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린 마젤 1930~2014

영원히 음악으로 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8월 1일 12:00 오전

우리 시대의 마에스트로 로린 마젤이 2014년 7월 13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7월 14일 새벽이었다. 전날 카를로스 클라이버 10주기를 각별한 마음으로 보내고,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로린 마젤의 부음을 접한 건 경기 시작 30분 정도가 남았을 즈음 SNS를 통해서였다.

현지 시간으로 7월 13일, 미국 버지니아 주 캐슬턴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작고한 마젤은 우리나라 청중에게 특히 친숙한 지휘자였다. 아마 정상급 거장들 중에서 가장 많이 국내 무대를 찾았을 것이다. 뉴욕 필·빈 필·피츠버그 심포니·필하모니아·시카고 심포니·뮌헨 필 등 그가 이끌고 내한했던 악단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또 마젤은 1988년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초청된 라 스칼라 오페라를 이끌고 세종문화회관에서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공연했고, 2003년에는 서울시향을, 2008년에는 뉴욕 필의 평양 공연을 지휘했는가 하면,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장한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와 유독 인연이 깊었던 로린 마젤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경이로운 기록의 마에스트로

로린 마젤은 ‘신동 지휘자’ 출신으로 유명하다. 1930년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미국 피츠버그에서 성장한 그는 8세 때 아이다호 대학 오케스트라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연주하며 데뷔했다. 9세 때는 전설적인 거장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의 초청으로 LA 필하모닉을 지휘했고, 11세 때는 토스카니니의 부름을 받아 NBC 심포니의 방송 콘서트를 지휘했다. 그리고 그 후로 15세 때까지 미국의 거의 모든 메이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다녔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신동’은 흔한 편이지만, 지휘계에 있어서만큼은 예외다.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어서까지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마젤의 프로 지휘자 경력은 84년 생애 중 무려 72년에 달한다.

한창 때의 마젤은 기록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야심가였다. 1960년, 마젤은 30세의 나이로 ‘바그너의 성지’인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로엔그린’을 지휘했다. 이 축제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미국인 지휘자였다. 얼마 후에는 같은 축제에서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를 지휘했는데, 그 역시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965년에는 베를린 도이치 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콘서트 무대가 주류를 이루는 미국에서 성장한 지휘자가 견고하면서도 고유한 오페라 극장 시스템이 존재하는 독일에서, 그것도 메이저 오페라 극장을 손에 넣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에서 마젤은 카라얀의 베를린 필, 동베를린의 슈타츠오퍼에 맞서 자신의 존재감을 당당히 부각시키는 성공 신화를 창조했다. 나중에 그가 빈 슈타츠오퍼의 총감독(1982~1984)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경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처럼 다양한 메이저 오케스트라를 수중에 넣었던 지휘자도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베를린 시절 그는 도이치 오퍼(1965~1971)뿐 아니라 베를린 방송교향악단(RSO)까지 맡아서 11년 동안(1964~1975) 호령했다. 1970년부터는 노장 오토 클렘페러를 보좌해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함께 이끌었다. 1972년 클렘페러가 은퇴를 선언하자 악단 측이 마젤에게 단독 상임 지휘자직을 제안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해 마젤은 조지 셀의 후임으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1972~1982)를 맡았고, 1977년부터는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1977~1991)의 음악감독을 겸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동시에 보직을 맡는다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 마젤은 그 기간을 꾸준히 이어갔다. 클리블랜드에서 물러난 후에는 피츠버그 심포니(1988~1996)를 맡았고,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를 놓은 다음에는 뮌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1993~2002)으로 옮겼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쿠르트 마주어의 후임으로 뉴욕 필하모닉(2002~2009)을 맡았고, 이후에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필하모닉(2006~2011), 뮌헨 필하모닉(2011~2014) 등을 거느렸다.

마젤은 언제나 화려한 스타 지휘자였지만 한편으론 시련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공교롭게도 올 초 작고한 클라우디오 아바도와의 악연으로 얽혀 있다. 먼저 1984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에서 개혁을 추진하다가 극장 측, 시 당국과 마찰을 빚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2년 후 그 자리를 대신한(다만 총감독이 아니라 음악감독이었지만) 사람이 아바도였다. 1989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선출 투표에서 아바도에게 밀렸다. 그 직후 그는 향후 일정을 포함해 악단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혹시 ‘아바도 콤플렉스’ 같은 게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로부터 4년 후에 주어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자리가 충분한 보상이 되었으리라. 거기서 그는 마지막 전성기를 보냈고,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관계도 회복했다.

 


▲ 8세에 지휘자로 데뷔한 마젤의 어린시절

우리에게 남긴 음악의 유산

마젤은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그의 바이올리니스트 데뷔는 15세 때였고, 대학 시절에는 피츠버그 심포니의 바이올린 섹션과 실내악단에 참여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뮌헨에서 직접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첼로 협주곡·플루트 협주곡을 발표했는데, 그중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는 자신이 직접 맡아서 연주했다. 2005년 5월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그의 첫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조지 오웰의 소설에 기초한 ‘1984’였다.

바이올린과 지휘봉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독보적인 능력은 그를 일찍이 빈 필 신년음악회 무대로 인도했다. 빌리 보스코프스키의 뒤를 이어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지휘봉과 바이올린을 번갈아 들면서 연주에 임했던 것이다. 그는 그 후로도 4회 더 빈 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그가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의 포디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은 2005년 공연 실황 영상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니면 2004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 신년음악회 실황 영상물에서도 그의 바이올린 연주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로린 마젤은 300개 이상의 음반·영상물을 남겼다. 그중 서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시절의 여러 개성적인 녹음들(DG),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시벨리우스 교향곡집(Decca),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시절의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과 거슈윈 ‘포기와 베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시절의 R. 슈트라우스 관현악곡집(RCA),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바그너 관현악곡집(RCA) 그리고 최근 차례로 출반되고 있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말러 교향곡집(Signum Classics) 등은 특별히 언급해둘 만하다. 오페라 지휘자로서 면모는 이제는 영상물을 통해서 확인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라 페니체 극장에서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와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푸치니 ‘나비부인’이 대표적이다. 또 과거 화제를 모았던 영화판 오페라들도 놓치기 아까운데, 조지프 로지 감독의 ‘돈 조반니’와 프란체스코 로지 연출의 ‘카르멘’, 프랑코 체피렐리 연출의 ‘오텔로’ 등이다.

 

최만년의 원숙미를 증언하는 말러 교향곡 5번

로린 마젤의 진가는 실연을 통해서만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상보다 이른(!) 그의 부음은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작년 시카고 심포니, 재작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에서 그의 실연을 오랜만에 접했다.

이전까지 주로 음반을 통해서 만나온 그의 지휘는 종종 얄밉기까지 했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그에게 지휘는 마지막까지 도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쉬운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젤은 마치 모든 음악을 한 단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휘했고, 언제나 한발 앞서가며 시간의 흐름마저 관리하는 듯한 지휘는 가장 열정적이거나 역동적인 순간에조차 특유의 냉랭함을 풍기거나 독특한 분절감 내지 정체감을 빚어내곤 했다.

그러나 이 초인적 천재 지휘자에게도 원숙기가 도래했는지 지난 두 해 동안 예술의전당에서 마주한 그의 음악에서는 놀라운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5번이었는데, 그는 이 변화무쌍한 작품을 브루크너를 방불케 하는 유장하고 광활한 흐름으로 녹여냈다. 그러면서 디테일을 매만지던 그 노련한 손길, 그리고 그 개성적인 지시에 여유롭게 반응하던 오케스트라의 정련도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경이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지난 2011년, 말러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마젤과 진행했던 말러 사이클 실황 녹음을 속속 발매하고 있다(Signum Classics). 아무래도 예술의전당에서 느꼈던 전율을 재현할 수는 없겠지만, 거장 최만년의 원숙미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들어볼 가치는 차고도 넘친다. 아마 과거 마젤이 빈 필하모닉을 이끌고 녹음한 말러 사이클에 실망했던 이들에게도 새로운 감흥과 깨달음을 안겨주지 않을까 싶다.

이 각별한 유작에 다시금 귀를 기울이며, 타고난 천재성과 다재다능함, 대학에서 철학·수학·언어학을 공부한 심오한 소양을 바탕으로 남다른 지휘 세계를 펼쳐 보였던 거장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 마젤/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말러 사이클 로열페스티벌홀 실황반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