배우는 좋은 인간이다. 땅 깊이 중심을 박아놓고 위로 세상을 보면서 사는 거다. 뿌리가 흔들리면 세상에 휩싸여버린다”라고 말했다. 극단 생활을 하며 철학적 가치관들을 중심에 세웠고, 나의 진짜 모습을 직면하게 됐다. 이후 무대에서 구사할 수 있는 안무를 배우고 싶어 워크숍을 찾던 중 트러스트무용단에서 3년간 작품 활동을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삭신이 쑤셔도 매일 연습실 바에 다리를 올리고 춤을 추는 동안 한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법을 배우게 됐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위해 포기한 것 편한 걸 하는 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 특히 편한 것들을 포기하게 됐다. 조금이라도 편한 것을 택하는 순간 나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다. 스스로를 항상 불편한 곳에 놓으려고 한다. 편안함을 포기하니 오히려 돌아오는 게 많더라. 무용수들은 매일 아침 10시에 나와서 몸을 풀고, 가수들은 날마다 울림통을 개발하며 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니 배우는 ‘삶을 훈련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노력하면 그만큼 유지하게 되는데, 잠깐이라도 쉬면 금방 제자리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면 그게 공평한 거다.

지현준과 밀접한 타 예술 장르 무용과 뮤지컬. 어릴 적 피아노 학원 선생님인 어머니 덕에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었고, 몇몇 악기도 곧잘 다룰 줄 안다. 지금 시대는 모든 장르가 혼재되어 있지 않나. 지금은 배우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다 하는 세상이다. 극단과 무용단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모든 것이 통합될 수 있는 장르를 하고싶다. 그리스 출신 안무가들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좋아한다. 정말 미학적인데 심지어 노래도 잘한다. 내가 지향하는 무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배우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작품 첫 번째는 연희단거리패에서 올린 ‘햄릿’이다. 그땐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햄릿’이 연극배우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잘 몰랐다. “넌 햄릿형에 정말 가까운 인간”이라는 이윤택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에 불을 지폈던 작품이다. 두 번째 전환점으로 지난해에 공연한 ‘나는 나의 아내다’를 꼽고 싶다. 모노드라마인지라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난 서른다섯 명의 캐릭터를 한 자리에 다 데려와야 했다. “배우가 처음 연기를 시작하면 자신만 바라보느라 정신없고, 그 다음에는 자신과 캐릭터를, 그 다음엔 상대방의 캐릭터, 이후엔 극장과 관객, 더 나아가 세상 그리고 우주를 바라보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표현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늘 기억하며 산다. ‘나는 나의 아내다’는 관객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때에 한 작품이다. 그전까지 내가 관객을 이끌고 가려는 마음이 컸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매순간 그저 관객과 만나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 후로 세상 돌아가는 데에 눈을 떠 뉴스도 자주 챙겨보게 됐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 영감의 원천은 하나님이다. 그분의 말씀을 보면서 다양한 시야를 갖게 되고, 또 변하게 된다. 내가 변하는 시점에서 만나는 작품들 역시 영감을 주는 요소가 된다.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들을 볼 때도 그렇다. 영화에서도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면 그와 관련한 영화를 자주 보는데, 예를들어 ‘에쿠우스’라면 말과 소년에 관한 영화를 다 찾아보는 식이다. 최근 ‘더 리더’를 보면서 내가 표현할 소년의 이미지를 많이 떠올리게 됐다.

11년차 배우에게 주어진 신인 연기상 지금의 시대를 살면서 어떤 연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때에 대한민국연극대상과 동아연극상에서 신인 연기상을 받게 됐다. 신인상을 두고, 들떠 부풀어 오르는 감사함보다 깊어지는 감사함을 느꼈다. 그전까지는 연기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다. 무대에 서 있다가도 어느 순간 벌거벗겨져 세상에 홀로 서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뭔가 외쳐야 하는데, 자칫 미친 사람으로 보일까 두렵고 앞도 뒤도 다 창피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신인상을 받으면서 ‘이제 벌거벗고 걸어갈 수 있겠다’ ‘마음껏 실수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프로임을 느꼈던 순간 확실하게 느낀 순간은 없다. 다만 ‘스테디 레인’을 할 때 비슷한 느낌은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내 길을 간다’라는 생각이 처음 선명해졌다. 주변이 혼잡하고, 연습이 잘 안 될 때 예전에는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냥 물 마시고 슥, 무대로 들어가게 됐다. 의연하게 걸어가는 것, 그게 어느 순간 생겼다.

평단과 대중에게 꼭 듣고 싶은 말, 듣고 싶지 않은 말 “지현준 정말 잘한다”보다 “그 캐릭터 정말 매력적이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러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역할 연기했던 배우가 누구였지?”라고 얘기해주면 좋겠다. 일본 가부키 극에 국민 배우 두 명이 있다. 똑같은 동작을 하는데 첫 번째 배우가 등장하면 그 모습이 아름다워 배우를 보게 되고, 두 번째 배우가 나오면 관객 모두 그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달을 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유명 연출가가 쓴 ‘보이지 않는 배우’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걸 보면서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했다. 무대에서 아름다운 것은 기본이고 관객의 시선을 돌려 꼭 달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그러고서 배우는 사라지는 것. 그게 진짜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뮤지컬 작품을 하면서 혹평을 많이 받아봤는데, 사람들에게 듣기 힘든 말은 있어도 듣기 싫은 말은 없는 것 같다.

내가 배우로 사는 이유 배우는 나에게 최고의 직업이다. 동시에 연극은 사람을 가난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장르상 비주류에 가깝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건 분명하다. 동시에 정신적으로 가난한 상태, 즉 비우고 갈망하게 된다. 좋은 작품 아래 한없이 겸손해지고, 잘하는 걸 뽐내고 채우기보단 비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그래서 꿈을 꾸게 되고, 꿈이 더 늘어나게 됐다. 그게 배우를 계속하는 이유다.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걸 느낀다.

2014년 계획 올해는 노래에 가장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다. “배우가 무대에 서면 먼저 말하고 싶고, 다음에는 춤추고 싶고, 나중엔 노래하고 싶어진다. 노래를 하면 날 수 있다”라는 이윤택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이제 나에겐 노래가 남았다. 노래를 해야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는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단테의 신곡’ 무대에 다시 오를 예정이고, 다른 장르의 작품으로도 관객들과 만나고 싶다.

글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사진 이규열(라이트하우스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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