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차이콥스키 기념관과 묘지

대작곡가의 마지막 자취를 찾아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쓸쓸한 인생의 말년을 보내야만 했던 작곡가 차이콥스키. 그의 마지막 자취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차이콥스키 기념관과 묘지이다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나의 괴로움을 알 수 있다

홀로, 모든 기쁨에서 떨어져

먼 창공을 바라보노라

얼마나 내가 고민했던가

그리고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아! 나를 사랑하고 아는 이들

먼 곳에 있으니…

– 차이콥스키의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러시아에 60년 만의 추위가 엄습해 영하 30도까지 수은주가 내려갔던 2002년 12월 26일 오후 모스크바 근교 클린 어귀에 있는 차이콥스키 기념관. 교통 체증이 심한 모스크바를 벗어나서 눈 내린 레닌그라드 대로를 타고 2시간을 더 왔다. 단층집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스크바와는 달리 ‘다차’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별장들이 그림처럼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태양은 사라진 지 오래. 회색빛에 휩싸인 하늘과 땅, 뾰족지붕을 한 집들,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 이러한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하얀 수피를 드러낸 발가벗은 자작나무 군락이 끝나면 진회색 전나무가 끝없이 나타나는 숲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모른다. 차이콥스키가 그토록 사랑했던 러시아의 대자연에 묻힌, 생의 마지막 9년을 보냈던 클린. 그중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2층 목조 가옥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강가에서, 핀란드 만의 황혼 녘에 귓가를 맴돌던 차이콥스키의 로망스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의 선율이 또다시 스쳐갔다. 러시아 음악의 궁극은 인간의 애타는 그리움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시키는 것일까?


▲ 차이콥스키 기념관의 겨울 풍경

“차이콥스키는 쇠잔해진 몸과 마음을 자연 속에서 회복시켰는데, 고독과 정적만이 흘렀던 이 집이야말로 그의 창작의 원천이었습니다.”

마침 휴관하는 날이라 몸소 안내를 맡아준 박물관장 또한 기품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 이곳에서 최후의 불꽃을 ‘비창’이라는 이름으로 쏘아 올렸다. 회한으로 점철된 그의 삶의 모든 것을 그는 ‘아다지오 라멘토소’에 투영해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하는 영혼의 넋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자작나무 숲에서 서슬 퍼런 노랫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중간에 고뇌하는 차이콥스키의 사진이 육중하게 걸려 있고 드디어 작업실과 침실이 나타났다. 그의 유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방 안. 시간을 거슬러 19세기 후반으로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곡실의 책상 앞에는 교향곡 6번 ‘비창’의 초고가 놓여 있고 격자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 책상에 앉아 마지막 ‘백조의 노래’를 작곡했다 생각하니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1893년 10월 7일,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6번의 지휘를 위해 이 집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1월 6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겨울은 특히 인간에게 극한의 자연환경을 경험하게 한다. 오전 10시가 지나야 날이 밝아지고 오후 4시면 이내 어두워진다. 외부에 노출되는 건 얼굴뿐으로 내쉬는 숨은 이내 얼어붙고 눈썹은 하얗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의 연말은 의외로 차분했다. 율리우스력을 쓰는 러시아의 크리스마스 1월 7일을 앞두고 ‘욜카’라 불리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운반하는 짐꾼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모피 외투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냉혹한 자연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이미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걷는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천년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 교향곡 6번 ‘비창’의 초고


▲ 차이콥스키 기념관 거실벽 풍경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묘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 넵스키 대로 남쪽 끝 알렉산더 넵스키 수도원 내 예술가 묘역의 겨울은 추위로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해 달라붙은 눈꽃이 만개한 앙상한 나무들뿐, 간혹 까마귀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묘비 앞의 동상이 근엄한 얼굴로 낯선 이방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광대한 대지와 역사의 일치를 그렸다면 도스토옙스키는 그 고난으로 점철되었던 삶의 무게만큼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인공적인 근대도시의 병적인 아픔을 묘사한 작가였다. 누구보다도 슬라브 지상주의자였고 정교회 신앙을 믿으며 러시아를 사랑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사랑했던 도스토옙스키. 그래서 그의 묘를 거치지 않고서는 러시아 작곡가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끔 만들어놓은 것일까?

도스토옙스키의 묘를 지나자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는 글린카와 러시아 5인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설립자 안톤 루빈슈타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의 묘지가 여전히 많은 꽃다발을 앞에 둔 채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여름에 다녀갔을 때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간데없고 주위는 온통 흰색뿐인데 휘황한 바람만이 가끔 불어올 뿐 마음은 무거웠다. 또다시 그리움이 스쳤다. ‘비창’의 선율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십자가를 든 수호천사가 흉상을 지키고 있는 차이콥스키의 묘 앞에는 유난히 많은 꽃송이와 견학 온 학생들이 둘러서 있었다. 교향곡 ‘비창’을 손수 초연하고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영면한 그의 음악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모든 이의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 아! 예술이라는 책임 아래 그토록 고달픈 삶을 살다 간 차이콥스키의 무덤 앞에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흙이 되었을 그의 시신이 세월을 거스르고 지금 앞에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비록 생전의 삶은 힘들었지만 당신이 남긴 음악은 지금, 당신은 몰랐던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 중의 하나입니다.” 되뇌는 머리 위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적막함을 더해주었다.


▲ 클린으로 이사온 후, 이곳은 그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자연과 함께했던 나날들의 행복과 불운

1854년 차이콥스키가 불과 열한 살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상처는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9년 후에 자신도 같은 곳에서 같은 병으로 하늘나라로 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여기에 밀류코바와의 결혼은 연약한 남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멍울을 더했다. 여성에 대해 정신적인 공동생활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며, 음악은 그토록 정열적이고 관능적이었지만 이성적인 교제는 영혼의 접촉만으로 그에게 충분했던 것이다. 정신병원에서 불행한 삶을 마쳤던 밀류코바에게도 차이콥스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언제든 돈을 부쳐주곤 했다.

여기에 당시 러시아 민중의 참상은 정의감에 불타는 작곡가에게 또 다른 근심거리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무너진 서유럽의 농노제는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에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인구 약 6,500만 가운데 노예와도 같은 농노가 4,000만정도 였다고 하니 그들의 생활은 극도로 처참하고 피폐했다. 이미 예카테리나 2세 때 푸가초프의 반란으로 한 차례 농노의 저항 움직임이 있었지만 차이콥스키가 살았던 1858년 한 해에만 약 378건의 농민 폭동이 일어날 만큼 러시아는 휘청대고 있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법을 폐지했지만 이름뿐인 해방이었으며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더욱이 1891년부터 일어난 대기근은 기름에 불을 끼얹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러시아와 러시아 민중을 사랑하며 ‘인민에게로’의 성향을 띠고 있었던 차이콥스키는 직접 몸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자신의 음악 안에 당시의 눈 뜨고 볼 수 없는 인민의 고통을 녹여놓았다. 더불어 1880년대 말부터는 스스로도 인생의 황혼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를 위해 삶의 마지막 안식처인 클린의 집을 1885년에 사들였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클린에서 두 번을 더 이사하며 자연에 묻혀 작곡에 몰두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명장 이고르 탈란킨 감독이 1969년에 제작한 영화 ‘차이콥스키’에서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 트로이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클린의 숲이다. 피아노 음악 ‘사계’ 가운데 ‘12월’이 오케스트라 편곡 버전으로 들려올 때 클린의 대자연과 함께 숨 막히는 격정이 온몸을 휘감곤 했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레닌그라드 대로를 타고 85킬로미터를 가면 기막힌 자작나무 숲이 우거진 오래된 전원도시 클린이 나타난다. 세스트라강이 휘돌아 가는 강둑을 끼고 고즈넉한 마을이 줄지어 있는 형국이다.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며 자연 속에서 고독하고 은밀한 생활을 하기를 원했던 차이콥스키에게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1885년 초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즘 저는 모스크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마치 고향에 와 있는 것 같은 곳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마침내 몇 달 도 채 지나지 않아 꿈은 이루어졌다. 클린 시내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마이다노보 마을에 집을 빌렸고, 그가 세계적 명성을 얻고 승승장구하던 시기와 구별되는 만년의 삶이 클린에서 펼쳐지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집은 클린 역과 니콜라옙스키 역에서 멀지 않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오기에 상당히 편리했다. 그래서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언제든 차이콥스키를 찾아올 수 있었다.

“러시아의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 마을과 경치가 얼마나 제게 정감을 주는지 표현할 수조차 없을 지경입니다. 이러한 고요함은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입니다!”라며 마이다노보 마을에 대한 첫인상을 밝힐 정도였으니 그 애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저는 러시아의 자연을 가장 사랑합니다. 러시아의 겨울은 세상 어느 나라도 비교 불가한 매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위스나 이탈리아에 대한 저의 애정도 저의 조국에 비하면 한참 아래에 있으니까요.”

1888년 3월, 3개월 동안의 첫 유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쪽에서 클린에 도착하는 기찻길 옆의 숲에 위치한 프롤로프스코예 마을로 이사를 갔다. 스스로 프롤로프스코예의 집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 차이콥스키는 진정 행복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 집과 마이다노보 마을의 집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890년 여름의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1892년 5월 차이콥스키는 클린 교외에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 집은 2년 남짓 그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차이콥스키 기념관’으로 명명된 이 집이야말로 대작곡가의 숨결이 온전히 배어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쓸쓸한 만년의 마지막 교향곡 ‘비창’에 얽힌 일화

클린은 차이콥스키에게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창작의 샘을 자극했다. 발레음악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교향곡 5·6번, ‘만프레드 교향곡’, 피아노곡 ‘로망스’,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 ‘차로데이카’가 모두 클린 시절에 발표된 만년의 작품들이다. 교향곡 5번은 이러한 복잡한 환경이 만들어낸 소산이었다.

차이콥스키는 1988년 대작 교향곡 작곡에 착수, 11월 5일 자신의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초연했다. 새로운 교향곡도 이전의 작품들과 유사하게 그의 개성이 담긴 자기 회의와 내면의 고통을 반영하고 있었다. 음색, 감정의 고조, 악기 사용의 참신함, 구조와 배열의 논리성 등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든지 이 5번 교향곡은 감성과 지성에 호소하는 그의 관현악 작품 중에서도 뛰어난 예술성을 품고 있다.

1890년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일방적인 단교를 당한 뒤 치유 불가능한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다.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플라토닉한 사랑을 이어오던 차이콥스키는 마음속에 슬픔만을 남긴 채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과 염원을 마지막 교향곡에 쏟아붓기 시작한다.

만년의 차이콥스키는 매일 아침 8시경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성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저는 자주 미사에 갑니다. 밤 기도도 합니다. 주말 밤 거룩한 향기에 쌓인 작고 낡은 교회에 찾아가 그 어스름함 속에서 자신을 살펴보며 영원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봅니다.”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실패를 신앙에 의지하곤 했다. 그가 남긴 ‘저녁기도’와 ‘미사곡’은 이러한 작곡가의 깊은 종교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사회 적응의 실패와 끝내 파경으로 치달았던 결혼 생활이 이중으로 겹쳐져 늘 암울한 구름에 덮여 있던 그에게 호흡은 오히려 귀찮은 존재였다. 더구나 300년간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의 말기인 당시, 러시아인들은 가난과 기아로 허덕이고 있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 아래에서 끝을 모르는 밑바닥 생활에 몸부림치며 고통받는 국민의 비참한 모습을 섬세한 신경을 가진 차이콥스키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창’에는 러시아 민중의 처절한 상황이 반추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 작곡가 스스로 최고 역작으로 여긴 마지막 교향곡은 폰 메크 부인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으며 러시아 민초들의 애환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저의 마지막 교향곡이… 레퀴엠에 가까운 분위기로 꽉 차 있다는 상황이 저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1893년 9월에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이미 작곡가는 교향곡이 진혼곡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사진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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