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개인적인 걸까(Why So Personal?)’ 지난해 슈만과 윤이상의 작품을 커플링해서 발매한 이상 엔더스의 데뷔 음반 부클릿 첫 장에 적힌 문장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서 걸어가는 이 순례자의 걸음은 아직도 계속되는 중이다. 그는 ‘바흐’를 만났고, 다시 한 번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Oh, Are you the editor?”
하얀색 첼로 케이스를 멘 이상 엔더스가 촬영장에 들어왔다. 그는 다짜고짜 내 손을 덥석 잡는다. 브라운 계열의 눈동자, 개구쟁이 같은 웃음… 어느새 마음속에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침투한다.
스무 살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최연소 첼로 수석으로 입단해 주목을 받았던 이상 엔더스는 지난해 초, 그 자리에서 물러나며 독주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 후 1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을까.
지난 3월, 이상 엔더스는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시리즈의 일환으로 블로흐의 ‘셸로모’를, 4월에는 루토스와프스키 첼로 협주곡을 협연했다. 당시만 해도 그가 현대음악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구나, 섣부른 판단을 했다. 그러나 8월 말에 발매된 두 번째 음반 레퍼토리가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임을 알았을 때, 그가 추구하는 음악관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증이 일렁였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장난스럽던 이상 엔더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입은 무거워졌고, 질문 하나하나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입술로 엄지손톱을 물어뜯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진 펜을 뺏어서 자신의 설명을 적어 보여주기도 했다.
이상 엔더스는 오케스트라에 있는 동안 화려한 독주자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배웠다. 그 또한 독주자의 길을 걸으려면 ‘나 자신’ ‘나의 성격’ ‘나의 음악적 목소리’를 찾아야 했고, ‘바흐’를 통해 비로소 답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 엔더스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한국인 어머니와 오르가니스트이자 피아니스트인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이 바흐를 해석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말했지만 한국의 역사가 담긴 경주, 여수와 부산에서 먹는 회, 한국의 전통차와 팥빙수가 좋다는 걸 보면 영락없이 ‘한국인’의 유전자도 가진 사람이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은 어느새 이 ‘음악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와 마주 앉아 바흐의 위대함을 이야기했던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상 엔더스의 바흐를 조심스럽게 상상해봤다. 그를 닮아 자유로운, 그러나 그를 닮아 심오한 바흐일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이상 엔더스는 9월 24·25일에는 금호아트홀에서, 9월 29일과 10월 1·2일에는 광주·오산·대구를 투어하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의 바흐가 얼마나 자유로울지, 얼마나 진중할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다음은 이상 엔더스와 나눈 일문일답.
두 번째 음반의 레퍼토리로 ‘바흐’를 선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내 시간 속에서 바흐는 죽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바흐는 항상 내 옆에 존재해왔다. 오르간 의자나 피아노 밑에 앉아서 부모님이 연주하는 바흐를 자연스럽게 흡수하며 자랐다. 나에게 바흐만큼 익숙한 음악은 없지만, 바흐만큼 이해하기 힘든 음악도 없다. 독주자의 길을 걷기로 새로운 결심을 한 뒤, ‘내 자신’을 찾는 시간이 필요했다. 바흐를 연주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바흐를 연습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고, 나 자신과 나의 음악은 좋은 발전을 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과 바흐를 나누고 싶다.
바흐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준 연주자가 있는가.
대부분의 첼리스트들이 파블로 카살스에게 영향을 받는다. 오래전에 그가 바흐의 쿠랑트를 가르치는 동영상을 봤다. 그는 30분 동안 오직 한 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과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음 하나의 정확한 소리·의미·표현을 찾기 위해 며칠을 보낸다.
바흐를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바흐를 해석할 때 말하고 싶은 것과 노래하고 싶은 것의 알맞은 조화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일 먼저 음들 사이에서 이야기의 구조를 찾고, 자음과 모음으로 목소리를 낸다. 그 후 자연스러운 호흡과 편안한 목소리를 통해 음악 내면의 표현을 찾는 것이다. 음악을 이해할 때 인간의 목소리보다 쉽게 이해되는 것은 없다.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이 바흐를 해석할 때 도움이 되는가.
바흐뿐만 아니라 모든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다. 작은 음 하나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독일의 문법 ‘der’ ‘die’ ‘das’같이 언어의 세심한 차이를 알아야 한다. 한국어와 영어에는 이렇게 작은 차이를 표현하는 말이 없다. 바흐의 생가, 바흐가 영감을 받은 장소들을 직접 체험한 것도 바흐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됐다. 특히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그 어떠한 디지털 기계로도 담을 수 없다. 바흐가 살았던 주변에서 바흐와 그의 가족들의 향기를 가까이 맡으면 바흐에게 직접 다가가는 느낌이다.
이번 음반을 녹음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CD 2장 중 1장의 녹음을 끝낸 뒤, 처음부터 다시 녹음하기로 결정했다. 녹음을 끝내고 1년의 시간 동안 바흐를 표현하는 방법이 많이 바뀌었다. 바흐를 만들기 위해 경험한 시간들이 나의 음악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30년이 흐른 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마주한다면 지금과 다른 변화를 예상하는가.
모든 것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진다. 30년 뒤 나의 모습을 벌써부터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고작 1년의 시간이 바흐에 대한 나의 관점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바흐는 내 평생의 작업이 될 것이다. 바흐와 함께 성장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바흐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이번 음반에서 거트현이나 바로크 활을 사용하진 않았는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이상은 거트현과 바로크 활로 당대연주를 한다. 거트현이나 바로크 활을 사용하면 연주할 때 감각의 차이가 발생한다. 특히 바로크 활의 움직임은 모던 활보다 훨씬 섬세하고 부드럽다. 그 분위기와 움직임을 기억한 뒤 모던 첼로에 접목시키면 자연스럽게 비브라토의 사용이 컨트롤되고 활의 생동감이 살아난다.
9월 금호아트홀에서 선보이는 독주회에서 첫째 날은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5·4번을, 둘째 날은 3·2·6번을 선보인다. 순서를 이렇게 배치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공연이 이틀로 나뉘기 때문에 6개 모음곡의 길고 짧음, 어두움과 밝음, 선율과 기교를 골고루 느낄 수 있도록 순서를 배치했다. 음반에서도 음색에 따라 곡의 순서를 다르게 했다. 음반의 CD1에는 2도씩 상행 진행하는 어두운 음색의 5(C단조)·2(D단조)·4번(Eb장조)을 담았고, CD2에는 5도 관계에 따라 밝은 음색을 내는 3(C장조)·1(G장조)·6번(D장조)을 담았다.
올해 초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시리즈에서 블로흐 ‘셸로모’와 루토스와프스키 첼로 협주곡을 협연했다. 고전과 현대 시대의 레퍼토리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음악을 계속해서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따라서 두 시대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우리는 미래를 버려두고 고전만을 보존하는 박물관이 아니다. 모든 정통은 혁신에 의존하고, 모든 예술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결정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적인 건축물·춤·문학·미술·패션에 열광하지만, 현대음악은 그만큼 흔하지 않다. 100년 전에는 고작 10년 이상의 것들을 ‘오래된’ 음악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지금 어느 시점에 서 있는가? 바로 현대 시대다. 우리의 지금을 연주해야 된다.
독일에서 ‘엘레먼츠(elements)’라는 전자음악 프로젝트는 그 생각의 발전으로 진행한 것인가.
7명의 작곡가가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한국의 주간 달력을 소재로 첼로를 위한 전자음악을 작곡한다. 일·월·화·수에 담긴 태양·달·불·물… 과 같은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모든 곡이 연주되는 동안에 두 명의 발레 무용수가 안무를 하고, 영상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각자 다른 분야의 예술이 다 함께 조화를 이루는 작업이 좋다.
서울에서 지내는 느낌은 어떠한가.
잠들지 않는 도시! 한국에 올 때마다 서울의 빠른 발전 속도에 놀란다. 서울은 지난해 많은 시간을 보낸 도시들 중 한 곳이다. 서울에는 맛있는 음식, 젊은 사람들,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즐겁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나는 계속해서 이 자유를 지키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브람스의 ‘F.A.E. 소나타’(Frei Aber Einsam·Free but Lonely)처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자유롭지만 외로운… 이런 생활이 나에게 얼마나 계속될지 앞으로 한번 지켜보려고 한다.
이상 엔더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본다. 남동생과 함께 피아노 밑에 앉아 바흐를 들으면서 성장했을 그의 어린 시절, 음악이 주는 풍경 속에 바흐를 오롯이 사색하는 갈색 눈동자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철학적인 그의 음악적 세계가 마음 가득 내려앉았다. 그가 지키고 싶다는 ‘자유’. 어딘가에 묶여 있기에는 그의 음악적 이상(理想)이 넘치도록 광활하다. 그가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 지금처럼 자유롭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