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르 무뇨스 파리 전시회 ‘프로토그라피’

기억을 붙잡는 방식에 관한 물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이자 사진가인 오스카르 무뇨스의 다채로운 작품들이 전시된 파리의 주 드 폼. 너무나 절실하고 생생한 그의 작품들이 던지는 이야기는 말을 잃게 하고 슬픔을 느끼게 했다


▲ ‘Cortinas de Bano’(1985~1986)

슬펐다. 말을 잃었고 오랫동안 머물렀다. 어떤 전시회가, 그러니까 그것이 회화든 사진이든 조각이든 말을 잃게 하고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경우는 정말로 드물다. 파리에는 크고 작은 갤러리에서 늘 다양한 전시회가 열린다. 조금 비판적인 관점일 수 있겠지만 관광객들의 방문 코스로 알려져 있는 미술관들이나 박물관들은 그야말로 ‘과거를 박제’ 상태로 전시하고 있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콩코르드 광장 바로 옆에 위치한 주 드 폼에서 지난 6월 3일부터 9월 21일까지 열린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오스카르 무뇨스(1951~)의 전시는 그 어떤 전시보다 큰 감동을 주었다. 이번 전시는 화가이자 사진가로서 그의 40년간 작업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프로토그라피(Protographies)’라는 부제를 지닌 그의 전시는 디지털 문명을 초 단위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개개인들의 정체성, 그리고 탄생과 죽음의 인생 순환을 너무나 간결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으로 다가왔다.

전시장이라는 공간은 개인적으로 파리 산책의 연장선 같은 것이었고, 그저 아름다움과 잠시 조우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불성실한 관람객인지도 모른다. 연주회장에서 음악을 들을 때는 그저 눈을 감는 것으로 연주회의 음악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고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늘 사람들로 붐비는 전시장에서는 연주회장에서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전시회장을 상상하곤 한다. 진정한 관람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대미술 전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관람객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있고, 유명 작가의 전시회가 아니라면 전시장에는 극소수의 사람만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은 분명히 관람객에게 말을 걸 수 있다. 상징과 은유를 포함한 몇 요소들이 관람객들에게 호소하는 데 성공한다면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대화가 시작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이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뇨스의 각 작품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각각의 작품이 나에게 걸어오는 대화가 너무나 절실하고 생생한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 Aliento’(1995)

기억의 불확실성을 말하는 작업들

무뇨스는 사회의식이 있는 화가로 출발했다. 1970년대에 주로 커다란 크기의 종이에 목탄으로 우울한 일상을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담았다. 전시장에는 당시의 목탄화도 한 점 걸렸는데, 그의 진정한 재능은 일상의 사실성보다 일상의 공기 속에 흐르는 우울함을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섬세함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재능과 감수성이 조화를 이루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는 각설탕 위에 커피를 조금씩 뿌린 것을 모아서 초상화를 구현한 작품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커피가 설탕에 스며든 흔적에 불과하지만 멀리서 보면 인물이 된다.

역사적 사진들을 수집하기도 하는 그의 가장 큰 주제는 ‘얼굴’, 그러니까 초상화다. 아니, 어쩌면 ‘얼굴’처럼 보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초상화를 다루는 방식에 우리는 먼저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미 기원전, 혹은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초상화를 그리고 제작했다. 오늘날에도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집트 시대의 초상화를 비롯해 위대한 화가들이 남긴 초상화, 카메라 발명 이후 제작된 수많은 초상 사진들까지… 목적은 유사하다. 개인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오래, 가능하다면 영원으로 연장하는 것이다. 무뇨스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개인에 대한 기억의 불확실성을 말한다. 그래서 프로토그라피이다.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 가운데 하나인 ‘나르시스’(2001)의 주제 역시 얼굴이다. 그의 첫 번째 영상 작업인 이 작품은 세면대 수면 위에 놓여 있는 목탄 가루가 사람의 얼굴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빛에 의해서 세면대 바닥에 그 얼굴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세면대의 물이 줄어들면서 수면 위의 얼굴 형상과 바닥의 얼굴 형상이 서로 가까워진다. 수면이 바닥에 가까워지면서 얼굴 형상이 흐트러지다가 수면이 바닥에 닿는 순간에 두 개의 얼굴 형상은 완전히 일그러지고, 목탄 가루로 남아 세면대에서 사라진다. 이 영상은 3분 정도가 소요되고 다시 반복된다.

이 작품이 갖는 힘은 정말로 대단했다. 처음 보았을 때 수면 위의 얼굴 형상이 세면대 바닥의 얼굴 형상과 만나는 순간은 충격과 깨달음 같은 것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운명의 선’(2006)도 어떤 면에서는 ‘나르시스’와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손가락을 모두 모은 손바닥 위에 약간의 물이 있고 그 위에 누군가의 얼굴이 비쳐 보인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손바닥 위의 물이 사라지면서 얼굴 형상도 사라진다. 그저 재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라지는 얼굴 형상을 그저 ‘이미지의 죽음’으로 간주하는데 그칠 수도 있다. 무뇨스의 영상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시간과 기억이다. 그는 어떤 순간을 이미지 위에 고착시키는 작가가 아니다.


▲ ‘Ambulatorio’(1994)

무뇨스는 1980년대에 새로운 시도들을 시작했다. 사진 작업을 하면서 회화와 사진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러나 비디오 영상 작업은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그가 이미지를 통해 추구했던, 찾고자 했던 ‘생성과 소멸’이란 지평이 열린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무뇨스는 스스로를 사진가로 간주하지도, 그렇다고 빌 비올라처럼 비디오 아티스트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프로토그라피’의 접두어인 프로토(proto)는 ‘처음의’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프로토스(protos)에서 왔다. 얼굴의 형상이 사라지거나 만들어지기 전, 그러니까 ‘진행 중인’ ‘시간이 흐르고 있는’ 상황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또 다른 영상 작업은 이러한 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위 위에 물로 얼굴 형상을 그린다. 그러나 물이 바위 위에 닿는 순간 물은 증발되기 시작하므로 얼굴이 완성된 형상을 보는 순간은 극히 찰나이고, 얼굴 형상은 어느새 증발해버린다.

흥미롭게도 무뇨스의 작품들은 새로운 형식의 야만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터넷과 디지털 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꺼져가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의 촛불을 되살린다. 세계 각지에서 매일같이 터지는 비극을 크고 작은 모니터에서 불과 1분 이내로 접하고는 잊어버린다. 그리고 다른 사건으로, 다른 기사로 미끄러진다. 우리의 단기 기억은 꼭 우리의 잘못만은 아니다. 하나의 주기가 불과 몇 분에 불과한 무뇨스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소멸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것을 멈추고 싶고 붙잡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갈망은 어김없이 자신에게로, 자신의 삶으로 향한다. 잊히는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글 김동준(음악평론가) 사진 Jeu de Pa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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