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4일부터 31일까지 성악 부문으로 진행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소프라노 황수미가 1위를 차지했다.
올해는 한국인 성악가 네 명이 결선에 올라 치열한 경합을 펼쳤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이 지난 5월 14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올해는 벨기에의 파비올라 여왕의 뒤를 이은 마틸드 여왕의 후원 가운데 진행됐다.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열린 결선에서 1위에는 한국 출신의 소프라노 황수미, 5위에는 박혜상이 이름을 올렸다. 성악 분야에서 한국인 두 명이 6위 안에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위해 전 세계에서 응모한 200명 이상이 오디션에 참가한 가운데 예선에 오른 73명 중 13명이 한국인이었다. 이후 결선에 오른 후보 12명 중 4명이 한국인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고, 벨기에가 2명으로 그 다음을 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황수미에 이어 2위는 벨기에 출신의 소프라노 조디 데보스, 3위는 프랑스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사라 로란, 4위는 중국 출신의 테너 샤오 유, 5위는 한국 출신의 소프라노 박혜상, 6위는 스위스 출신의 소프라노 키아라 스케라트에게 돌아갔다.
브뤼셀을 달군 젊은 성악가들의 경합
결선 첫날인 5월 28일의 무대는 조디 데보스가 첫 문을 열었다. 테크닉적으로 안정되고 외향적인 음 투사가 눈에 띄었던 그녀는 고음의 기교가 넘치는 도니체티의 ‘샤무니의 린다’ 중 ‘당신은 내 마음의 빛’, 번스타인의 ‘캔디드’ 중 ‘기쁘고 즐거워야지’에서 분수처럼 솟았다가 떨어지는 고음의 기교로 장내를 압도했다. 전체적으로 균질하면서도 실수가 없는 무대였다. 헝가리 출신의 에모케 버라트는 오케스트라의 큰 볼륨에 목소리가 묻혀버리는 안타까운 사태가 연출됐다. 롤란트 뵈어가 지휘하는 모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평소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하던 습관 때문인지 보자르 홀의 울림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듯했다. 그럼에도 버라트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청중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비록 6위 안에 들지 못했지만 매우 좋은 소프라노로 성장할 것이 기대된다.
5월 29일 무대에 오른 사라 로란은 연극배우였다가 성악으로 전향한 경우로, 뛰어난 연기력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부른 비제의 ‘카르멘’ 중 ‘하바네라’는 프랑스인 치고는 발음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지휘자 뵈어가 마치 돈 호세인 양 매혹적인 시선을 보내며 오페라 무대처럼 연기해 웃음과 박수를 동시에 샀다.
박혜상은 벨리니의 ‘몽유병의 여인’ 중 ‘친애하는 여러분’, 마스네의 ‘마농’ 중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가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이상해 이상해’에서 ‘언제나 자유롭게’로 이어지는 비올레타의 아리아에서 장식음을 처리할 때 음정이 약간 거슬리는 정도를 빼고는 거의 완벽한 고음 테크닉과 강인한 집중력, 그리고 몰입된 연기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특히 벨리니의 작품에서는 흥분에 가득 찬 채 입을 벌리는 모습으로 곡을 끝냈는데, 이어지는 관객들의 호응에 놀라서인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놀란 표정을 지어 이채로웠다. 마치 3년 전 비슷한 레퍼토리로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사했던 홍혜란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5월 30일 키아라 스케라트의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지만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부른 푸치니 ‘라 보엠’ 중 미미의 아리아 ‘모두 저를 미미라 불러요’에서는 청초한 아가씨의 풋풋함이 물씬 풍겼다. 특히 “내 이름은 미미”라 말하는 대목에서 감칠맛 나는 대화체는 얼어붙은 가슴을 녹일 만큼 뇌쇄적이었다. ‘루살카’ 중 ‘칠흑같이 검은 밤하늘의 은빛 달’은 장내를 술렁거리게 할 정도였다.
콩쿠르 후,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스트라스부르 랭 오페라극장장 마르크 클레뫼르에게 키아라 스케라트가 왜 6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저는 이미 1년 반 전, 랭 오페라 다음 시즌 프로그램으로 그녀를 발탁했습니다. 모차르트 ‘티토 왕의 자비’에서 세르빌리아 역을 할 예정인데, 소프라노 레지에로를 위한 곡입니다. 스물일곱 살인 그녀의 나이를 감안하면 나이에 맞지 않는 무거운 ‘루살카’를 택한 게 아닐까요? 그것도 2천 석 가량 되는 홀에서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말입니다. 그녀에게는 너무 무거운 곡이기 때문에 점수를 잃었다고 봅니다.”
바리톤 유한승은 비평가들로부터 진정한 우승 후보로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였다. 키는 작지만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연주자로 준결승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콩쿠르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그가 택한 트럼펫 솔로가 인상적인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BWV248 중 ‘위대하신 주, 강하신 왕’은 소화하기 무척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다. 유한승은 곱고 균질한 호흡과 맑고 화사한 톤 컬러로 이 곡을 아름답게 마쳤다. 차이콥스키 ‘스페이드의 여왕’ 중 ‘당신은 이미 가고’의 고음 부분에서 한두 번 발음 문제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금관이 작열하는 말러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에서는 오케스트라의 투티를 뚫고 나가기 위해 엄청난 포르테를 이끌어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봉착했다.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의 ‘나는 이 거리의 제일가는 이발사’에서는 부파적인 피가로의 잡담을 저속하지 않으면서도 즐기는 듯한 아기자기함으로 임했다. 하지만 첫 파트를 마무리하는 고음에서 돌연 소리가 틀어졌다. 그럼에도 빠른 레치타티보풍 프레이즈로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을 보이나 싶더니, 마지막 하이 G음을 한 옥타브 아래로 낮춰 부르며 아리아를 마무리했다.
그는 연주 후 모든 후보들이 참여하는 아르테 TV와의 인터뷰도 사양한 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전해왔다. 황수미는 유한승의 공연에 대해 “바리톤으로 하이 G음을 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음들만 있는 곡들을 골랐더군요. 음악적으로 좋았고, 발음도 완벽했어요. 특히 바흐의 곡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없을 겁니다”라며 놀라움을 전했다. 하지만 그날 유한승에 대한 안타까움은 한국인 연주자들뿐 아니라 그날 결선을 지켜보던 소프라노 임선혜의 마음도 아프게 했다.
황수미는 도니체티의 ‘돈 파스콸레’ 중 ‘그 눈길이 기사의 마음을 사로잡아’로 시작을 알렸다. 그녀의 강렬한 테크닉과 스케일이 큰 볼륨은 이번 결선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의 볼륨이 크니 적으니’ 하는 논쟁을 불식시켰다. 무대에는 압도적인 소프라노와 그와 함께하는 오케스트라만이 있을 뿐이었다. 푸치니 ‘투란도트’의 ‘들어보세요, 왕자님’은 그녀의 엄청난 목소리 힘 때문에 가련해보이지는 않았지만 감수성과 고운 프레이징, 표현성이 돋보였다. 이어진 샤르팡티에 ‘루이스’의 ‘그날 이후’를 부르는 모습 또한 가련하거나 순진무구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역설을 ‘르 스와르’지는 “그녀는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라고 표현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저녁노을 속에’는 뛰어난 발음과 뛰어난 표현성 그리고 명료한 텍스트 감각으로 오페라 아리아 못지않은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며 놀라움을 안겨줬다.
5월 31일은 테너 김승직이 첫 순서로 나섰다. 푸치니 ‘라 보엠’의 ‘그대의 찬 손’에서 하이 C를 문제없이 불러 박수 갈채를 연발시켰고, 라흐마니노프의 ‘여섯 개의 노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노래하지 마오’에서는 엄청난 표현성과 고운 레가토를 인상적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볼륨이었다. 언론들은 준결승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던 그를 상기하며 결선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샤오 유는 뛰어난 불어 발음과 세련된 감수성으로 주목 받았다.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의 ‘어디로 가버렸나, 내 젊음의 찬란한 날들’은 인상적이었지만, 테너의 희소성 때문에 더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결선의 모든 순서가 끝나고, 1위는 황수미에게 돌아갔다. 현지 관객들에게 황수미의 우승은 3년 전 홍혜란이 벨기에 출신의 테너를 앞서며 우승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보자르 홀을 가득 채운 청중은 모두 기립박수로 황수미의 우승을 축하했다.
‘르 스와르’지는 그녀의 우승에 대해 “명백한 심사 결과!”라고 표현하며, “강한 개성과 탁월한 목소리, 엄청난 잠재력의 소유자이자 명확한 프로의식을 갖췄다”라고 그녀를 칭찬했다. 그와 함께 “박혜상의 놀라웠던 퍼포먼스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그녀가 더 높은 순위에 들지 못한 것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시상식 후 열두 명의 후보들은 마틸드 여왕이 여는 리셉션장으로 향했다. 때문에 생생한 수상 소감을 현장에서 듣기는 다소 어려웠다. 하지만 리셉션장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서 네 명의 한국 성악가들은 콩쿠르 참석자들을 보며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화사한 모습의 황수미와 박혜상의 만개한 미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승부를 초월해 최선을 다한 유한승의 잔잔한 감성과 김상직의 낙천적인 표정은 정말 아름다워보였다. 수년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취재해온 가운데 이번처럼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에 고취된 적은 없었다. 이번 대회는 정말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러워할 일임에 틀림없었다.
1위 수상자 소프라노 황수미 인터뷰
강렬한 테크닉과 스케일이 큰 볼륨으로 엄청난 잠재력을 선보인 소프라노 황수미를 5월 30일 결선 무대를 마친 다음 날 만날 수 있었다.
다음은 황수미와의 일문일답
이번 콩쿠르에 출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모든 음악인들이 다 아는 콩쿠르에 선다는 것은 제게 꿈의 전당에 들어서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3년 전 독일 유학을 시작하던 시절, 홍혜란 씨가 1위를 한 콩쿠르 중계를 보면서 3년 후 내가 저 무대에 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콩쿠르에서 생각지 못한 결선까지 오게 됐으니 제겐 이미 엄청난 경험들을 한 셈입니다.
결선에 오른 소감은 어떤가요.
제가 부른 네 곡 중 푸치니·샤르팡티에·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 모두 처음 부르는 곡이라 부담이 많았습니다. 초반에 결선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원서를 낼 때 형식상 써냈던, 익숙지 않은 곡들이었죠. 그런데 결선까지 올라 그 곡을 불러야 하는 상황이 되니 부담도 되고 몸도 아프기 시작하더군요. 준비가 미흡하다는 심리적인 부담 때문인지 일주일 전 오케스트라와 연습할 때도 너무 안 맞았고요. 이 상태로 무대에 서야 하나, 도중에 하차해야 하나 고민을 백 번도 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안 올 기회이니 시간이 주어지는 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결선 무대에 섰습니다.
결선 무대가 끝난 후 울지는 않았나요.
오히려 끝났다는 해방감이 커서 울지는 않았습니다. 호스트 패밀리는 샴페인을 터트렸고, 저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어요. 흥분 속에서 겨우 3시간 정도 잠을 잔 것 같네요. 오늘 아침, 제가 지금 누리는 상황이 특별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제 안에 전율이 느껴졌거든요.
도니체티에서는 말하듯 노래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서는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내더군요.
도니체티의 곡은 익숙하기도 했고, 연기가 필요했지요. 오늘 자(5월 31일) 신문에서 “슈트라우스는 석양이 지는 듯 했다”라는 호평이 났다고 호스트 패밀리가 이야기해 주더군요.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면서 정말 아름다운 곡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볼륨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하하! 몇몇 후보들은 오케스트라에 묻혔는데 저는 오케스트라를 커버한 것이 놀랍다는 코멘트를 들었습니다. 제 소리가 정말 컸나 봐요.(웃음)
롤 모델로 삼은 가수는 누구인지.
초기 시절의 안나 넵트렙코입니다. 도니체티와 벨리니를 예쁘게 잘 부르던 목소리도 좋지만 그녀의 연기는 정말 자연스럽죠. 목소리와 테크닉도 완벽해야 하지만 오페라를 하려면 보이는 이미지도 중요하기 때문에 연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큰 키에 시원한 외모가 넵트렙코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결선에서 선보인 푸치니 ‘투란도트’ 중 리우의 아리아를 떠올려보면 연약한 리우 역을 하기엔 외모나 목소리가 좀 강한 편이 아닐까요.
혹 제가 투란도트를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이었나요?(웃음) 제 생각엔 리우는 객관적으로 가련한 여성 캐릭터이지만 사실 칼라프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외유내강의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들어보세요, 왕자님’을 부르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정말 사랑하는 칼라프가 심판대에 올라가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어요. 그를 붙잡는 마음을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강한 성격처럼 비쳐졌나 봅니다.
실제 성격은 강한 편이 아닌가요.
때에 따라 다른 편이에요. 유학 생활에서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표현하는 것과 그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웠죠. 또 혼자 생활하면서 적극적이고 강인한 성격이 두드러지게 된 것 같습니다.
샤르팡티에의 ‘루이스’는 어떻게 접했나요.
책과 여러 음반들을 많이 보고 들었습니다. 아리아를 위해 뮌헨에 있는 퀘벡 출신의 코치에게 프랑스어 지도를 받았고, 콩쿠르 기간 동안에는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아침마다 가사를 읽었습니다. 노래가 잘 이해되는지 그들 앞에서 매일 불러보았죠.
한국에서, 또 독일에서 유학하며 배운 것을 꼽아본다면.
테크닉은 한국에서 서울대 재학 시절에 많이 배웠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학생이 아니어서 선생님들께 많이 혼나면서 배웠죠. 독일에서는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연기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상금을 받으면 어떻게 사용할 생각인가요.
저는 상금보다는 콩쿠르의 규모와 영향력을 염두에 두고 참가했습니다. 어찌되든 상금은 학비를 마련하느라 고생하신 부모님께 드릴 생각입니다.
(그녀는 1위를 수상하며 2만 5천 유로를 상금으로 받았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저희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아버지는 취미로 색소폰을 연주하시고, 어머니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이고요. 어려서 KBS 어린이합창단 활동을 했는데, 당시 지휘자 선생님이 성악을 제대로 배워보면 좋겠다고 권하셨어요. 작은 콩쿠르에서 상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함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음악가로서 겪고 있는 어려움이 있을텐데요.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이 가장 힘듭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더라도 때로는 풀어주는 것이 필요한데,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안동에서 생활하다가 서울예고에 입학했는데, 그 당시에는 제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서울대에 들어가서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느끼며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것을 이겨낸 것이 지금 제게 큰 경험이 됐습니다.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됐으니까요! 그 슬럼프를 넘기면서 매일 연습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덕분에 발성도 많이 향상됐지요.
프로다운 기질이 매우 많군요.
한국에 있을 때 선생님께서 “프로가 되지 않고서는 관객 앞에 진실되게 설 수 없다”라고 얘기해주셨어요. 늘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가을부터 서는 본 오페라에서는 어떤 레퍼토리가 잡혀 있나요.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파미나, 비제 ‘진주 조개잡이’의 레일라, 헨델 ‘리날도’의 알미레나로 무대에 섭니다. 앞으로 베르디나 도니체티의 작품들도 하고 싶어요. 꼭 서보고 싶은 오페라극장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좋은 프로덕션으로 제 목소리에 무리가 없는 한 어디든 기꺼이 갈 생각입니다.
결승 진출한 한국 성악가 3인의 이야기
소프라노 박혜상
“다채로운 경험에 예술가적 기질을 녹여냈다”
3년 전 이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홍혜란 씨를 보면서 언젠가 같은 자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 출전할 때는 결승까지 오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제게 벌어진 일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결승 무대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가 힘들었어요. 마음속으로 울면서 무대에 올라갔죠. 카메라 때문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정말 떨었어요.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 같은 꼬마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들이 스치더군요.
결선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연속으로 부르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큰 기대 없이 출전해서인지 대곡들을 부르는 것이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어요. 하이 C부터 하이 D, 하이 E♭까지 고난도의 연속이었지만 막상 무대에 서니 아드레날린이 샘솟더군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비올레타의 아리아는 지금의 인생 경험에 맞춰 충실하게 불렀습니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겪은 사랑과 실연의 경험에 예술가적 기질을 담아 작품에 녹여냈다고 생각해요. 저는 디바로서의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동시에 순수한 사랑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운명적인 누군가를 만난다면 사랑을 택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오페라 속 여주인공들의 아리아를 부를 때 저와 닮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만약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오페라를 위해 기꺼이 경험할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저는 마리아 칼라스·안나 넵트렙코·르네 플레밍을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존경하는 분은 저희 교수님들입니다. 그분들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 진심으로 부르는 노래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또 르네 플레밍과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배운 것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플레밍은 소리를 위로 띄운 후 자연스러운 공명에 몸을 맡기는 법을 알려줬어요. 그 당시에는 잘 이해가 안됐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방법들이 이번 콩쿠르에서 제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테너 김승직
“힘보다 음악성으로 승부수 띄웠다”
저는 모교인 서울대 재학 중 콩쿠르에 출전했습니다. 예선에만 올라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결선까지 진출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한국에서만 공부해왔기 때문에 서양음악의 본고장에서 해외 지휘자,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선 것도 제게는 큰 경험이자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결선에서 오케스트라의 볼륨이 리허설 때보다 컸지만, 오케스트라를 커버하려고 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욕심을 버리고 평소 하던 대로 편하게 임했습니다. 푸치니 ‘라 보엠’ 중 로돌포의 아리아는 하이 C가 들어가고, 베르디 ‘레퀴엠’의 ‘탄식하노라’는 너무 무거워서 다 잘해낼 수 있을지 염려가 많았는데 다행히 무사히 끝낼 수 있었습니다.
제 목소리를 정의하자면 따듯한 리릭 테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콩쿠르에서는 프레이징을 유연하게 풀어가려 노력했습니다.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정말 많기 때문에 힘으로 견주는 것보다는 음악성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이번 콩쿠르에 참가하면서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의 표현이 자연스러운 것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 사람들은 좀 딱딱한 편이죠.
서울대 동문인 황수미·박혜상 선배와 함께 이번에 결선 무대에 올랐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제 스승인 박현재 교수님을 꼭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바리톤 유한승
“콩쿠르는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계기”
최선을 다해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하지만 콩쿠르에서 실수는 용납될 수 없죠. 결선 무대에 섰을 때는 잘 몰랐는데 무대에 내려온 후 속이 안 좋았습니다. 아마 식사가 체했던 것 같은데, 자기 관리를 못한 부분을 스스로 냉정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가 부른 곡들은 금관의 비중이 대부분 높은 편이었는데, 연습 때보다 결선 당일에서 오케스트라의 볼륨이 크더군요. 그러다 보니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져 좀 무리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 또한 경험이겠지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성악가로서 무엇보다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작정 소리에만 집착하거나 돈을 벌기 위한 마음으로 음악을 대한다면 예술성을 잃어버릴 우려가 큽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음악을 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늘 점검하려고 애씁니다.
현재 저는 카셀 오페라극장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극장에서는 제 나이에 맞게, 너무 무리가 되지 않는 역을 받는 편입니다. 10~20년 후를 내다보며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지만, 키도 작고 외모도 유럽인들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연기를 두 배로 연습하고 있습니다. 아직 드라마틱한 역을 해보지 않아서 심각한 역을 맡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배우로서의 표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요.
성악은 기악처럼 하루에 오랜 시간 연습하기는 힘듭니다. 대신 저는 매일 한 시간씩은 꼭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이가 되는 한 콩쿠르에는 계속 도전하려고 합니다. 콩쿠르는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저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거든요. 정해진 시간에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때로는 공연보다 더 높은 차원의 완벽을 필요로 합니다. 그 순간을 위해 갈고 닦는 것이 저 자신에게 유익한 시간이죠.
2014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
세르주 도르니 인터뷰
올해 위촉된 심사위원단 가운데 프랑스 유수의 극장장을 지낸 세르주 도르니를 직접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예년과 비교했을 때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분위기는 어떠했나.
요즘 유럽에서 활동하는 성악가들은 세계 전역에서 옵니다. 다른 직업처럼 글로벌화 현상을 타는 직종이 됐습니다. 남미나 북미, 아시아권의 예술시장도 점점 더 개방되어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콩쿠르에 출전하는 대부분의 후보들은 보다 개방된 문화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도 잘 훈련된 동양권 성악가들이 있었지만 서양문화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즉 악기로서의 기량은 매우 좋았지만, 문화적 차원에서 언어나 감수성에 차이가 있었지요. 반면 요즘 아시아권 성악가들은 엄청난 진보와 향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국입니다.
일단 테크닉적 한계를 초월해 기량이 월등히 발전되었고, 서양문화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언어감각과 감성 면에서도 독특한 진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 리트에 대한 언어적 감각과 이해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또 일부 동양인 성악가들은 바로크 음악에서도 뛰어난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전까지는 테크닉적으로만 뛰어났고, 모든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비슷해 인공적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목소리에 표정과 문화적 이해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미권 역시 이러한 경우에 속하고 있습니다.
결선에 진출했던 한국 성악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있다면.
한국 성악가 네 명 모두 6위 안에 들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중 황수미는 제가 1위로 손꼽았던 후보였어요. 실제로도 그녀가 1위를 차지해 무척이나 기쁩니다. 그녀는 콩쿠르 전반에서 매우 균질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특히 슈트라우스나 알반 베르크의 리트에서는 문화적인 이해뿐 아니라 일종의 완숙미가 드러나 놀라웠어요. 이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판정은 거의 만장일치였습니다.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었으니까요.
바리톤 유한승은 아주 좋은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준결승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나 6위 안에 들 것이라 확신했지만, 결선 무대는 기대 밖이었어요. 자신의 역량을 벗어난 레퍼토리 선택이 스스로를 위기로 몰고 간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문제는 바흐의 아리아였어요. 바리톤인 그가 왜 하필 자신의 음역을 벗어난, 베이스를 위한 아리아를 택한 것일까요. 이어진 레퍼토리 역시 여기에서 생긴 손해를 고스란히 끌고 가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아리아를 다 마치치도 못한 채 마무리 되었지요. 잠재력이 많은 목소리이지만 자신의 역량을 너무 크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가이드가 필요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활동 기간이 단축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소프라노 박혜상의 목소리는 흥미로운 편이나 이따금 어필되기 위해 길들여진 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자제력으로 결선 무대를 마쳤습니다. ‘몽유병의 여인’ 중 ‘친애하는 여러분’은 그녀에게 잘 어울리지만, ‘라 트라비아타’ 비올레타의 아리아를 소화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가볍습니다.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곡이 많은데도 굳이 어울리지 않는 레퍼토리를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비올레타를 계속하겠다면 목소리를 해칠 가능성이 높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테너 김승직은 준결승 무대에서 아주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결선에서는 볼륨 면에서 많이 아쉬웠어요. 오케스트라 볼륨과는 별개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지닌 발성 테크닉이 문제인 것 같아요. 음을 내는 방법에 관해 고민해보길 바랍니다. ‘0’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꼭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테크닉을 발전시키길 바랍니다. 좋은 악기를 지닌 것이 분명하지만, 그 악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니까요. 스물세 살의 젊은 테너로서 가진 그의 음악적 감수성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사진 Concours Reine Elisabe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