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땅에 다시 꽃 피듯
“공기의 떨림은 신의 숨결이야. 인간의 영혼에 속삭이는 신의 언어이지. 우리 음악가들은 신과 최대한 가까이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의 입술을 읽을 수 있어. 우리는 신을 찬양하는 신의 자녀들을 낳고… 그것이 음악가가 존재하는 이유야.”
폴란드가 낳은 거장 아그니에슈카 홀란트 감독의 역작 ‘카핑 베토벤’(2006). 영화 중반부에 베토벤이 악보 카피스트 아나 홀츠(사진)에게 나지막하게 전하는 말은 음악에 대한 가장 명쾌한 해답이자, 물질과 겉모습에 얽매여 정작 자신의 내면과 영적인 세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현대인에게 악성(樂聖)이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다. 이어지는 현악 4중주 9번 2악장 안단테의 둔중한 피치카토가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가슴을 친다.
작곡가들을 오케스트라 곡보다 더 어려운 장르로 괴롭게 하면서도 무서운 마력을 가지고 필연적으로 펜을 들어 쓰게 했던 현악 4중주. 하이든에게서 시작된 이 고된 작업은 모차르트를 거쳐 베토벤에 이르러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얼핏 보기에 ‘카핑 베토벤’의 하이라이트는 교향곡 9번의 초연 장면이다. 하지만 홀란트 감독이 영화 전편에 걸쳐 투영한 베토벤 작품은 바로 현악 4중주였다.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 백성들의 참혹하게 그을린 삶의 단편들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도입부에서부터 ‘대푸가’가 흐른다.
베토벤은 영화에서 후기 현악 4중주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언어라는 것이다. 악장의 시작과 끝도 없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구름처럼… 음악적인 효과도 없이 오로지 성장할 뿐 하나의 악장이 죽으면 다음 악장이 새로 태어난다고 역설한다. 구차한 형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내면에 속삭이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 결정체가 바로 현악 4중주 15번의 3악장이다.
영화의 피날레는 병상에 누운 베토벤이 아나 홀츠에게 3악장을 구술하는 것으로 끝난다. 음악으로 신과 하나 되어 자유를 찾게 되는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은 영화의 백미이자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이데아에 다름 아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작곡가는 이제 가슴으로 세상을 듣고 신과 교감하기에 이른 것이다. 악보에 베토벤이 친필로 쓴 “병에서 회복한 인간이 신께 드리는 거룩한 감사의 찬송”은 고대 리디아 선법을 기본으로 대위법과 코랄이 교차하면서 끝없이 수축과 팽창을 거듭한다.
엘리엇이 읊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는 잔인한 4월”에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를 들으며 영혼의 황무지를 기름진 땅으로 만들자.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