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은희경 ‘낯선, 고독으로 짓는 타인의 세계’

조진주의 THE ART OF PRACTIC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5월 1일 12:00 오전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으레 따르는 질문이 있다. 이때, 신중해야 한다. 대답에 따라 개인의 사상이 드러나고, 물어본 사람은 그것을 기반으로 상대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은희경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가족이나 모성애 따위로 정의되는 여자도, 지나치게 감상적인 문학소녀도 되기 싫다는 의미에 가깝다. 여기에 냉소적이면서 통찰력 있는 은희경의 작품 속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낀다면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상대방 얼굴에 드러나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은희경의 작품 세계 속 인물들처럼 되기를 동경하면서 말이다.

수련의 진화 _독립된 자아, 세상에 목소리를 내다

작가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성장해온 그녀는, 어떠한 모범적인 틀에 맞춰 살아왔다고 자평했다. 그 틀에 주눅이 들다가도, 다시금 도전하면서 말이다. 부모님과 남들 앞에선 말 잘 듣는 아이였지만, 혼자 있을 때는 엉뚱한 공상가로 이중생활을 즐겼던 그녀는, 일찍이 내면을 숨기는 법을 배운 데뷔작 ‘새의 선물’의 진희 같았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매일 성실하게 하나하나 갖춰가며 모범적으로 사는 게 인생인 줄 알았어요. 가정을 꾸리고 가사를 잘하고… 잡지사도 다니고 프리랜서로 글도 쓰면서 뭐든 숙제하듯 하면서 지냈는데 문득 30대 중반에 벼랑 끝으로 몰린 기분이 들었어요. 문제를 많이 느꼈죠. 이렇게 정해진 대로 달력 한 장 한 장을 떼어내듯 살다 끝나는 게 인생인가 싶었어요.”

자신의 글을 써야겠다는 투지도, 꿈도 접고 소심하게 살던 여자는 자신의 불행을 새로운 원동력으로 삼았다. 스스로를 죄고 있던 끈을 대담하게 끊고는 노트북과 책 몇 권, 일기장을 갖고 낯선 곳으로 떠났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리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때 쓴 단편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은희경은 35세에 작가로서 삶을 시작하게 됐다.

“그때 나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생긴 것 같아요. 모범적으로 살 때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 없었죠. 정해진 대로 열심히 살면 되니까요. 그런데 혼자 얼마간을 보내고 나니, 내 이야기가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왜 뒤늦게 작가가 됐느냐고 물으면, 일상에서 숙제하느라 그랬다고 답해요. 결국 문학은 인간이 무엇인지, 세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내 목소리를 내는 거잖아요. 독립된 자아를 갖고 저만의 틀을 만들어가는 것에 대한 고민들이 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됐고, 그러면서 소설을 시작하게 됐어요.”

은희경 작가의 말을 들으면서, 엉뚱하게도 올해 스무 살인 후배가 “이제 연주도, 연습도 모두 지쳤다”고 푸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창조보다 해석의 범위를 고심하는 업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연습으로 열정을 불사르는, 재능 있는 연주자일수록 수련이 습관으로 변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열정이 업으로 전환되는 순간, 첫사랑의 애끓는 욕망은 사라지고 서로에게 관심 없는 노부부처럼 되어버리는 건 아닐지. 과연 나는 지치지 않으면서, 예술과의 관계를 가슴 떨리게 유지할 수 있을지… 확답할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날마다 그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관념의 수련 _홀로 고독하게, 예술적 자아 일깨우기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읽다가 결정적 순간에 다다르면, 남은 페이지 수를 세어보고 버럭 화가 난다. 이토록 치밀하게 끌어와 애를 태우다 이제야 터졌는데, 고작 열 장밖에 안 남았다니!

그녀는 늘 자유분방한 카오스를 툭 던져놓고는, 그 혼돈을 냉정하고 낯선 시선으로 천천히 정리한다. 자극적인 카타르시스를 한 방 날리고는 일방적으로 막을 내린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던 독자 입장에서는 ‘미치도록’ 안달이 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너무 궁금해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음악을 할 때 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프레이징을 선호하는 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매력만 유지하면서 발산을 억누르고 참아야, 한두 번 정도의 특별한 순간이 더욱 도발적이라 믿어서다. 이런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하면 한 끗 차이로 지루함과 쾌감이 갈리기에 위험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예술가로 하여금 더 극단적 수련을 필요케 하는 표현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으로 표현을 이끌어내는 은희경 작가의 수련은 짐작대로 단순하고 외로웠다.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도 문득 생각해요. 글이라는 건 날이 서고, 깨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만족하거나 안주하면 안 된다. 빨리 불편하고 고독해져야 한다. 어서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죠.”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나 또한 창의적 발상이 나오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과연 나는 얼마나 외로운 선택을 했던가. 두려움 때문에 평범함이나 안일함을 택하지는 않았는지…. 죄책감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니 더는 놀랄 것도 없지만, 그 몇 마디에 신경이 곤두서는 건 왜일까.

“고독을 다스릴 줄 알아야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작가는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하고, 그 외의 시간으로 남들 하는 걸 해야 하죠. 자신과 홀로 대면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고, 그 시간을 견뎌야 창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고독이 즐겁지는 않아요. 대신 편하긴 하죠. 결국 타인은 나에게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니까요. 그리움이 있고 만나고 싶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다시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독한 과정에서 빚어진 은희경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는다. 예컨대 끊임없이 주위를 배회하느라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캐릭터는, 작품 속에서 사실 거대한 중고 식탁을 좁은 부엌에 들여놓은 여자로만 설명될 뿐인데, 그리 많은 단어가 쓰이지 않은 이 디테일 하나로 여성 캐릭터의 나머지 삶을 독자가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이와 같이 은희경의 인물들은 각각의 여운을 오래도록 남기며,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실제의 사람들인 양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그들이 내게 한결같이 선명하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늘 상투성을 깨는 훈련을 해요. 저는 30년 넘게 하나의 틀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라, 뭐 하나를 봐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생각이 먼저 들어요. 이미 형성된 것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죠. 하지만 속으로 ‘이건 너무 상식적이야’ ‘이건 너무 보수적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상투성을 깨려고 해요. 예전엔 내가 너무 갇힌 사람이라 창조적이고 독특한 것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젠 상투적이기 때문에, 그걸 비틀면 독특해지는 거라고 여겨요.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을 관찰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관점 즉 ‘틀’로 그 사건을 보는데, 여기에서 어떠한 디테일에 주목하면 틀은 자연스럽게 사라지죠. 저는 장편을 쓰더라도 특정한 목적의식이나 테마를 정해놓고 시작하지 않아요. 그저 어떤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중요하죠. 호기심을 가지고 자아를 발전시켜나가다 보면 자연스레 메시지가 생기고 이야기와 맞아떨어지면서 소설이 풀려요.”

행동의 수련 _낯선 곳에서 익명의 누군가로 살기

수련을 규칙적으로, 지속하는 사람들은 특유의 분위기를 머금고 있다. 그들은 진지하고 날카롭다. 은희경은 생각보다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한 후 글을 쓰고, 낮에는 산책이나 달리기를 한다. 저녁에는 책을 읽거나 구상을 하고 급하게 마무리해야 할 원고가 있는 날엔 다시 글을 쓴다. 밤늦은 시간까지 각성된 날이면, ‘정신을 풀고 강박을 버리려’ 술을 마시기도 한다는 대목에선 왠지 그녀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한 첫 단계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거예요. 예전엔 집을 떠나 작업실이나 먼 곳으로 떠났는데, 이젠 몸도 힘들고 작업실마저 익숙한 생활공간으로 느껴져 아침 일찍 문 여는 조용한 카페를 찾아가요.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가는 거죠.”

낯설고 불편한 공간에 들어서는 것은 ‘나’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다. 이곳에서 그녀는 익명의 누군가가 되어 감각의 날을 세우고 옆자리의 술 마시다가 온 청년들의 이야기도 엿들으면서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를 탐닉하고 새로운 캐릭터도 발견한다고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은희경 작가는 아이들과 남편 곁을 자주 비웠다. 그사이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잘 자라줬고, 자유로운 남편은 여전히 예상 밖으로 움직인다. 그녀는 자신의 개인주의를 이해해준 자녀들과 무척 사이가 좋다. 관찰자가 되어야 하기에 어디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자신에게 말동무가 되어주는 남편은 ‘작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다. 여기에 구성원 각자가 행복해야 곧 행복한 가족과 가정이 만들어진다며 “타인은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 수련 _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알아가는 시간

“무엇을 만들어내는 일 자체가 가장 자유로운 상황이에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부자유 속에 처해야 무언가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발견하고 만들고 싶은 사람이고, 내가 다루는 것이 소설이기에 더 자유롭게, 파격적이거나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시간과 공간의 자유를 많이 포기해야 하지만 결국 나라는 존재를 빚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은 제한된 존재인 나로부터의 해방이죠.”

모든 것은 발견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이야기하지만 서로의 고독을 해소해주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은희경은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를 연구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사는 게 어렵고, 모르겠어요. 그걸 하나씩 생각해보기 위해 소설을 쓰는 거죠. 그래서 질문을 갖고 책상에 앉아요. 작품 하나를 쓰고 나면 스스로 그 문제를 충분히 생각해봤다는 마음이 들거든요. 그 과정에서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알아가고,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를 인정하며 생각의 지평을 넓혀가는 거죠.”

나는 소설을 읽을 때면 옆 귀퉁이를 접고 밑줄을 긋곤 한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언어가 선사하는 감정이 모두 감당되지 않을 만큼 크고 뜨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지난해 출간한 그녀의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를 읽으면서는 단 한 문장에도 밑줄을 긋지 않았다. 어떤 문체나 문장보다 전체가 내 안에 스며들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아마도 이전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나에게 삶은 더 이상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고, 감정에 거리를 두는 것 또한 좀 더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런 변화가 ‘무뎌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유를 추구하는 나의 직업 안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성숙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기에.

삶을 노래하는 음악을 업으로 삼았기에, 나에게 음악은 한평생 어려운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익숙한 생활, 반복적 일상이 되는 순간 나는 목소리를 잃은 앵무새가 될 것이다. 정신을 각성해야 하는 시기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동안 오랜만에 소설 몇 권을 정독했고, 연습 양도 조금 늘렸다.

사진 심규태

소설가 은희경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이 있다. 문학동네소설상·동서문학상·이상문학상·한국소설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이산문학상·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