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프롬스 데뷔한 서울시향

‘우리다움’으로 도도한 신사의 나라를 사로잡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큰 무대일수록 해답은 하나다. 있는 그대로, 진솔함을 보여주는 것. 서울시향의 프롬스 데뷔는 여름내 이어진 유럽 투어의 정점에 있었다. 진은숙이 그려놓은 화성을 따라 생황 연주자 우웨이가 춤을 추자 정명훈이 자랑하고 싶다던 그림의 실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BBC 프롬스가 9월 13일 폐막 공연을 끝으로 9주간의 축제를 마감했다. 마지막 날엔 BBC 심포니의 새 음악감독 사카리 오라모가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 ‘라스트 나이트 오브 더 프롬스’에 데뷔했다. 영국 국기 유니언잭을 셔츠로 입은 핀란드인 지휘자가 대영제국의 영광을 지휘하는 모습 뒤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에 반대하는 영국 정치인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날 연주된 R. 슈트라우스의 칸타타 ‘재봉소(Taillefer)’는 독일어 버전의 성악곡으로 프랑스 계열의 노르만족이 영국 본토의 앵글로색슨을 무찌른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를 다뤘다.

에드워드 블레이크먼이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올해 프롬스는 여러 곳에서 위기 징후가 보였다. 이전 4년 동안 95퍼센트를 유지하던 유료 관객 점유율이 88퍼센트대로 떨어졌다. 블레이크먼이 심혈을 기울인 청소년·팝 관객을 유인하는 프로그램이 흥행엔 성공을 거뒀지만 차이나 필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심포니 등 변방에서 부른 열 개 악단의 성과를 바라보는 프롬스의 입장은 아직 중립에 가깝다. 악단별 흥행 결과도 각각이었고 재초청 논의가 이뤄지는 소식은 뜸하다. 해프닝은 카타르 필에서 터졌다. 지휘자 장한나가 행정 스태프와 예술적 견해 차이를 이유로 음악감독직에서 즉각 사임한다는 소식이 프롬스 데뷔 직후 알려졌다. ‘마젤의 제자’ 장한나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시절을 포함해 오랫동안 마젤과 함께했던 카타르 필 행정감독 쿠르트 마이스터의 갈등이 마젤 없는 세상에서 극을 달렸다.


▲ BC 프롬스에 데뷔한 서울시향과 작곡가 진은숙

8월 27일 아침, 프롬스 데뷔를 앞두고 런던의 한 호텔에 정명훈과 진은숙, 생황 주자 우웨이가 기자간담회석에 앉았다. 런던 발행 일간지의 클래식 비평가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저널들의 질문이 활발했다. “왜 진은숙 곡을 프롬스에 올렸는가”라는 질문에 정명훈은 “진은숙이 얼마나 잘하는지 자랑하고 싶어서”라며 ‘자랑하고 싶어서’를 여러 번 반복했다. 지금껏 프롬스에 오를 때 늘 이방인과 함께했던 정명훈은 옆에 앉은 진은숙을 든든해했다. 첼로 협주곡으로 베를린 필과도 함께했던 이들 조합은 세계의 주요 거점으로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필하모니아를 보기 위해 정기적으로 런던을 찾는 진은숙은 “앨버트홀에서 6,000명의 관객이 내 음악을 듣는다는 게 흥분된다”며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까지 프롬스에 섰던 아시아권 악단들인 NHK 심포니나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에서는 볼 수 없던, 지휘자와 작곡가의 값진 연대였다.

김선욱과 함께 핀란드·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 이어진 유럽 투어를 함께한 서울시향 단원들의 컨디션은 투어의 마지막 여정지 런던에서 정점을 찍었다. 공연 전날 런던에 입성한 단원들은 삼삼오오 미리 공연장을 찾아 원형 무대의 분위기를 머리에 넣었다. 팀파니스트 아드리앵 페뤼숑이 이반 피셰르/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울시향 후원회도 투어를 함께하면서 음양으로 악단을 응원했다.

서울시향의 프롬스 데뷔 선곡을 보면 2009년부터 이어진 유럽 진출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연주곡 모두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작품들이다. 긴장하지 말고 서울에서 하던 그대로 보여주자는 의도였다. 올해 프롬스 초반, 큰 무대를 의식해 경직된 모습이 전면에 흐르던 차이나 필은 흡사 교향악 축제에 데뷔하는 지방 악단을 연상케 했다. 무명 악단의 브랜드 가치 제고는 음반과 투어의 시너지에서 출발한다는 김주호 전 서울시향 대표의 통찰이 꽃을 피우는 순간이었다.

첫 곡, 드뷔시 교향시 ‘바다’의 도입부, 첼로와 더블베이스를 시작으로 포말이 일렁이는 스케일이 마치 괴물이 나타나듯 심상치 않았다. 기존 프랑스 인상주의 전문가들의 해석에서 흔히 보던 온건한 점묘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풍경을 묘사하듯 정명훈은 애매한 음조와 불협화음 사이를 오가며 파도와 바람의 유희를 선명하게 시각화했다. 저음현이 두꺼워지면서 깊이와 볼륨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눈앞에 펼쳐졌고 개별 악기들이 풍부한 색상을 머금으면서 전체적인 인상이 밝아졌다. 어디를 모방한 것이 아닌 서울시향의 진솔한 소리가 담긴 수연이었다.


▲ 우웨이의 초인적인 폐활량으로 완성된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 ‘슈’

공연의 백미는 생황 주자 우웨이가 협연한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 ‘슈’였다. 들을수록 흥미를 느끼게 하는 현대음악이 무엇인지, 정명훈이 ‘자랑하고 싶다’는 실체가 드디어 눈앞에 드러났다. 우웨이는 기자간담회에서 “진은숙은 악기의 비르투오시티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다 알고 있다”고 했는데 그 자신이 어깨를 들썩이며 들숨과 날숨을 교환하면서 청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작품 전체를 보면 전통적 의미의 협주곡이라기보다 실내악적 앙상블에 가까웠고, 지휘자를 포함한 단원 모두 생황을 연주하는 그림에 동참하는 모습이었다. 증기선으로 비유한다면 우웨이는 선장이나 조타수가 아니라 배 밑에서 터빈을 돌리는 노동자의 역할이었다. 현대적으로 개량된 생황은 반음계와 미분음을 낼 수 있고 화성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을 체감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에도 생황과 비슷한 악기가 있고 반도네온이나 아코디언도 생황 소리와 비슷하지만 생황 협주곡이 특별한 것은 인간의 숨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관객이 생생하게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특수한 주법의 문제가 아니라 우웨이의 초인적인 폐활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놀랄만한 작품을 진은숙이 만들어냈다. 이렇게 한 번 더 탄력을 받은 진은숙의 존재감은 2018/2019시즌 로열 오페라 초연이 예정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런던 관객과 더 친밀해질 것이다.

후반부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은 기존 러시아 오케스트라의 권위에 기죽지 않은 독자적인 해석이었다. 레가토가 강하게 걸린 1악장의 현악 앙상블부터 서울시향의 캐릭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요즘 프롬스는 글로벌화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보다 서울시향 공연 하루 전 열렸던 이반 피셰르와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브람스 교향곡처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빚어내는 독창적인 조합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정명훈이 섬세한 지시를 내지 않아도 악장 스베틀린 루세프를 시작으로 각 악기 수석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운신의 폭이 넓었다. 지휘자와 악단 사이에 연륜이 없으면 불가능한 궁합이다. 2악장 왈츠에선 현의 비브라토를 풍성하게 내뿜는 스트링 섹션의 선봉에 루세프가 있었다. 그는 낭만 작품에서 우아함과 달콤함을 자아내는 테크닉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일부 현지 비평가들은 3악장 스케르초에서 여성 단원이 많은 서울시향의 폭발력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지만 긴장감과 리듬감, 음질과 밸런스 면에서 그런 걱정은 기우로 그쳤다. 3악장이 끝나고 브라보와 함께 큰 박수가 쏟아졌고, 정명훈은 4악장이 시작되기 전 가벼운 목례로 숨을 골랐다. 종악장 도입에서 서울시향은 중간 박수의 영향을 받아 템포감에 문제가 생겼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레퀴엠을 부르듯 슬프게 울었다. 개별 악기군에 대한 아쉬움이나 테크닉을 두고 논할 게 별로 없는 뜨거운 하룻밤이었다.

아레나의 바닥을 발로 구르며 관객들은 커튼콜을 원했고 정명훈은 “프롬스의 주인은 관객 여러분”이라고 답하며 브람스 ‘헝가리 춤곡’을 답례로 남겼다. 그렇게 길고 긴 서울시향의 유럽 투어가 막을 내렸다.

8월 30일과 31일에는 두 명의 한국 성악가가 프롬스에 데뷔했다. 사무엘 윤은 30일 도널드 러니클스가 지휘하는 도이치 오퍼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R. 슈트라우스 ‘살로메’의 콘서트 버전에 출연해 바리톤 음역의 세례자 요한을 소화했다. 이튿날에는 세묜 비치코프/BBC 심포니의 연주로 R. 슈트라우스 ‘엘렉트라’의 콘서트 오페라가 열렸고 베이스 박종민이 ‘오레스테스’의 조언자로 프롬스에 데뷔했다. 두 사람 모두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공연으로 한국 팬들에게도 익숙한 가수들이다. 둘 다 유럽 본토 스케줄이 빡빡했지만 짧은 연습으로 투입이 가능한 콘서트 오페라 버전의 경량감을 십분 활용해 런던 관객과 만났다.

INTERVIEW

빈 슈타츠오퍼의 베이스 박종민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성악 부문 우승자이자 2014년 BBC 프롬스에서 ‘오레스테스’의 조언자로 데뷔한 박종민을 공연을 앞두고 만날 수 있었다. 다음은 박종민과의 일문일답


▲ 베이스 박종민

2013/2014 시즌부터 빈 슈타츠오퍼 정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 여름에만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에서 정명훈이 이끄는 런던 심포니 ‘합창’과 로열 오페라 ‘라보엠’ 콜린 역에 이어 벌써 세 번째 런던 공연이다.

로열 오페라 ‘라보엠’은 3년 전 오디션을 미리 봤고 로열 오페라 감독 파파노가 방으로 직접 와서 여러 조언을 해준 게 참 좋았다. 좋은 일이 있길 기대하고 있다. 정명훈 선생님과 베토벤 교향곡 ‘합창’은 한국에서도 여러 번 해서 자신 있었다. 프롬스는 시즌 오프닝 전 잠깐 시간이 났고, 또 워낙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가 거장이어서 배역은 작지만 오고 싶었다. 비치코프의 조수인 폴 바이골트가 캐스팅했고, 마에스트로의 눈에 잘 들 수 있도록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비치코프는 굉장히 가수를 잘 맞춰주는 지휘자다. ‘코반치나’로 빈에도 올 예정이다.

2014/2015 시즌 빈 슈타츠오퍼의 스케줄은?

올 10월 푸치니 ‘라보엠’을 하고 틸레만 지휘로 R. 슈트라우스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를 한다. 2015년 1월 ‘세비야의 이발사’, 2월 벨리니 ‘청교도’에서 조르조를 맡고, 4월 9일에는 무지크페라인에서 리사이틀이 예정됐다. 4월 말 차이콥스키 ‘오네긴’에서 그레민 역을 소화하는데 사이사이에 커버도 수행해야 해서 어떤 때는 하루에 세 작품을 연습할 것 같다. 전속 가수가 60여 명 정도여서 커버도 1·2·3으로 나뉘기 일쑤다.

올해로 스물여덟의 나이인데 어린 베이스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베이스는 대부분 무겁고 노회한 왕이나 제사장·아버지 같은 역할이 많다. 캐스팅이 자연히 나이 든 가수에게 간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늙은 소리를 내려고 하진 않는다. 문제가 되는 건 이탈리아 지역의 연출가들이 베이스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노래는 잘한다고 하지만 왕을 하기에 어리다고 한다. 로시니의 종교음악에 음역과 선율이 어울리는 곡이 꽤 있다. 러시아 오페라에도 저음부 베이스를 강조하는 작품이 많은데 대학에서 잠시 익힌 러시아어 딕션을 공부할 필요를 느낀다.

바그너 도전은 언제부터 구체화될 것인가.

연광철·사무엘 윤·전승현 선생님이 바이로이트 무대에 오른 것이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된다. 그 연배에 맞춰서 어떤 소리를 익혀야 하는지 기다리고 있다.

갑작스럽게 무대 위에 대타로 올라갔던 경험이 있나.

함부르크 시절, 극장장 시모네 영이 지휘한 바그너 ‘리엔치’ 때였다. 오페라 연출가가 오후 7시 정도에 나에게 와서, 준비하던 가수가 부상으로 빠졌는데 이 곡을 부른 성악가를 수소문해도 내일 제너럴 리허설에 오를 사람이 없다면서 커버도 아닌 나에게 가능 여부를 물어왔다. 나를 믿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밤잠도 안 자고 외워 무대에 올라갔지만 리뷰가 좋았고 시모네 영도 고마워했다.

이탈리아 스칼라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다가 독일로 넘어갔다.

일정한 월급을 받으면서 커리어를 쌓는 게 중요한데 이탈리아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 독일은 현대적인 연출을 많이 하기 때문에 베이스의 고정 관념을 깨는 배역이 가능하다. 같은 왕도 대통령으로 설정되면 나이 어린 베이스더라도 소화할 수 있다. 빈에 오면서 고전과 현대 적인 연출 양면에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 한국에선 박종민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유럽 무대에 막상 서보니 좋은 지휘자를 만날 수 있는 한 줄의 경력이다. 빈 슈타츠오퍼에서 활동하는 앙상블을 선보일 기회나 독일 가곡을 피아노 반주로 선보일 기회가 한국에서 있었으면 좋겠다.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사진BBC Proms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