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봉준호

소리와 울림, 그곳에 영화가 있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8월 1일 12:00 오전

지난여름, 출발 신호를 알린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최근 북미 대륙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크린 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는 동시에 최근 영화 ‘해무’의 제작자로 나선 그를 파리에서 만났다

지난여름, 새하얀 빙하 사이를 뚫고 하염없이 달리던 ‘설국열차’를 기억하는지. 영화 속에서 세계 각지를 횡단하던 그 열차가 스크린 밖, 현실 세계에서 지금도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고 있다면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다.

‘설국열차’가 북미에 들어선 것은 지난 6월 말이었다. 8개 상영관에서 개봉한 영화는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7월 중순, 북미 전역 350개가 넘는 상영관을 장악했고, VOD 출시 하루 만에 미국 아이튠스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설국열차’는 영화의 원작인 그래픽 노블의 나라 프랑스에서 지난해 한국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 전까지 프랑스에서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은 소수의 영화 팬들 사이에서만 향유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국열차’가 개봉됐던 2013년 10월 30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그래비티’와 맞붙었음에도 ‘설국열차’를 상영하는 파리 곳곳의 영화관은 모두 만석이었다. 주요 언론들은 ‘그래비티’ 이상으로 극찬을 보냈고,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이 한국 영화감독으로 인해 세계화가 되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이후 ‘설국열차’는 누적 관객 90만 명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2000년 ‘취화선’이 가지고 있던 한국 영화 프랑스 최대 관객 수 35만 명의 기록을 단숨에 깨버렸다. 특히 프랑스 TV 채널 아르테의 영화 부문 감독이자 로테르담 영화제의 프로그래머였던 영화비평가 올리비에 페르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봉준호는 우리를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설국열차’는 그가 현시대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는 시각적으로 경이로운 뛰어난 비주얼을 선사하며, SF영화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오늘날 SF영화는 엄청난 예산의 블록버스터로서 영혼도 상상력도 없이 변질되었으나, ‘설국열차’는 정확히 이 반대 지점에 있다. 그의 아이디어와 명석함은 영화적 재능을 넘나들며 순수하고도 뛰어난 미장센을 펼친다. 이 눈부신 미장센으로 봉준호는 자신의 스타일을 다시 한 번 뛰어넘었다. 특유의 뛰어난 화가적 필치를 간직한 채, 문학 작품에서나 있을 법한 감동과 볼거리가 있는 장면들을 빚어내는 이 천재는 당신의 내면을 질주하듯 파헤칠 것이다. 특수효과라는 뻔하고 쉬운 불꽃놀이와 같은 화약 제조술의 도움 없이도 헛된 환상이 아닌 염세주의와 사실주의적 인간관에 입각한 채,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한다.”

스크린 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다양한 언어로 확장해나가는 동시에 최근 영화 ‘해무’의 제작자로 나선 감독 봉준호. 몇 달 전 파리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당시, 한국에는 세월호 참사가 터졌고, 그로 인해 그는 며칠 동안 잠을 설친 상태로 인터뷰를 하러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평소 조리 있게 말하는 그이지만, 이날만큼은 서로의 대화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영화와 음악의 상관관계, 더 나아가 “나는 영화에 몸담았으나 진짜 위대한 예술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놓았다. 이날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를 지면으로 옮겨본다.

최연소 칸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 심사위원장을 비롯해 국내외적으로 상업적인 성공과 예술적인 성취 모두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런 ‘기록’을 가진 감독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기록은 기록일 뿐, 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괴물’이 기대 이상의 성과와 관객 수를 기록했지만 개인적으론 늘 그 기록에 어느 정도 짓눌린 기분이 들곤 했다. 그 기록으로 내가 더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오히려 ‘괴물’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 부담스러웠다. 영화비평가 올리비에 페르는 일상이 모조리 영화이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는 영화광이라는 점에서 나와 통하는 사람이다. 그는 ‘괴물’이 2006년 칸에서 경쟁 부문에 오르지 못한 걸 많이 아쉬워했고, ‘주목할 만한 시선’으로 초청했다. 당시 영화제 버전으로 편집해 가져간 ‘괴물’을 틀었다. 쏟아지는 기립 박수와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이 사진과 영상으로 남아 있더라.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창피하게. 나는 언제나 자학한다. 영화 만드는 건 내 부족함을 전시하는 행위인 것 같다. 누군가 ‘설국열차’를 여러 번 봤다고 하면 어떤 점이 가장 거슬리고 부족하게 보였는지 묻고 싶다. 파리 시사회에서도 가득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두려움이었다. 트위터에 실시간으로 프랑스 관객들의 반응이 올라왔는데, 한국에서보다 더 긍정적이라는 사실에 좀 놀랐다.

한국과 프랑스 관객들의 반응을 비교할 때 무엇이 가장 달랐나?

30년 전 발표된 그래픽 노블의 원작 덕분에 프랑스에서는 SF에 대한 장르적인 이해가 있었다. 시사회에서도 여러 사람이 이미 원작을 봤다고 인사를 해왔고, 내가 머무는 호텔로 인터뷰를 하러 온 평론가들도 그랬다. 원작을 아는 사람들은 ‘각색’이 아닌 ‘창작’에 가깝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한국 영화 기준으로는 사상 최대의 예산이었지만, 유럽이나 할리우드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기대치도 달랐던 것 같다. 모두 3주라는 짧은 촬영 기간에 놀라워했다. 사용하지 않은 컷이 있는지 물어오는 감독들도 있었는데, 사실 애써 찍어놓고 사용하지 않는 사치를 부릴 여유는 없었다.

영화 전체적으로 음악의 사용이 돋보인다. 기차의 날카로운 마찰음으로 시작한 영화는 초반 커티스와 에드거의 대화 장면, 중반부 커티스와 길리엄이 과거의 상처에 대해 말할 때는 나직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기차의 소음과 음악이 묘하게 공존한다. 식물 칸에 들어서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그 유명한 부분이 하프시코드 버전으로 흘러나온다. 이런 절묘한 선곡은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운 좋게 마르코 벨트래미라는 걸출한 영화음악 감독을 만나 그의 덕을 많이 봤다. 나는 영화에 몸담았으나 진짜 위대한 예술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저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지 음악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내가 원하는 음악적 이미지가 명확하게 존재한다. 커티스의 대화는 과거 꼬리 칸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상기하며 흘러간다. 피아노 솔로가 주는 내밀한 느낌이 좋았다. 식물 칸에서는 완전히 스노비즘적 분위기를 원했다. 하프시코드는 오래전 악기이기도 하지만 ‘챙챙’거리는 느낌이 이질적이고 그로테스크하기도 하다. 이곳은 그들이 속해 있던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바로크 시대 악기가 주는 특별한 느낌이 있다. ‘마더’에서는 이병우 음악감독이 비올라 다 감바 연주를 들려줬다. 당시 처음 보는 악기였는데 직접 들으니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반해 몇몇 부분에서 기타도 첼로도 아닌 비올라 다 감바를 사용했다. 현악기 소리를 참 좋아한다. 벨트래미에게 식물 칸을 말하며 사치스럽게 꾸며진 백화점 안의 휴식 공간, 도서실 같은 느낌을 말했더니 바로 알아듣더라.

촬영 전, 완성된 시나리오를 받아 본 제작자 박찬욱 감독이 당신에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을 선물로 보냈다고 들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설국열차’ 속에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 어두움, 상처를 입고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이 오케스트레이션을 거친 듯 정교하고 다층적으로 쌓여 있다.

사실 쇼스타코비치 음반을 아주 열심히 들은 건 아니다. 당시 프라하에서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매우 길었는데, 외롭고 또 쉽지 않은 기간이었다. 잔뜩 예민해져 있는 나에게 다가오는 이 음악이 지닌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쇼스타코비치의 냉혹함, 광포한 폭력, 극한의 불안, 고뇌 어린 영혼이 ‘설국열차’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당신은 교향곡을 써 내려간 작곡가처럼 모든 것을 면밀하게 계산해냈고, 배우들은 각기 다른 음색의 악기처럼 적재적소에 등장한다. 박찬욱 감독은 하이팅크의 쇼스타코비치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더라. 당시 음반 가게에 재고가 없어서 차선책으로 마리스 얀손스의 것을 골랐다고 했다. EMI 전집을 녹음하며 얀손스는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교향곡에는 허상이 아닌, 진짜 희망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허상이라면 그건 희망이 아닐 거예요. 이 터널의 끝을 지나면 그곳에는 빛이 있습니다. 터널은 물론 매우 길고 깁니다.” 이 이야기가 고스란히 영화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말인가? 참 신기한 일이다. 마지막에 북극곰의 등장을 통해 나도 어쨌든 희망을 말한 셈이지 않나. 터널을 지나오는 여정은 열차의 문을 열고 앞으로 전진하는 스토리로 치환할 수도 있을 테고. 박찬욱 감독이 모든 걸 다 알고 나에게 얀손스의 쇼스타코비치를 보냈을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우연히 고른 전집에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면 우연과 우연이 이어졌으니 그게 더 영화적인 것 같다. 원하는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아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고 최선을 다했는데, 이미 수십 년 전에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으로 풀어낸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니. 그러고 보면 영화를 찍으면서 늘 의도한 것 이상으로 뭔가 될 때가 있다. 신의 선물처럼 예술적 횡재라고 부를 만한 지점들이 영화를 찍으면서 내가 유일하게 위로받는 순간이다. 제작자가 시나리오를 보고 떠올렸고, 내가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들었던 쇼스타코비치가 ‘설국열차’를 통해 전해진다면 그건 음악과 영화만으로 가능한 장르적 전이가 아닐까.

영화를 보며 렘브란트로 대표되는 네덜란드파의 회화가 연상됐다.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하는 횃불, 강렬한 명암의 대비, 난무하는 피, 물로 피를 씻어내는 행위는 모두 서양 혹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익숙한 상징들이다. 그동안 전작들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다뤄온 당신이 완전히 이국적인 재료를 가지고도 여전히 뛰어난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프리미어’지를 비롯한 프랑스 언론들이 높게 샀다.

아주 어릴 때부터 빈 종이에 혼자 만화를 그렸다. 한때 미대를 갈까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지이고, 형태와 색채는 이미지를 결정한다. 사진 한 장을 몇 시간씩 들여다보기도 한다. 정지된 화면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걸 좋아한다. 여러 사진작가 중 ‘결정적 순간’으로 알려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을 좋아한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다양한 메시지가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무엇’이라고 규정짓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내 영화의 장르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슬픈데 웃기고, 희극과 비극이 뒤섞여 있어서 어떤 틀에 집어넣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한국 감독이 다국적 배우를 데리고 체코에서 영어를 쓰며 찍은 영화이니 정체성도 모호하지 않나. 심지어 파리에 홍보를 갔을 땐 도빌 아메리칸 영화제 폐막작으로도 선정되었다. 어떤 소재를 가지고 있느냐, 그게 한국적이냐, 좀 더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느냐는 어찌 보면 그런 카테고리 안에 넣으려는 노력인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았으나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미사에 복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가톨릭 미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자랐으니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은 배경과 이미지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한국적이냐 아니냐를 쉽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풍경들은 과연 진짜 한국적일까? 살인의 추억은 ‘농촌’ 스릴러이고 괴물은 한강을 무대로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불균질한 템포도 인상적이었다.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주다 갑자기 느려지기도 하니까. 예를 들어서 진압군들이 생선의 피를 도끼날에 묻히는 장면은 많은 사람이 그 의미를 궁금해했다. 피가 느릿느릿 흐르는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폭력을 예고하는 것이었나?

그냥 생선으로는 원하는 느낌을 줄 수 없어서, 콘돔에 물감을 가득 채워서 갈라진 배 속에 넣어두고 도끼날에 서서히 스며들 수 있도록 했다. 템포가 달라지는 건 딱히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프랑스판 포스터를 보면 자궁과 질에 진입하는 성기가 떠오른다. 열차 자체가 좁고 길쭉하고, 엔진 칸까지 가기 위해 하나씩 문을 열고 나아간다는 설정은 섹스를 연상케 한다. 그러니 그 템포가 균일할 수는 없지 않나. 불친절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생선 장면에는 아주 심오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관객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가능성을 열어놓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차기작 계획은 어떠한가? ‘설국열차’ 이상으로 큰 규모의 영화를 다시 만들 생각은 없는지.

이젠 정말 작은 규모의 영화를 하고 싶다. 작업 속도를 빨리 해서 적어도 2년에 한 편은 찍고 싶다. ‘설국열차’에 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제 마흔을 훌쩍 넘겼고, 곧 나이 오십을 바라본다. 언제까지, 얼마나 더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를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건 아무것도 인생에 없는 사람이니까.

작은 영화가 아무래도 더 만들기 수월한가? ‘설국열차’가 지닌 비주얼적 즐거움을 생각하면 큰 규모의 영화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있지 않나.

영화 만들기는 언제나 힘든데, 큰 영화는 거기에 더 큰 부담이 주어진다. ‘디어헌터’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은 심혈을 기울여 찍은 ‘천국의 문’의 엄청난 제작비로 유서 깊은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통째로 망하게 만들었다. 그 자신의 커리어도 끝났고, 그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딸린 가족들까지 생각해보면 한 영화감독의 ‘예술적 자아실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 건가. 영화는 참 이상한 장르다. 단지 자신의 상상력을 위해 제작비를 사용하는 건데, 일반인은 살면서 절대로 만져볼 수 없는 수십억 규모의 돈을 두고도 저예산이라고 한다. 20억 원이 어디 작은 돈인가. 많은 노동력과 재능, 큰돈을 필요로 하는 공룡 같은 장르니까 덩치가 커지면 작업 속도도 따라서 느려진다.

8월에 개봉한 영화 ‘해무’에는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제작도 본격적으로 겸할 생각인가?

제작자로서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는 경험이었다. 앞으로는 연출에만 전념할 것이다.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함께한 심성보 감독의 작품이라 제작에 참여했지만, 영화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힘들었다.

자신과 인접한 타 예술 장르를 꼽는다면?

평소 연극을 많이 보러 다닌다. 무대에서만 전달되는 진정성이 있고 좋은 배우를 찾아내기에도 참 좋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기를 통해 한 배우가 지닌 역량을 훨씬 총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세월호 참사로 인해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단원고 아이들과 또래인 고3 아들이 있다. 나도 아내도 참담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을 살아간다는 데 지장이 올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불면에 시달리는 건 물론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합동분향소도 그렇고 내가 상상했던, ‘괴물’ 속 장면들이… 말 그대로 영화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구명조끼를 입히고 ‘가만히 있으라’니. ‘설국열차’ 속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억압과 폭력이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쓰기 전, 사건이 발생했던 1986년 당시의 신문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다. 화성살인사건 관련 기사뿐 아니라 신문의 전체를 다시 읽으면서 내가, 우리가 이런 막막한 시대를 지나왔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2014년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무력하고 참담할 수가 있을까. 이 참사를 누가 되었든 언제라도 꼭 영화적으로 풀어낼 것을 믿는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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