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산골짜기 아래 보물처럼 숨겨진, 작은 도시에는
우아하고도 낭만적인 문화유산이 숨 쉰다
뮌헨 중앙역을 출발한 기차는 1시간 40분을 달려 인스브루크 중앙역에 도착했다. 뮌헨에서 뜻 밖에 추운 날씨를 만났던 터라 두꺼운 점퍼에 머플러, 서둘러 구매한 장갑까지 챙겨 완벽하게 무장하고 인스브루크를 맞을 채비를 했다. 인스브루크는 더 추울 거라고 확신했다. 만년설로 덮여 있고 1년 내내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으니까. 그런데 기차 밖을 나서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뜻밖에 훈훈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게다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낯설었다. 네모반듯한 중앙역사는 상당히 널찍했고 현대적이었다.
역 앞엔 낡고 오래된 전차 대신 번쩍번쩍하는 신형 트램이 내달렸다. 오전 9시. 분주한 발걸음의 사람들이 트램과 버스 위를 오르내렸다. 여기,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휴양도시가 아니었어?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알프스의 수도’ 인스브루크는 티롤을 횡단하는 인(Inn) 강과 다리(Brücke)를 뜻하는 독일어가 합쳐진 ‘인 강 위의 다리’라는 의미를 지녔다. 총면적은 105제곱킬로미터로 오스트리아 제2도시인 그라츠, 북부 중심 도시인 린츠, 그리고 잘츠부르크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여기까진 ‘어떻게 수도란 타이틀을 달았지?’란 의문이 드는 평범한 프로필이다.
“인스브루크는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도시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졌어요. 자고로 로마 시대부터 동부 알프스 지역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했고요. 지하자원도 풍부했어요. 유럽에서 가장 큰 은 광산과 주조 공장, 소금 광산 등을 지니고 있었죠.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인 인스브루크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요.” 인스브루크관광청의 아시아 홍보 마케팅 담당자인 니콜라스가 귀띔했다.
인스브루크가 알프스의 수도로 거듭난 데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헌이 지대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위스 알프스 산골 슈바벤 지역 출신이다. 가난한 백작 가문에서 출발했지만 13세기부터 600년 넘게 오스트리아 및 중부 유럽을 장악했던 유럽 최대의 왕실 가문이다. 그중에서도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은 막시밀리안 1세. 합스부르크 가문 중흥의 시조로 15세기에 티롤의 수도를 현재 이탈리아 북부 지방인 쥐트티롤(남티롤)에서 인스브루크로 옮겼다. 평범한 산골 마을이었던 인스브루크는 대대손손 이어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살핌 아래 번영을 누렸다. 아름다운 궁전과 세련된 거리가 들어서고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이 싹텄다.
이제 본격적으로 인스브루크 시내를 돌아볼 차례. 인스브루크는 아담하다. 총면적 104.91제곱킬로미터. 옆으로 길쭉한 조가비 모양인데 자동차를 타고 동서로 가로지르는 데 10분이면 충분하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사랑했던 인스브루크를 만나기 위해 먼저 개선문을 찾았다. 개선문은 구시가의 입구로, 이곳에서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인스브루크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개선문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들 레오폴트 2세와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루도비카의 결혼을 기념하여 건립됐다. ‘사랑’으로 유럽 대륙을 제패해온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닌가.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어 행복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결혼을 전제로 토스카나 공국을 얻었다니, 개선문을 세울 만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이들의 결혼식을 자신이 허니문으로 찾았던 인스브루크에서 성대하게 치러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식 중 여제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사망했다. 그래서 개선문의 남쪽에는 레오폴트 2세와 루도비카 공주 부부의 부조를, 북쪽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프란츠 1세의 부조를 새겨 축하와 애도의 의미를 모두 담았다.
개선문을 지나면 인스브루크는 물론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가 펼쳐진다. 초입은 한산하지만 거리 중반에 위치한 성 안나 기둥부터는 활기가 넘쳐흐른다. 양쪽으로 인스브루크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죽 늘어서 있고, 그 앞으로 카페며 레스토랑이 낭만적인 테라스를 꾸며놓았다.
곳곳에 이런저런 사연을 품은 건물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거리 끝에 위치한 황금 지붕이다. 이는 인스브루크의 진가를 가장 먼저 알아본 막시밀리안 1세의 흔적이 담긴 곳이다. 본래 이 건물은 티롤 영주를 위한 거주지로, 황제가 되기 전 티롤 영주를 지냈던 막시밀리안 1세가 재혼을 기념하며 개축한 것이다. 그는 금 도금한 동판 2,738개를 지붕 위에 씌우고 발코니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서서 광장에서 펼쳐지는 공연, 축제 등을 관람했다고 한다.
황금 지붕 근처엔 합스부르크 왕가가 머물던 왕궁, 막시밀리안 황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왕궁 교회, 티롤 민속예술박물관 등이 모여 있다. 솔직히 말해 인스브루크의 건축물, 역사 유적들이 특출하게 아름답거나 뛰어난 볼거리를 갖춘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알프스 산맥을 더하면 달라진다. 사방이 험준한 산세로 막혀 있는 대자연 속에 이토록 우아하고 낭만적인 도시가 존재하다니! 그 풍경을 더욱 가까이 보고 싶어 인 강변으로 향했다. 옥빛 강물 위에 늘어선 알록달록한 건물들을 보며 걸었고 마켓 플레이스에 다다라 멈춰 섰다. 여기엔 카메라와 스와로브스키 쇼핑백을 들고 경보 관광을 펼치는 여행객은 없다. 카페에 앉아 신문을 읽는 신사, 벤치에 기대 햇볕을 쬐는 연인, 바닥에 주저앉아 노닥거리는 자유분방한 청춘들은 모두 이곳 사람들이다. 여기서 석양을 맞이하기로 했다. 테라스 카페에 자리를 잡고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그때, 알프스의 머리 위로 붉은 해가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글 서다희(더트래블러 기자) 사진 전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