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그린 피아노에 대한 동경

프랑스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피아노 앞의 두 소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7월 1일 12:00 오전


▲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피아노 앞의 두 소녀’

‘피아노 앞의 두 소녀’를 시작으로 르누아르는 화가로서 더욱 승승장구했으며, 자신의 미술세계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린 ‘피아노 앞의 두 소녀’는 모두 여섯 점이다. 이중 다섯 작품은 1892년에 그렸으며,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 중인 뤽상부르 버전을 비롯한 네 폭의 유화 외에도 두 장의 스케치를 더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스케치 중 하나는 유화, 다른 하나는 파스텔화다. 모두가 화랑이나 수집가에게 팔기 위한 목적으로 그린 것이다.

뤽상부르 버전도 그림 속 여주인공들의 금빛 머리칼처럼 화사하다. 선의 경계가 부드러운 것이 파스텔화 같은 느낌마저 든다. 같은 해 거의 똑같은 포즈와 구도로 그린 유화 버전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 중인데,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에 비해 색채가 더욱 강렬하다. 또 다른 버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 주 박물관에 있다.

르누아르는 1890년 모델 알린 샤리고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1885년에 이미 낳은 아들 피에르가 있었다. 결혼 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풍경화나 야외 활동하는 사람들 모습 대신에 안락한 실내 생활에 화가의 시선이 닿았다는 사실이다. 아들만 셋을 둔 르누아르는 피아노 치는 다른 집 딸들이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한 소녀는 푸른색 띠가 있는 흰색 계통의 드레스를 입었고, 서 있는 다른 소녀는 피아노·커튼·벽지와 비슷한 계열의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커튼은 외부와 차단된 실내 공간의 아늑함을, 액자와 의상은 풍족함과 여유를 상징한다. 피아노 좌우에서 화폭을 가득 메우고 있는 푹신한 소파에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이 배어나온다. 피아노는 평화로운 가정 속 사이좋은 자매의 하모니가 깃든 곳이다. 앉아있는 금발머리 소녀는 왼손으로는 악보를 넘기고 있다. 갈색 머리의 언니는 피아노에 바싹 기대 있으며, 둘 다 입을 약간씩 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피아노를 치면서 함께 노래하고 있거나 음악에 흠뻑 빠져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하다. 악보에는 제목이 적혀 있진 않지만 비숍의 ‘즐거운 나의 집’ 같이 간단한 반주와 노래를 함께할 수 있는 곡일 것이다.

연한 녹색과 살구빛 핑크색이 달콤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공간 속 소녀들의 머릿결을 감싸고, 피아노 위에는 화병이 놓여 있다. 비좁은 실내에 꽂아둔 꽃 몇 송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탁 트인 야외를 생각나게 한다.


▲ ‘피아노 레슨’

당시의 회화나 소설 작품에서 피아노 연주는 여성 교양의 필수적 활동으로 등장한다. ‘피아노 앞의 여성’이라는 주제는 프라고나르 등 18세기 화가들의 관심으로만 보였지만, 19세기에는 가정용 피아노의 보급과 함께 드가·고흐·고갱 등 프랑스 화가들도 즐겨 그린 소재다. 피아노 연주는 여성의 실내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가였다. 소시민의 일상생활에 주목하기 시작한 화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텍스트를 분석한 한 통계에 따르면 피아노 연주 장면이 2천여 군데에 나오는데, 그 주인공의 절반가량이 미혼 여성이다. 나머지는 기혼 여성과 남성이 반반씩 차지한다. 회화와 소설뿐만 아니라 잡지·서적·악보의 표지, 피아노 레슨 광고의 삽화에서도 피아노 치는 여성은 단골로 나왔다. 여성을 위한 패션 잡지에는 피아노 앞에서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한 모델이 등장했으며, 어떤 잡지에는 권말 부록으로 피아노 소품 악보를 싣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피아노를 가리켜 “중산층 가정의 필수 가구”라고 말했다.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피아노 연주는 좋은 여가 활동일 뿐만 아니라, 미혼 여성에게는 결혼과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결혼 생리학’에서 아예 여성을 피아노에 비유했다.

“여성은 쾌락을 연주하는 달콤한 악기다. 하지만 떨리는 줄에 익숙해야 하며 건반을 연주하는 자세와 운지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여성 피아니스트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의 영역에 머물렀다. 파리 음악원에 처음 피아노 전공을 개설했을 때 남학생과 여학생이 연주해야 할 입시 과제곡이 달랐다. 가르치는 교수와 졸업 연주곡도 마찬가지였다. 여학생은 졸업해도 어차피 가정주부가 될 터이니 아마추어 수준으로 가르쳤고, 남학생은 전문 연주자로 길러야 하기 때문에 스태미나와 테크닉을 요하는 베토벤·리스트의 소나타를 가르쳤다.

작가 스테판 말라르메는 르누아르의 열성팬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말라르메에게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공무원 중 문화부에서 미술을 담당하는 로제 막스가 있었다. 말라르메의 부탁을 받은 막스는 앙리 루종 장관을 모시고 르누아르의 화실을 방문한다. 이때 막 완성한 그림이 뤽상부르 버전이다. 장관은 이 그림을 얻기 위해 당시 상점 점원의 연봉, 4인 가족의 1년 생활비 네 배에 해당되는 4천 프랑의 값을 치렀다. 당시 정부가 화가에게 직접 작품을 구입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민간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 다음 출품작이 평론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나서야 정부나 국공립 미술관에서 작품을 구입했다. 뤽상부르 미술관은 살아있는 화가들의 작품만 전시하는 현대미술관이었다. 여기에 작품이 걸린다는 것은 화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예였다. 이 작품 덕분에 르누아르는 화가로서 더욱 승승장구했으며, 자신의 미술세계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 ‘피아노 앞의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이 소장 중인 유화 버전은 유일하게 1897년 작품이다. 위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소녀들이 부쩍 자란 느낌이다. 오랑주리 버전은 모델을 구해서 그린 게 아니라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다. 5년 전 완성된 그림의 여주인공들과 나이 차이는 났지만 포즈는 그대로 따라했다. 작품 제목에도 이본 르롤과 크리스틴 르롤 자매의 이름이 등장한다. 핑크빛은 강렬한 빨강색으로, 흰색 드레스는 금빛 레이스로 꾸몄다. 두터운 커튼으로 외부와의 단절을 보여준 1892년 작품과는 달리, 벽면에 경마와 발레 연습 장면을 그린 드가의 작품이 걸려 있다. 이전 작품이 화랑이나 수집가에게 팔기 위해 누구에게나 공개하고 싶은 작품이었다면, ‘피아노 앞의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은 르누아르 자신이 소장하기 위한 것이다.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화가 겸 미술품 수집가인 친구 앙리 르롤의 두 딸은 자신에게도 딸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르누아르의 그림 모델을 자청했다. 르롤의 집은 당시 음악가들이 자주 드나들던 살롱으로 꾸며졌다. 이본 르롤은 그림을 그릴 당시 이미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으며, 드뷔시의 작품 ‘영상’을 헌정받기도 했다. 뤽상부르 버전에도 피아노가 나오지만, 르롤이 연주하는 악기는 그랜드 피아노로 등장해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차이를 나타냈다. 르누아르는 르롤 가족과의 친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 그림을 평생 동안 자신의 거실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르누아르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성가대 대원으로 활동했으며, 샤를 구노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화가의 길을 걸어야 했다. 르누아르는 당시 유럽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바그너를 무척 존경했다. 1882년 이탈리아 여행 도중 팔레르모에서 우연히 바그너를 만났다. 당시 바그너는 마지막 걸작 ‘파르지팔’의 완성을 위해 팔레르모에 머물고 있었다. 르누아르는 바그너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두 번의 거절 끝에 35분이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얻어 후다닥 완성했다. 이 그림은 현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 중인데, 바그너는 완성된 그림을 보고는 “개신교 목사 같군 그래!”라며 웃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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