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구실 벽엔 10여 년 전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내 인생 가운데 파리에서 보낸 10년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벽에 붙여놓은 사진들은 그때의 정신과 마음을 한시라도 잊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중에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에투왈(수석 무용수)인 아녜스 르테스튀와 함께한 사진도 있는데, 2014년 12월, 국내에서 개봉한 그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 문득 벽에 걸린 사진과 함께 오래전 추억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1992년 대학교 2학년인 나는 부푼 꿈을 안고 처음으로 불가리아 바르나 발레 콩쿠르에 참가했다. 결과는 비록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오르는 것으로 그쳤지만, ‘발레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대회에 참가한 첫 한국인이라는 데 의의를 두며, 아쉬운 마음을 정리했다. 이후 콩쿠르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갈라 공연을 기다리던 날이었다. 화려한 금발에 타이트한 청바지, 하늘하늘한 흰색 남방을 걸친 훤칠한 키의 매력적인 유럽 여성 한 명이 내가 묵던 호텔 로비에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파리 오페라 발레의 별 아녜스 르테스튀였다.
그녀는 당시 바르나 발레 콩쿠르에서 시니어 부문 금상을 받은, 자신의 파트너이자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동료 호세 마르티네즈의 갈라 공연 파트너로 그곳에 와 있었다. 이후 갈라 공연에서 보여준 그녀만의 우아함과 테크닉, 그리고 프랑스 정통 발레의 수준은 단연 그 대회 최고의 이슈였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1998년 국립발레단 단원 시절 파리 콩쿠르에서 1위를 한 뒤, 샹젤리제 궁에서 열린 시상식 겸 칵테일파티에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귀한 자태와 아름다움이 주는 위압감 때문에 말 한마디도 못 건 채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2000년이 되어 파리 오페라 발레에 입단해 아녜스를 매일 보게 됐지만, 특유의 오묘한 카리스마로 인해 그녀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잘 지내?”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녜스가 말을 건넸다. 그녀는 내게 1998년 파리 콩쿠르에서의 남성다운 춤을 기억한다며, 그 남성성을 더욱 부각시키면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도 주시할 것이라는 격려를 건넸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당시 내게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이후로 우리는 2002년 서울에서 열린 갈라 공연에 함께 참여했고, 2005년 나의 개인 공연을 위해 제작한 영상에서 예리한 카리스마로 나를 연습시키는 장면을 연출해주며 서로 돈독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2009년 파리 오페라 발레를 나와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녀와 간혹 연락을 하며 지냈는데, 최근 외국에서 개봉한 아녜스의 삶을 다룬 영화가 오래지 않아 한국에도 소개되어 깜짝 놀랐다.
시사회에서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기까지 내 안에 일어난 감정들은 스스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미묘했다. 특히 영화 속 사람들과 장소를 보는 동안 오랜 추억들이 모두 떠올랐다. 함께했던 선생님들과 동료들, 피아니스트들과 직원들, 연습실 그리고 꿈의 무대였던 가르니에 극장과 바스티유 극장 무대들과 작품들까지 모두 말이다. 내가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함께했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리 오페라 발레는 모든 면에서 매력적이고 또 위대한 발레단이다.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를 되새긴 시간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리고 영화에서 눈여겨볼 부분 중 하나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레퍼토리이다. 파리 오페라 발레가 세계 유명 안무가들에게 제안하고 투자해 레퍼토리화한 작품들 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 많다. 호세 마르티네즈가 안무한 ‘천국의 아이들’과 카롤린 칼송 안무의 ‘사인’, 그리고 이르지 킬리안 안무의 ‘달의 공주’, 여기에 루돌프 누레예프만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안무와 연출이 돋보이는 전막 발레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신데렐라’ 같은 명작들의 공연과 무대 뒷모습들을 영화를 통해 한 번에 볼 수 있는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파리 오페라 발레에 10년간 있었던 나조차 처음 접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장면도 있었는데 바로 아녜스가 ‘사인’의 안무가인 카롤린 칼송과 함께 나오는 장면이었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에투왈(수석 무용수)은 전 세계 최고의 발레 무용수를 손꼽을 때 늘 포함되는 실력자 중의 실력자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배우고자 하는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의 아녜스와 움직임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진지하게 설명해주는 카롤린 칼송을 보면서 두 거장의 생생한 교감이 나에겐 무척 놀라우면서 꽤 흥미롭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속에 등장한 무용수·안무가·발레마스터·단장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진정한 예술가가 지녀야 할 자세와 정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고, 위로를 받는 시간이 되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의 일부를 지면으로 옮겨본다.
“아녜스는 지시하거나 고쳤으면 하는 것을 다음 무대에서 모두 반영해 온다. 그 위에 안무를 다시 마음껏 덧붙일 수 있기에 그녀와의 작업이 무엇보다 좋았다.” –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
“에투왈로서 42세 정년과 말년을 잘 보내려면 자신이 가진 것을 잘 활용해야 한다. 갖지 못한 것을 두고 좌절하지 말고,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스스로의 숨통을 트여주고 지구상에서 일상이 주는 경이로움을 발견하길 바란다. 적어도 말년에는 자신에게 관대하라.”– 아녜스의 스승 기슬렌 테스마르
“무용수는 지구상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예술가이다. 좌절감이나 콤플렉스를 심어줘선 안 된다. 그들을 돕고 격려하는 것과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을 무척 중요하다. 한 인간이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안무가 이르지 킬리안
“무용수들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워낙 큰 사람들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발휘하지 못할까봐 언제나 애태우다 보니 그들의 욕망을 다루는 것이 감독으로서 가장 힘들다. 어떤 경우엔 그들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능력과 길을 내가 열어줄 때도 있기에 그들을 책임진다는 것은 큰 감동이자 엄청난 의무이다.”
– 파리오페라 발레단 단장 브리지트 르페브르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영화를 보는 예술가들과 관객으로 하여금 위로와 확신을 줬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때문에 이 영화가 갖는 진실성이 더욱 깊게 느껴졌고, 그 심연으로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10여 년 전부터 아녜스는 무대의상 분야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이 발레단에서 은퇴한 이후의 삶에 장밋빛 기대를 갖고, 긍정적으로 사고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왔고, 동시에 그것을 즐기면서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를 보면서 준비하는 자에게 ‘정년’이나 ‘퇴직’이라는 단어가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흥분되는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초조하게 끝을 기다리기만 하는 자에게는 결코 허락하지 않고, 오직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멋진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 판씨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