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래틀과 런던 음악계가 나눈 밀접한 스킨십은 그의 행보를 점쳐보는유용한 기회가 되고 있다. 래틀은 무엇보다 계몽시대 오케스트라의총체적 역량에 깊은 믿음을 보내고 있었다
최근 래틀과 런던 음악계가 나눈 밀접한 스킨십은 그의 행보를 점쳐보는유용한 기회가 되고 있다. 래틀은 무엇보다 계몽시대 오케스트라의총체적 역량에 깊은 믿음을 보내고 있었다
사이먼 래틀이 2013년 1월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과의 회합에서 2017/2018 시즌 이후 악단의 음악감독을 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래틀과 런던 음악계를 결부시키는 보도가 꾸준하게 영국 언론을 달구고 있다. ‘더 타임스’지는 2014/2015 시즌을 끝으로 런던 심포니(이하 LSO) 음악감독에서 물러나는 게르기예프 후임이 래틀이라고 보도했고, ‘가디언’지는 지난해 6월 ‘래틀과 LSO가 궁합이 맞는 이유’라는 노골적인 표제의 칼럼을 실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 래틀의 파트너가 LSO였다는 가십이 더해지면서 래틀과 LSO의 결합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다.
래틀은 비즈니스적으로 또 다른 분수령을 맞고 있다. 매니저인 마틴 캠벨 화이트가 래틀의 소속사 아스코나스 홀트의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2014년 1월부터 신임 대표로 취임한 도나 콜린스가 그의 새 매니저가 됐다. 캠벨 화이트는 청년 래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전략적으로 베를린 시장을 노크해서 결국에는 베를린 필에 자리 잡도록 한 인물이다. LSO와 래틀의 밀월에 관한 지금까지의 보도를 성급하다고 할 수 있는 배경은 다름 아닌 캠벨 화이트와 콜린스의 연륜 차이에 있다.
콜린스는 새 대표로 취임하기 전까지 래틀과 관련한 오케스트라의 투어 업무를 담당하던 실무자였다. 반면 1999년 베를린 필 신임 음악감독으로 래틀이 선출된 이래 차일피일 계약을 미루며 결국 베를린 필의 독립 법인화를 이끌어낸 건 캠벨 화이트였다. 악단을 상대로 다양한 비전을 요구하고 아티스트의 이익에 부응하는 여론을 개진시키며 종국에는 큰 계약을 성사시키는 능력에 있어 앞으로 콜린스가 어떤 가시적인 실적을 보이느냐에 따라 래틀의 런던 입성 여부와 시기, 성격이 규정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4년 5·6월 래틀과 런던 음악계가 밀접한 스킨십을 나누는 한 달여의 시간은 래틀의 행보를 점쳐보는 유용한 기회가 되고 있다.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 시즌이 끝나는 시기와 맞물려 래틀은 영국에 머무르면서 계몽시대 오케스트라(이하 OAE)와 코번트가든 로열 오페라·LSO와 연이어 연주를 갖고 있다. 5월 29일부터 6월 11일까지 코번트가든 로열 오페라의 풀랑크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의 지휘를 맡고, 6월 1일엔 LSO와 슈만 교향곡 2번을 연주한다. 앞선 5월 6일, 래틀은 OAE와 하이든 ‘천지창조’를 함께 하기 위해 런던 사우스뱅크 로열 페스티벌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0년부터 1998년까지 래틀이 버밍엄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와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와 런던 주재의 오케스트라들은 그리 호의적인 관계에 있지 않았다. 시장의 특성상 적은 연습으로 많은 연주회를 가져야 하는 이들의 작업 속도에 청년 래틀은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느긋하게 작품 하나하나에 몰입하던 당시의 래틀을 고려할 때 버밍엄 심포니를 택한 결단이 현명했음은 EMI 음반과 베를린 필의 선택이 증명한다. 베를린 필에 몸담은 래틀에게 오케스트라가 요구하는 음악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일치하는 영국의 오케스트라는 사실상 계몽시대 오케스트라 하나였다. 1992년 OAE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부임한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그는 “OAE와의 만남은 내 음악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부분”이라고 인터뷰했다.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를 수행하는 사이에 OAE와 함께 하는 투어는 래틀에게 일종의 휴식이자 청량제였다.
래틀의 하이든 ‘천지창조’는 음반으로 먼저 검증된 바 있다. 1991년 3월 버밍엄 심포니·합창단, 소프라노 알린 오거, 테너 필립 랭그리지, 베이스 데이비드 토마스가 함께 한 EMI 음반은 니컬러스 템펄리의 영어 버전으로 녹음됐다. 날카롭고 명민한 템포의 변화, 성악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는 상징을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신축적인 오케스트레이션, 오디오를 통해서도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 성악과 총주 사이의 밸런스까지, 1991년의 ‘천지창조’는 래틀의 버밍엄 시대 미덕이 무엇인지를 망라한 축소판 같았다.
베를린 시대의 래틀이 하이든 오라토리오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사계’를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2003년 3월, 그는 베를린 필에서 ‘사계’를 연주해 “취임 이후 최상의 연주”라는 평가를 받았고, 가깝게는 2009년 9월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준비됐던 소프라노 크리스티아네 웰체, 테너 존 마크 에인즐리, 바리톤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라인업을 베를린 필 디지털 콘서트홀에서 볼 수 있었다. 베를린 필에서 하이든이 연주될 때 고음악 운동의 이상에 따라 래틀이 요구하는 심플한 양식과 그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에 익숙한 단원들이 어떻게 융합하는지가 관심사였다.
래틀의 믿음, OAE의 생명력으로 완성된 ‘천지창조’
지난 5월 6일, 런던 사우스뱅크 로열 페스티벌홀의 무대에는 소프라노 샐리 매슈스(가브리엘·이브), 테너 존 마크 에인즐리(우리엘), 베이스 피터 로즈(라파엘·아담), 계몽시대 합창단이 올랐다. OAE는 2013년 1월 지휘자 아담 피셰르와의 조합 이후 1년 만의 ‘천지창조’였고, 첼로 조너선 맨슨, 플루트 리사 베즈노슈크, 트럼펫 데이비드 블래카더 등 핵심 단원이 빠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지휘봉을 생략한 래틀이 포디엄에 올랐고, 창조의 첫날부터 넷째 날까지 하늘과 바다·땅의 생성을 다룬 1부가 시작됐다. 합창단을 뒤로하고 정중앙에 콘티누오가 위치했고, 더블베이스 섹션이 무대 양편으로 나뉘었다. ‘가디언’지는 합창이 목·금관악기 속에 묻히지 않도록 한 배치라고 분석했는데, 이 같은 설계는 코랄이 퍼지는 방향을 지휘자가 섬세하게 지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창조 이전의 암흑과 무질서를 묘사하는 서곡부터 개별 장면을 묘사하려는 듯 래틀의 표정이 천변만화였다. 래틀 특유의 쾌적한 포르테가 이어지는 서곡의 진행은 상쾌했고, 지휘자가 세부의 필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OAE는 지휘자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지음(知音)을 만난 것처럼 능숙하게 단정한 울림을 이어나갔다. 세 번째 곡 ‘거룩한 주의 빛 앞에서 어둠은 사라지다’와 같이 지휘의 초점이 코랄에 모아질 때, 지시되지 않은 래틀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OAE의 자발성이 두드러졌다. ‘혼돈은 물러가고 질서가 생기다’가 노래될 때는 흔들림 없이 래틀식 리듬에 조응해가는 단원들의 과감함은 새롭지만 지나치지는 않던 평소 세련된 OAE식의 무던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OAE는 래틀이 자신들을 신뢰한다는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래틀의 정신적 본향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일종의 도취감으로도 보였다. 일찍이 래틀이 코제나와 함께 OAE와 아르히프 레이블에서 모차르트 아리아집을 녹음할 때도 그랬다. 지휘자가 악단에 충분한 권한을 주고 스스로 협력자의 관계로 내려가 군림하지 않는 것, 래틀이 전체적인 얼개를 짜면 악단과 솔리스트가 대화하는 창이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 래틀은 베를린 필 단원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방식 그대로 OAE의 총체적 역량에 깊은 믿음을 보내고 있었다.
래틀은 독창자와 코러스의 테크닉이 한창 꽃을 피우도록 부드럽고 포근한 지휘를 이어나갔다. 테너 마크 에인즐리의 단정한 울림, 구체와 추상을 모두 담아내려는 듯 묵직함과 가벼움을 오가는 베이스 피터 로즈의 순발력, 가련한 톤으로 수채화의 농담을 표현하듯 중음과 고음의 경계를 아련하게 만드는 소프라노 샐리 매슈스의 질감이 발군이었다. 과감하게 힘으로 뚫고 나올 패시지에서 성악가들이 이를 자제하는 느낌은 리허설 기간 동안 래틀과의 약속에 따른 것으로 보였다. 코랄이 이어질 때마다 입으로 영어 가사를 되뇌면서 세기를 조절하는 래틀의 얼굴 변화가 인터미션 내내 합창석 관객들의 화젯거리였다.
2부는 생물체의 창조를 묘사하는 기악의 향연이었다. 사자가 포효하고 호랑이가 울부짖고 말이 달리고 소가 풀을 뜯는 장면들이 래틀의 지시에 따라 파노라마처럼 조명됐다. 논비브라토의 스트링과 바로크 팀파니의 공명이 로열 페스티벌 홀 안의 ‘천지창조’에 새 숨을 불어넣었다. 베를린 필이 고음악풍으로 접근하는 것과 OAE와의 만남은 생명력 면에서 차이가 극명했다. 2부의 해석은 고악기 제작 당시의 정통성과 현대의 가치를 결합하는 시도가 오직 일부 음악학자의 회고적 취미에 의한 것뿐 아니라 래틀과 같은 영재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원점을 되돌아보는 것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3부에서는 6일간의 창조 과정이 정리되고 아담과 이브의 입으로 신을 찬양하는 모습이 구현됐다. ‘새 힘과 새 생명이 온 땅에 넘치리라’의 3중창에선 솔리스트들이 돌아가면서 아다지오에서 부리는 느긋한 여유가 일품이었다. 음색이 거칠면서도 풍요로운 계몽시대 합창단의 하모니가 곡에서 밋밋한 구석을 없앴다.
공연 후 런던 일간지의 리뷰는 호평이 주를 이뤘다. ‘가디언’지가 ★★★★★, ‘텔레그래프’지·‘파이낸셜 타임즈’지·‘이브닝 스탠더드’지가 ★★★★, ‘더 타임스’지가 ★★★을 줬다. 래틀과 OAE의 연대감은 2001년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베토벤 ‘피델리오’를 함께 한 이후 더욱 굳건해졌다. 래틀은 ‘아츠 데스크’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서로가 가진 걸 필요로 했다”라면서 “나는 이기적이다. 그들과의 연주는 탐험과 같은 일이며, 내가 OAE에서 많이 배울 수 있어 연주를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모차르트와 하이든 교향곡들을 함께 할 것이고 언제나 OAE를 위해 시간을 만들 것이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