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바일(2)

20세기 음악극의 대안을 발견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브레히트와의 만남으로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서푼짜리 오페라’ ‘거리의 장면’ 들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맞은 쿠르트 바일.
미국식 오페라와 브로드웨이 뮤지컬, 그리고 수많은 재즈곡까지, 그는 “오직 오늘을 위한 곡”을 쓰는 작곡가였다

“쇤베르크는 자신의 사후 50년을
위해 곡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오직 오늘을 위해
곡을 쓴다. 후대를 위해
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쿠르트 바일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음악은 사후 50년이
경과한 오늘에도 여전히
범용성을 갖고 있다

바일과 브레히트의 아름다운 동행

1926년 3월의 어느 날, 현대음악의 역사에 새로운 선언이 잉태되었다. 현대 오페라의 혁명가 쿠르트 바일과 연극의 혁명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만남이었다. 26세의 나이에 독일 작곡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바일은 일찍부터 브레히트의 가치와 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베를린의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방송되고 있던 브레히트의 희곡 ‘남자는 남자다’에 깊이 공감하고 또한 감탄했다. 브레히트의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통렬한 풍자의 멋은 종전에 접하지 못한 사실주의 예술이었다.
두 젊은 예술가의 회동은 곧바로 공동의 창작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26세의 청년 바일과 28세의 청년 브레히트의 역사적 동맹은 현대음악극을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안내했다. 브레히트는 “마법을 모두 빼앗긴 낡고 서툴고 쇠약한 서커스”라고 비판했던 오페라를 살벌한 현실에 이식시켰다. 관객의 수동적 감상을 방해하기 위해 그만의 ‘낯설게 하기 효과’를 활용해 극과 현실을 분리시킨 것이다. 쿠르트 바일의 음악은 브레히트의 이야기를 감싸는 또 다른 각도에서 혁신으로 오선지를 채워나갔다. 그는 브레히트의 대본에 담긴 야만적이고 체제 전복적인 정서를 감미롭고 은은한 선율과 유쾌한 화성, 유머러스한 리듬으로 변화시켰다. 두 예민한 천재가 엮어내는 화합적 충돌과 변증법적 긴장은 곧 20세기 음악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거칠고 논란 가득한 실험과 토론으로 확장되었다.
그들의 첫 번째 충돌이자 조화였던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는 브레히트가 주창했던 연극과 드라마의 양식, 풍자와 서사성이 강조되었다. 바일의 음악은 여기에 팝과 경음악의 멜로디 라인, 하모니를 이식하고 재즈와 래그타임, 다양한 춤곡의 형식을 이종교배시킴으로써 종래의 오페라가 지닌 가치를 내용과 형식 면에서 철저히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했다. 실내악 축제를 위한 15분여의 짤막한 노래극이던 ‘마하고니’에 5개의 시에 노래를 붙이고 서곡과 간주곡·후주곡을 첨가했다. 악기 편성은 기존 오페라의 구성과는 전혀 다른 10인조의 소규모 오케스트라로 구상되었다. 두 대의 현악기·6대의 금관악기·피아노·타악기로 맞춘 단출한 구성에서 바일은 재즈와 팝을 포함한 대중음악의 성격으로 접근했다. ‘아리아(Aria)’가 아닌 ‘노래(Song)’의 개념으로 각기 독립된 형식의 노래를 앞세우며 기존 오페라가 담을 수 없었던 다양한 표정을 찾아낸 것이다. 벨 칸토 창법의 아리아 형식이 가미된 서곡을 포함해 소규모 편성의 오케스트라에서 엮어냈던 고전주의 음악의 앙상블까지, 바일은 오페라의 정통성을 함유시킴으로써 이 작품을 자신의 다양한 작곡 스타일이 유희할 수 있는 놀이터로 바꿔놓았다. 스스로 회고했듯이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즐길 수 있는 소리”를 추구한 쿠르트 바일이 가장 즐겨 찾았던 소리의 주재료는 재즈였다. 바일은 “재즈는 자연이며 건강하고 힘차다”라고 말하면서 재즈로 하여금 음악예술이 다시 건강해지기를 원했다.
1927년 7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노래극으로 처음 소개된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는 한참의 개작을 거쳐 1929년 11월에서야 마무리 되었고, 1930년 3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바일과 브레히트의 역사적 동맹을 주선했던 이 작품은 곧 두 사람에게 결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1931년 12월, 작품의 리허설 도중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해 둘은 5년간의 연합을 끊게 된 것이다. 둘의 만남을 주선했던 로테 레냐는 남편 쿠르트 바일과 그의 예술적 연인 브레히트의 이별의 원인에 대해 “바일이 ‘공산주의 선언’을 음악으로 만들어보자는 브레히트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 계기였다”라고 밝혔다.

현대음악극의 기형아 ‘서푼짜리 오페라’

바일과 브레히트는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를 통해 만나 3년간의 세공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함께 새로운 작품을 구상했다. 그리고 가공할 만한 논란과 혁신을 몰고 온 현대음악극의 문제작을 생산했다. ‘서푼짜리 오페라’(1928)가 그것이다. 1782년 영국의 작곡가 존 게이가 완성한 ‘거지 오페라’를 번안한 이 작품은 18세기 영국의 무대를 1920년대의 독일로 옮겨왔다. 누추하고 소란스러운 뒷골목 풍경을 대신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음산한 카바레로 배경을 바꾸었다. 원작 ‘거지 오페라’가 화려한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서민 오페라였듯이, ‘서푼짜리 오페라’ 역시 기존 오페라가 상투적으로 접근했던 귀족의 환상과 동화를 오늘의 현실로 끌어내렸다. 3막 8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노래극은 서곡과 서주 외에도 총 21개의 독립된 노래로 구성되었다.
‘서푼짜리 오페라’는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와 마찬가지로 현악기가 배제된 트럼펫·트롬본·색소폰을 중심으로 하여 밴조·하모늄·팀파니를 앞세운 재즈 밴드에 가까운 편성이다. 연주자들을 오케스트라 피트에 숨겨두었던 형식을 거부하고 밴드를 무대 위에 당당하게 노출시켰던 것도 고전적인 오페라에 대한 비판이자 거부의 표시였다. 바일은 바로크 음악의 푸가 양식을 접목시킨 4분의 3박자의 서곡부터 풍자적인 악곡으로 도발을 시작했다. 2분의 2박자의 블루스 형식을 도입한 ‘서푼짜리 오페라’의 최고 히트곡, ‘맥 더 나이프(Mack The Knife)’로 불리는 ‘디 모리아트 폰 마키 메서(Die Moritat Von Mackie Messer)’는 누구나 쉽게 듣고 따라 부를 수 있게끔 간결한 민요풍으로 마감했다. 단순한 선율을 반복·동기화시키고 리듬과 화성도 간단하게 펼쳐놓되, 의도적으로 잘못된 화성을 가미시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를 음악적으로 구현시켜놓았다. 3막에 삽입된 ‘살로몬의 노래’ 역시 3분의 8박자 왈츠 리듬으로 변주된 ‘디 모리아트 폰 마키 메서’와 같은 형식의 노래였다.
극이 진행되는 곳곳에 바일의 의도적인 장난과 현대적 작곡의 기법, 다양한 음악적 수용이 쏟아졌다. 서민들의 사교춤인 폭스트롯의 리듬에 재즈를 연상케 하는 사운드를 덧입힌 ‘대포의 노래’를 비롯하여 탱고의 리듬과 사운드를 접합한 ‘포주의 노래’, 재즈 춤곡의 일종인 시미 스타일이 도입된 ‘편한 삶의 노래’ 등은 바일이 활용 가능했던 다양한 음악적 교배와 수용의 범위를 드러낸 곡들이다. 3박자 왈츠 리듬에 하모니카 반주를 붙여 흐느적거리는 카바레 스타일로 노래된 ‘성적 노예에 대한 노래’는 베를린 공연에서 그 선정성과 퇴폐적인 이미지 때문에 삭제된 곡이었다.
사회주의자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대본은 사회의 모순과 계급 갈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쿠르트 바일은 브레히트의 날카로운 시선을 기교적인 아리아가 아닌 팝 음악의 창법처럼 ‘노래(Song)’로 표현했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극을 ‘감상하는 것’ 대신 현실적 감각으로 느끼고 수용하게끔 이끌었다. ‘해적 제니’와 같은 노래는 극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소외기법’과 ‘낯설게 하기 효과’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해설과 성찰의 내레이션을 부가함으로써 관객의 극중 몰입을 방해했다. 바일과 브레히트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작품이 지닌 파격성과 선정성, 그리고 실험성에 대한 공방은 뜨거웠다. 덕분에 창녀와 뚜쟁이, 도둑과 살인마들이 득실대는 이 서민 오페라는 곧 20세기 음악극의 새로운 전환과 반성을 안겨주는 혁명이 되었고, 작품은 1933년까지 1만 회 이상의 공연을 기록하고 18개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흥행을 거뒀다. “드라마와 음악, 일상적인 대화 그리고 노래와 동작을 완벽하게 통합한, 그런 특수한 부류의 음악극을 꿈꾼다”라는 바일의 열망은 ‘서푼짜리 오페라’를 통해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었다.

미국식 오페라 ‘거리의 장면’을 완성하기까지

1933년, 쿠르트 바일은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해는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권좌에 올랐던 나치 집정 원년이었다. 바일은 유대인인데다 사회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고 퇴폐 음악으로 분류되던 카바레와 미국 유색인종의 음악적 원류인 재즈를 사용하는, 나치가 해악으로 규정한 최악의 조건을 고루 갖춘 타도와 축출의 대상이었다. 그의 이름이 붙은 작품들은 반대 시위로 취소되기에 이르렀고 재산 압류의 압박도 뒤따랐다. 바일은 아내 로테 레냐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고, 1935년 9월 미국으로 이주했다. “내 음악은 청중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며, 가장 단순하게 말하는 법을 알려준다”라는 쿠르트 바일에게 미국 브로드웨이는 약속의 땅이었다.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서푼짜리 오페라’ 외에도 오페라 ‘행복한 결말’과 무용극 ‘칠거지악’, 라디오 방송을 위한 작품 ‘베를린 레퀴엠’과 같은 문제작을 쏟아냈던 브레히트와의 공동 작업 시기는 쿠르트 바일 음악의 전성기이자 황금기로 평가되었지만, 바일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청중과 하나 되는 소리”의 진정한 완성은 따로 있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지 11년째,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기웃대던 바일이 아메리칸 드림을 손에 잡게 된 것은 1946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거리의 장면’을 완성하면서였다. “내가 이 나라에 왔을 때 또 하나의 꿈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식 오페라에 대한 꿈이었다”라고 소회했던 쿠르트 바일의 열망인 미국식 오페라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대화가 끝난 곳에서 노래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극 행동은 물론 일상 어투까지도 전체 음악 구조 속으로 맞아떨어지는 드라마와 음악의 진정한 통합은 ‘거리의 장면’을 통해 맛볼 수 있는 쾌감이었다. 뉴욕 빈민가의 삶을 사회주의 입장에서 관찰한 이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 쿠르트 바일이 찾아낸 또 하나의 ‘서푼짜리 오페라’였다. 하지만 작품의 배색과 톤은 독일에서 브레히트와 함께하던 시절과는 사뭇 달랐다. ‘서푼짜리 오페라’가 민초들의 삶을 억누르는 억압자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의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면, ‘거리의 장면’은 억눌린 자에 대한 깊고 따스한 공감, 그리고 민초들의 건강함을 넉넉함으로 안고 있었다.


▲ 쿠르트 바일과 그의 동반자 로테 레냐

‘거리의 장면’은 1929년 베를린의 연극 무대에 초연된 바 있으며, 원작자 엘머 라이스는 이를 통해 퓰리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많은 작곡가들이 앞 다퉈 음악극으로 변형하기를 희망했던 작품이었다. 쿠르트 바일 역시 1936년 엘머 라이스에게 뮤지컬 작업을 의뢰했지만 시기상조라는 거절을 들은 지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이 작품의 뮤지컬화를 허락받았다. 원작의 대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제로 가사는 랭스턴 휴스가 담당했다. 쿠르트 바일은 수많은 인종과 언어가 혼재된 뉴욕의 실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음악 스타일의 모음으로 작품을 구성해나갔다. 지난 시간 동안 익혔던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작법을 기반으로 미국식 팝송, 다채로운 춤곡, 그리고 정통적인 오페라 아리아의 형식까지 가미한 이 총체적인 음악극은 오페라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던 미국의 뮤지컬 관객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감흥을 안겨주었다.
20세기 음악극 개혁의 대안으로 그가 찾았던 ‘미국식 오페라의 꿈’은 1947년 그에게 토니상을 선물했고, 조지 거슈윈의 ‘포기와 베스’와 함께 미국식 오페라의 가장 빛나는 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미국식 오페라의 실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고급화를 이끌던 ‘거리의 장면’이 성과를 누린 지 불과 4년 만에 1950년 4월 3일, 쿠르트 바일은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음악극의 가장 의미 있는 논란과 담론을 생산했던 작곡가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필자가 쿠르트 바일의 음악을 처음 만난 것은 록그룹 도어스의 노래로 들었던 ‘Alabama Song’이었다. 펑크 록의 거장 데이비드 보위가 불렀던 이 음산하고 몽환적인 노래의 출처가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였음을 알게 된 것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내게 ‘칼잡이 맥’은 여전히 ‘서푼짜리 오페라’의 삽입곡 ‘디 모리아트 폰 마키 메서’가 아니라 루이스 암스트롱·엘라 피츠제럴드·프랭크 시나트라·스팅, 그리고 우테 렘퍼의 목소리로 만나는 재즈 스탠더드 혹은 팝송이다. 애잔한 시정과 감흥이 절로 흘러 9월이면 어김없이 꺼내 듣는 재즈 보컬리스트 존 하트만이나 프랭크 시나트라의 ‘September Song’은 1939년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니커보커스의 휴일’에 삽입된 곡이었다. 2009년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의 내한 공연에서 가장 뜨거운 감동으로 기억되었던 ‘My Ship’은 바일의 1940년 작 ‘어둠 속의 여인’에 담겨 있던 곡이었다. 필자가 사모하는 고혹의 목소리 안네 소피 폰 오터가 불렀고, 재즈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과 피아니스트 칼라 블레이의 연주를 들으면 아름다운 선율을 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Speak Low’는 1943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비너스와의 단 한번의 접촉’을 위한 작곡이었다. 생전에 쿠르트 바일은 말했다.
“쇤베르크는 자신의 사후 50년을 위해 곡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오직 오늘을 위해 곡을 쓴다. 후대를 위해 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쿠르트 바일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음악은 사후 50년이 경과한 오늘에도 여전히 범용성을 갖고 있다. 오직 오늘을 위해 곡을 썼던 쿠르트 바일이지만, 그의 음악은 후대에서도 영원한 생명력을 누리고 있다.

글 하종욱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