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

한국의 예술, 런던에 생명을 불어넣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8월 1일 12:00 오전

런던에 진출한 우리 예술가들은 그 실력을 당당히 인정받았다. 하지만 ‘케이클래식’과 같은

한국식 조어와 명명에 호의적인지는 앞으로 고민해볼 과제다


▲ 런던 심포니와 함께한 정명훈의 베토벤 교향곡 ‘합창’은 해석의 측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런던의 33개 구 가운데 면적은 가장 작지만 런던 금융의 중심지로 흔히 ‘시티’라고 불린다. “우리는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활용한다”라는 것이 이곳의 오랜 시정 철학이다. 낮에는 붐비고 밤에는 도심이 비는 시티에 생명력을 부여하자는 움직임이 1950년대부터 일었고, 1962년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이하 COLF)이 지역 경제인 모임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축제 초기부터 클래식 음악이 주를 이뤘고 재즈와 월드뮤직, 강연과 가이드 투어가 시티에 위치한 유서 깊은 교회와 도서관·시청사에서 열려왔다. 2000년대 중반부터 특정 국가를 주제로 하는 테마가 정해지면서 2005년 네덜란드, 2006년 일본, 2007년 프랑스가 조명됐고 올해는 한국이 ‘서울 인 더 시티(Seoul In The City)’라는 이름으로 선정됐다.

COLF 조직위원장 폴 거진은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감독을 역임하면서 ‘난타’를 비롯한 여러 한국 예술단체의 작품을 지켜봤고,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초청으로 내한해 심포지엄의 연사로 참가한 지한파 인사다. 페스티벌의 관광적 접근과 경제성에 관한 수치에 밝은 예술경영학자이기도 하다. 거진이 COLF에 참여하면서 행사의 성격도 공연예술의 비중이 커졌다. 연극과 애크러배틱을 수용할 관내 공연장이 부족한 점을 고려해 세인트 폴 대성당 앞 광장에 19세기 영국 신사들이 쓰던 볼러 모자를 닮은 팝업 무대를 설치해 비음악 공연을 올렸다.

COLF에는 ‘케이클래식(K-Classic)’ ‘케이시어터(K-Theatre)’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의 이름으로 한국 아티스트와 예술단체가 참가했다. 양정웅 연출의 극단 여행자가 연극 ‘햄릿’을, 이경옥 무용단이 2012년 작 ‘안데르센의 시선들’을 무대에 올렸고, 국악 연주단체 앙상블 시나위가 세인트 루크스 교회에서 런던 시민과 만났다. 비보이팀 갬블러 크루의 야외 공연 역시 주요 명승지에서 열렸다. 첼리스트 최하영,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빈 등 국내에도 아직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유망주들이 런던 시장을 경험하며 풍부한 자산을 쌓았다. 하지만 페스티벌을 위해 열린 공연 가운데 런던 일간지에 리뷰가 실린 공연은 극히 일부라는 점과 현지 언론과 공연계가 ‘케이클래식’ ‘케이시어터’와 같은 한국식 조어와 명명에 호의적인지는 앞으로 고민해볼 과제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펼쳐진 정명훈의 ‘합창’

올해 COLF의 클래식 음악 공연 중 하이라이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이뤄진 두 차례의 런던 심포니(이하 LSO) 공연이었다. 7월 3일 대니얼 하딩이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와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7월 15일 정명훈이 한국의 성악진들과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선보였다. 브루크너 교향곡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딩에게 가장 친숙한 레퍼토리다. 런던 심포니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뉴 재팬 필하모닉을 오가며 브루크너 교향곡의 전반을 아우르고 있으며, 2012년 3월에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브루크너 5번으로 내한한 바 있다.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면서 말년을 보낸 브루크너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공연하는 선택은 명민했다. 창작력의 풍부함에서 가히 거인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앞에 두고 하딩은 10초 넘게 기록되는 홀의 잔향에 오케스트라의 각 섹션이 묻히지 않도록 아득한 돔의 천장까지 하나씩 쌓아 올리듯 느릿느릿한 템포로 밀고 나가는 끈기를 발휘했다. 음향의 아쉬움을 감안해 ‘파이낸셜 타임즈’지는 ★★★을 줬지만 LSO의 연주력에는 찬사를 보냈다.

정명훈은 LSO와 2006년 아시아 투어 이후 8년 만에 만났다. 그가 41년 전 피아니스트로 앙드레 프레빈과 만났던 것도 LSO와 함께한 연주였다. 공연 전 기자회견에서 정명훈은 LSO를 두고 “연습을 별로 안 해도 척척 따라오며 스포츠카처럼 리액션이 굉장히 빠르다”라고 했다. 그 직유의 핵심은 오래전부터 정명훈의 LSO 공연을 빠짐없이 지키던 카르미네 라우리가 이날 공연의 악장으로 앉았다는 데 있다. 성악진은 캐슬린 킴(소프라노)·양송미(메조소프라노)·강요셉(테너)·박종민(베이스)으로 짜여졌다. 모두 서울시향 공연의 유경험자들로, 정명훈의 성악관을 어느 상황에서도 충실하게 구현할 파수꾼들이었다. 다만 첼로 파트에 LSO 정기 시즌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연주자들이 대거 포진한 점이 심상치 않았다.

사제를 연상케 하는 단정한 연미복으로 성당에서의 공연에 예를 갖춘 정명훈이 입장했다. 정명훈은 사운드의 잔향이 성당 안에 얼마나 머물지, 소리가 어떻게 곳곳으로 퍼져나갈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지 않았다. 템포는 예술의전당에서 익히 듣던 그 속도였고, 포효하는 팀파니의 볼륨은 대포알이 터지는 듯 했다. 각 파트와 총주, 성악이 섞였고 오케스트라에 새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장애를 겪은 부분은 첼로 파트였다. 실제로 무슨 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 체감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가디언’지는 성당의 13초의 잔향 시간이 모든 디테일을 잡아먹었다고 평했지만 정명훈의 해석에는 호의적이었다. 특히 “캐슬린 킴의 소리는 안개를 꿰뚫는 레이저처럼 또렷했다”고 극찬했다.

런던에서 빛난 김선욱의 새로운 레퍼토리

6월 25일 김선욱 리사이틀이 열린 스테이셔너스홀은 화재 이후 1673년 신문사 조합의 건물로 지어진 홀이다. 김선욱은 런던에 정주한 이래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열리는 공연의 완성도를 성장의 척도로 인식해왔다. 그래서 2015년 3월 3일 사우스뱅크 센터 주최로 열리는 인터내셔널 피아니스트 시리즈에 초청된 김선욱은 마우리치오 폴리니·우치다 미쓰코와 같은 라인업에 있어서라기보다 연주회장이 런던이라는 데 책임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날 역시 시민 친화형 페스티벌의 성격과는 달리 음악성을 믿고 찾은 관객들을 겨냥한 레퍼토리를 짰다.

스크랴빈 소나타 3번을 시작으로 9월 국내 투어에서 연주할 프랑크 프렐류드·코랄과 푸가, 슈만 소나타 1번이 연주됐다. 공교롭게 모두 주조가 F#장조였다. 피아노 바로 뒤에 위치한 조명 기구가 내뿜는 열기만큼 연주도 뜨거웠다. 부분 부분 멜로디의 흐름을 좇다가 방향을 잃기 쉬운 스크랴빈에서 김선욱은 원거리에서 작품을 조망하며 교향곡적인 울림을 정교하면서 점증적으로 올려놓는 가운데 서서히 기운을 폭발시켰다. 독일 바로크·고전·낭만시대 이외에 자신의 새로운 장기를 런던 관객과 먼저 공유한 셈이다. 프랑크와 슈만의 해석에 대해 ‘가디언’지는 ★★★과 함께 “아름답게 제어했다(beautifully controlled)”라고 평했다.

 


▲ 새로운 레퍼토리로 관객의 주목을 단번에 사로잡은 김선욱

유럽 시장을 향한 첫걸음 뗀 손열음

여러 콩쿠르 입상을 통해 일본과 미국·러시아를 종횡하는 손열음에게 런던은 커리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던 시장이다. 인연이 잠시 닿지 않았을 뿐, 지금의 실력으로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나는 프로그램으로 7월 14일 비숍스게이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슈만 ‘크라이슬레리아나’, 알캉 12개 단조 에튀드 ‘이솝의 향연’,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의 세 개의 악장’, 고도프스키의 요한 슈트라우스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술, 여인 그리고 노래’가 이날 연주곡이었다. 위그모어홀이나 킹스 플레이스의 홈페이지를 아무리 뒤적여도 이런 프로그래밍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굳이 유사한 사례를 찾는다면 아르헨티나 출신 잉그리드 플리터 정도다.

손열음은 자칫 나열에 그칠 법한 레퍼토리들을 태연자약하게 한 올씩 꿰어나갔고 관객의 집중도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해갔다. 남과 다른 연주를 목표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존 연주에 도전하고 응전하는 방식이 알캉과 고도프스키에서 뚜렷했다. 트릴은 더욱 여유로워졌으며 감각적인 양손의 대비로 관객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과감한 도전 정신이야말로 공연 관계자들이 손열음 연주의 신뢰를 거론할 때 공통적으로 말하는 최상의 미덕이다. “우승이 아니면 손해”라고 말하며 콩쿠르에 나가 쌓아왔던 노련함은 앙코르의 재즈로 이어졌다. 장소에 따라 호환되는 손열음의 또 다른 런던 리사이틀을 기대해본다.

 


▲ 새로운 레퍼토리로 관객의 주목을 단번에 사로잡은 손열음

기대 이상 유망주들의 활약

7월 16일 비숍스게이트에 금호아시아나 솔로이스츠가 등장했다. 이지혜(바이올린)·이한나(비올라)·이정란(첼로)·김한(클라리넷)·김다솔(피아노)은 이틀 전 밤늦게 런던에 도착해 공연 하루 전에야 본격적인 연습을 갖고 무대에 올랐다. 자칫 절대적인 연습량이 부족할까 염려됐지만 기우였다. 마치 클럽팀에서 경기를 마친 뒤 짧은 시간 손발을 맞추고 A매치에서 최상의 기량을 펼치는 축구 선수처럼 솔리스트로서 기량이 출중한 단원들은 앙상블을 이루는 기본 원리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이들의 조합이 그려낸 도흐나니 현악 3중주를 위한 세레나데, 브루흐 클라리넷·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8개의 소품, 브람스 피아노 4중주 1번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금호아트홀에서만 선보이는 내수용 상품이 아니라,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이 추진하는 해외 주요 시장 개척에 첨병으로 써도 충분한 퀄리티를 갖고 있었다.

과거 금호 현악 4중주단 시절 멤버 교체로 인해 연주의 퀄리티가 하락하던 폐해는 현재 솔로이스츠 멤버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젊은 연주자들이 더 어린 연주자들을 챙기고, 어떻게 앙상블을 일궈나갈지 노하우를 갖춘 이들은 연주의 완성도를 통해 앙상블 발전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메시앙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을지를 두고 벌이는 유쾌한 뒤풀이가 롱런의 단서다.

올 9월 런던 길드홀 음악원 입학이 결정된 김한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음악학을 전공하고자 했지만 기악 실기의 내실을 위해 길드홀 음악원을 선택한 김한은 곧바로 2학년 과정으로 월반해 다양한 실내악 수업을 들을 예정이다. 연주자들이 런던에 체류하는 기간 특유의 유쾌함으로 시내 가이드를 전담하면서 누나 단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1996년 단 한 차례 내한했던 길드홀 현악 앙상블에 김한이 참가할 수 있을지, 그의 성장 과정이 한국의 공연에서 어떻게 반영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 City of London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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