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롬베르크·오스카 해머스타인 ‘Lover, Come Back To Me’

황덕호의 재즈 스탠더드 넘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월 1일 12:00 오전

188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지그문트 롬베르크(1887~1951)는 그가 작곡을 하고 오스카 해머스타인(1895~1960)이 노랫말을 쓴 뮤지컬 ‘뉴문(The New Moon)’을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재즈의 세계와 무관한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오늘날 헝가리 영토에서 태어난 그는 빈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1909년 미국으로 건너가 연필 공장에서 주급 7달러를 받고 일했던 이력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며 고등학교 시절 교내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던 그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카페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러던 중 맨해튼의 브로드웨이를 뮤지컬의 거리로 만든 슈버트 형제의 눈에 띄어 1914년부터 1920년대까지 일련의 오페레타와 뮤지컬을 작곡했다. 작품들은 흥행했고 평단의 반응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고전음악풍의 그의 노래들은 여전히 재즈와는 거리가 있었다. 더욱이 이 뮤지컬이 발표된 이듬해에 이 뮤지컬에서 등장했던 ‘Lover, Come Back To Me’를 재즈밴드 폴 화이트먼 오케스트라가 녹음했지만 그때도 이 곡이 재즈 음악인들에게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아울러 ‘뉴문’을 통해 함께 등장했던 ‘Softly As In A Morning Sunrise’가 재즈 스탠더드로 남게 된 것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 곡에 몇몇 연주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곡이 탄생한 지 거의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1937년에는 앤디 커크가, 1939년에는 아티 쇼가 이 곡을 그들의 빅밴드 녹음으로 남긴 것이다. 하지만 스윙 시대의 분위기를 담은 가장 탁월한 녹음은 빌리 홀리데이(1915~1959)가 피아니스트 에디 헤이우드의 편곡으로 노래한 1944년 녹음(음반①)일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약물의 그늘이 드리워져 1930년대에 들려주었던 그녀만의 생기가 어슴푸레 사라지고 있지만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이 곡의 상심은 빌리의 1944년 녹음 이후로는 재즈에서 재현되지 못했다.

빨라지는 템포 속에서 칼날을 드러낸 주자들

‘Lover, Come Back To Me’는 원곡의 분위기가 아니라 곡이 갖고 있는 숨겨진 성격으로 인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재즈 연주자들은 이 곡이 즉흥연주를 구사하기에 상대적으로 편한, 단순한 코드 진행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연주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빌리 홀리데이가 이 곡을 녹음하기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테너색소포니스트 콜맨 호킨스는 이미 1943년에 이 곡을 중간 템포보다 빠르게 녹음했고(Brunswick) 그러한 아이디어는 1946년에 레스터 영(Keynote), 로이 엘드리지(Decca)의 녹음을 통해 재현되었다. 그중에서 레스터 영의 녹음은 원곡의 주제 선율을 처음부터 변주해갔는데 이러한 경향은 플립 필립스(1915~2001)의 1949년 녹음(음반②)에 한데 모아져 결정판을 만들어냈다. 소위 ‘퍼스트 허드(herd는 떼,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라고 불렸던 우디 허먼의 두 번째 빅밴드에서 간판 테너색소포니스트로 활약했던 그는 더 빨라진 템포 위에 하모니를 재구성해 완전한 비밥풍의 작품으로 변모시켰다. 3분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그의 즉흥연주는 이 곡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명백하게 들려주었다.

이듬해에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 역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과 함께 숨이 막힐 정도의 빠른 속도로 이 곡을 녹음했지만(Verve), 테너색소폰의 명인들을 통해 이 곡이 발전해나갔다는 점에서 1952년 스탠 게츠(1927~1991)의 녹음(음반③)은 특별히 흥미롭다. 공교롭게도 플립의 ‘동문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우디 허먼의 ‘세컨드 허드’ 출신의 그는 이 곡을 통해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진면목을 남긴 것이다. 세간에서 그는 가장 탁월한 발라드 연주자였다. 그에게 스타플레이어로서 명성을 안긴 랄프 번즈의 작품 ‘Early Autumn’ 역시 발라드였고 한 인터뷰에서 그는 중간 템포보다 더 빠른 곡을 연주할 때면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실은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하지만 스탠은 태생적으로 천재였고 본질적으로 모더니스트였다. 그가 빠른 템포의 곡을 연주하지 못했다면 우디 허먼의 ‘세컨드 허드’ 간판이었던 ‘Four Brothers’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레스터 영과 찰리 파커를 적절하게 배합한 것 같은, 하지만 그 위에서 스탠 본인의 광휘가 번뜩이는 ‘Lover, Come Back To Me’는 스탠이 얼마나 탁월한 연주자였는지를 새삼 이야기해주는 걸작이다.

스탠은 이 곡을 1956년 10월 디지 길레스피·소니 스팃과 함께 더 빠른 템포로 또 한 번 녹음했다(Verve). 오르가니스트 지미 스미스는 그보다 조금 앞선 같은 해 6월에 이 곡을 녹음했고(Blue Note), 테너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은 1958년 5월에(Prestige), 콜트레인의 녹음에 참여했던 트럼페터 도널드 버드도 같은 해 12월에 이 곡을 다시 녹음(Blue Note)했다.


▲ 틈새 하나 없는 즉흥연주를 선보인 플립 필립스 ⓒNigel Henderson Estate

재즈의 격전지에서 발전소가 되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녹음된 이 연주들은 모두 연주 시간이 7~9분에 이르는 잼세션의 성격을 갖고 있다. 물론 레코딩에 들어가기 전에 가진 리허설 흔적이 살짝 엿보이긴 하지만 연주 템포를 한껏 빠르게 잡고 연주자들이 자신의 솔로 부분에서 맘껏 기량을 펼치는 즉흥연주는 이 녹음들에 공통적으로 부과된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이정표는 1954년 LA에서 이미 세워졌다. 이날 레코딩 스튜디오에 관객들을 초대해 녹음한 디나 워싱턴(1924~1963)의 잼세션은 버브 레코드의 노먼 그랜즈가 제작했던 일련의 잼세션 녹음에 비교해도-당시에는 비교적 신인들로 구성된 것 같았겠지만 오늘날 시각에서 보자면-절대 부족함이 없는 화려한 출연진의 무대였다. 우선 당시 엠아시 레코드의 간판으로 하드밥 밴드였던 클리포드 브라운-맥스 로치 5중주 전원이 참여했고 여기에 클락 테리·메이너드 퍼거슨·허브 겔러·주니어 맨스·케터 베츠 등 LA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일급 연주자들이 대거 등장한 이날 실황(음반④)은 독주자들 사이의 기량이 선연한 불꽃을 튀겼고, 이때 ‘Lover, Come Back To Me’는 한판의 격전장이 되었다. 날이 선 독주자들 사이에서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다이나의 목소리도 놀라웠지만 테리·브라운·퍼거슨으로 이어지는 세 트럼페터의 대결은 재즈라는 즉흥음악이 선사하는 본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작곡가 지그문트 롬베르크가 1928년 당시로서는 자신의 곡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이 음악의 광경은 지난 100여 년간 재즈가 모진 풍파를 거치며 발전해온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동력은 한 걸음 더 앞으로 이 곡을 밀고 나갔다. 1947년 찰리 파커는 ‘Lover, Come Back To Me’의 코드 진행을 바탕으로 새로운 곡 ‘Bird Gets The Worm’를 만들었고 이듬해에 콜맨 호킨스는 ‘Bean&The Boys’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재즈는 그렇게 발전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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