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헐의 성지’라 불리는 어느 박물관에서 마주한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
글 이채은 인턴 기자(chaelee@gaeksuk.com) 사진 영화사 조제
영화 ‘뮤지엄 아워스’는 오스트리아 빈국립미술사박물관을 배경으로 한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이 많아서 ‘브뤼헐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감독 젬 코언은 이 곳의 브뤼헐 전시실에서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구상했다.
그는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의 중심 주제는 물론이고 그림의 주요 대상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을 그대로 영화에 옮겼다. 이런 독특한 배경 덕분에, 영화는 픽션과 실제가 섞인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박물관 도슨트인 요한과 사촌동생의 병문안 차 빈을 찾은 캐나다 여성 앤으로 구성되는 가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편, 미술관을 구석구석 ‘관람’하는 카메라는 실제 도슨트가 하는 미술 작품 해설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는 미술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지, 요한과 앤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미술과 이야기를 교차하고 나열하는 방식을 취한다.
코언은 이런 연출을 통해 “삶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각각의 요소들에 똑같이 집중하면서도, 이 요소들이 고유의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삶은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이 서로 이어지고 뒤섞인 것이며, 이들 요소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값을 매길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요한이 직장 동료와 같이 점심을 먹는 일, 앤이 거리를 걷다 커피를 사는 일, 심지어는 앤의 사촌이 죽는 일에도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중 하나’라는 똑같은 무게를 부여한다. 코언의 철학은 브뤼헐이 인간을 보는 관점과 일치한다. 브뤼헐은 신화나 성경 속 인물도 평범한 사람과 같은 층위에서 그렸다. 예를 들어 ‘이카루스의 추락’에서 바다에 떨어져 다리만 버둥대고 있는 이카루스 옆으로, 그에 아랑곳 않고 밭을 갈고 있는 농부와 사색에 잠긴 양치기가 함께 그려져 있다. 그림은 이 셋 중 누구에게도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카루스나 농부나 양치기나 모두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똑같은 시간을 사는 존재일 뿐이다.
이 영화가 삶에 대해 담담한 시선을 보인다고 해서 결코 삶을 폄하하거나 냉소적인 관점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미술관에서 지루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학생들, 미술관 한 구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젊은 도슨트, 거리에서 다투는 커플 등 거리에서 찍힌 실제 광경은 인간의 삶의 한 단면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브뤼헐 역시 작품 속에 환자나 거지, 심지어 똥 누는 사람의 모습까지 거침없이 그려놓곤 했다. 이들을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모든 모습을 긍정하는 의도에서였다.
이 모든 것을 표현하는 일에는 감독을 포함해 오직 일곱 명의 스태프들만이 동원되었다. 미술 감독이나 디자이너 없이 즉흥적으로 빈을 돌아다니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장면을 구성했고, 조명 없이 자연광에 의지해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를 살렸다. 미술관 관람객이 그림 구석구석을 훑어보듯, 카메라는 인물들의 삶 구석구석을 담는다. 미술관을 관람 중인 사람들의 구부정한 어깨, 시끌벅적한 음식점에서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벌게진 모습, 심지어 거리의 가로등 하나까지…. 카메라가 다큐멘터리를 담는 동안 요한과 앤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점차 깊숙한 속마음까지 서로 꺼내놓는 사이가 된다. 중년의 남녀가 평생을 살며 얻은 교훈과 지혜는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영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미술관에 이름을 남기는 존재들, 그리고 하나의 생을 다하면 사라지는 무명의 존재들 모두에게 같은 값의 의미를 부여한다. 2012년 로카르노 영화제 국제예술영화관연맹(CICAE)상 수상작으로, 국내에서는 4월 중 DVD 발매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