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을 버텨준, 가난한 가건물

송현민의 CULTURE COD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7월 1일 12:00 오전

가난할 때,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꿈의 버팀목을 세웠다. 지리멸렬한 예술 하기의 힘겨움

아르바이트 | 본래의 직업이 아닌, 임시로 하는 일. 부업이라고도 함

예술가라고 해서 무조건 세속과 담을 쌓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술에서의 ‘자유’를 외쳤지만, 불안한 현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예술이 언젠가 꽃피울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속세의 돈을 벌어 자신의 예술 세계에 지속적인 수혈을 했던 것이 아닐까.

돈 되는 것이면 모두 다! 비평부터 와인 판매까지

음악사를 살펴보면, 작곡·연주보다 효율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부업을 택한 이도 많았다. 이들은 주로 악기나 악보 출판·판매·중개업에 손을 댔다.

베를리오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비평의 펜을 잡았다. ‘회상록(The Memoirs of Hector Berlioz)’에서 비평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 ‘비평이라는 톱니바퀴에 물려 휘말리고 말았다’고 술회했는데, 이는 그의 편치 않은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생활비 충당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비평의 힘과 폭력성에 그 누구보다 먼저 눈뜬 작곡가였다. ‘유럽 평론’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그는 비평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의 기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를 옹호하고 미에 대적하는 것을 공격하기 위한 이런 무기를 손에 넣는다고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는 않다. 여전히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어 조금이라도 수입을 늘릴 수 있을 것 같아 이 일을 수락하기로 했다.’

더 실리적인 부업을 택한 이로는 베토벤의 할아버지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베토벤(1770~1827)과 같은 루트비히 베토벤(1712~1773)이다. 그는 본의 궁정 악단에서 악장으로 일했다. 인망도 두터웠다. 그런데 급료는 충분치 않았고 부업으로 와인을 판매했다. 이는 베토벤 가문에 경제적 여유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베토벤의 할머니는 알코올의존증으로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베토벤도 알코올의존증에 빠졌다. 경제적인 문과 비극의 문이 함께 열린 것이다.

최고의 두 작곡가가 공동 대표였던 이삿짐센터

20세기 음악사에 미니멀리즘을 추가한 라 몬티 영, 그로부터 자양분을 받아 미니멀리즘을 발전시킨 스티브 라이히와 필립 글래스. 선율이나 박자를 반복하는 미니멀리즘 음악처럼 라이히와 글래스의 삶에는 음악 외에도 늘 아르바이트가 반복됐다. 하지만 그들은 펜과 오선지를 놓지 않았다. 아니, 세상에 통용되지 않는, 하지만 언젠가는 빛을 볼 거라고 믿으며 음표를 탄생시키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며 작곡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작곡가는 기업·재단 지원금을 수혜하거나, 학위를 취득한 후 아카데미에 적을 둔다. 그래야 안정적으로 창작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히는 밀스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학계와 작별을 고한다. 그는 구겐하임의 지원금이나 조교수직을 찾아다니는 대신 택시를 운전하고 우체국에서 일하며 곡을 썼다. ‘당신이 원하는 곡’이 아닌 ‘자신이 쓰고 싶은 곡’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닦은 글래스도 마찬가지다. 그도 음악계 밖에서 생업을 찾았다. 줄리아드 음악원 재학 시절에는 기중기를 몰았다. 작곡가로 이름을 날린 뒤에도 그의 명성은 빈 주머니를 채워주지 못했나 보다. 배관공 일도 했다. 어느 날은 예술평론가 로버트 휴스의 아파트에 접시닦이 기계를 설치해주기도 했다. 휴스는 뉴욕 소호의 저명한 작곡가가 왜 자기 집 부엌 바닥을 기어 다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라이히와 글래스는 잠깐 동안 뉴욕 첼시에 경량 이삿짐센터를 세웠다. 두 대표이자 일꾼이 20세기 음악사를 바꾸고 있는 천재 작곡가라니! 그들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고층 건물의 좁은 계단으로 가구를 옮겨주었다고 한다.

필립 글래스가 명성을 얻으면서 자력으로 생활하는 그의 이미지는 청중에게 긍정적으로 먹혀들었다. 그러던 중에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이 성공한다. 4세기에 걸친 오페라 역사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종류의 오페라로 자리매김했다. 1976년 아비뇽 초연에 이어 그해 11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이틀 밤에 걸쳐 공연했다. 표는 매진이었다. 하지만 글래스에게는 9만 달러의 부채가 남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한동안 잊고 있던 택시 운전석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귀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그의 택시에 탔다. 운전사의 이름을 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사 양반, 굉장히 유명한 작곡가와 이름이 같은 거 아시나요?”

글래스의 이러한 이중생활은 오페라 ‘사탸그라하’를 위촉받던 1978년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그는 작곡가로서 완벽한 성공을 거둔 뒤에는 위스키 광고 모델은 물론, 시계 광고를 위한 음악을 쓰는 등 대중 스타 못지않은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음악가 아르바이트 소사(小史)

한국의 음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타덤에 오르기 전인 무명 시절, 그들도 역시 가난한 고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바이올린 교육의 대모(大母)인 김남윤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어릴 적부터 교육자로서 ‘끼’가 충만했다. 서울예고 재학 중에도 아르바이트로 어린 학생을 가르쳤다. 그때 만난 제자가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이다. 예고 졸업 후 뉴욕에 간 김남윤은 줄리아드 음악원 재학 중 생활비를 벌기 위해 베이비시터와 브로드웨이 뮤지컬 반주자로 일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하루 10시간 이상 미친 듯이 연습했다. 그렇게 1년 동안 연마한 뒤 1974년 스위스 티보바가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김남윤의 제자인 클라라 주미 강도 아르바이트 일화에서 빠질 수 없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역(逆)유학 온 클라라 주미 강은 학비를 벌기 위해 가수들의 반주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날은 녹음이 길어지자 다들 지쳤다. 그때 누군가가 클라라 주미 강에게 “네가 힘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니 네가 연주해라”라고 해서 바이올린 솔로를 연주했다. 그 곡이 SG워너비의 ‘라라라’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때 그녀는 그 가수가 누구인지도, 어떤 곡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작곡가 진은숙의 아르바이트 기록은 ‘최연소’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틈틈이 결혼식 반주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다. 김포공항 근처의 결혼식장에서 결혼 행진곡으로 통용되는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행진곡 등을 연주하고 50원씩 받았다고 한다. 밥 한 끼가 약 20원 할 때이니 당시로서는 꽤 쏠쏠한 벌이였다. 진은숙은 목사이자 음악 애호가였던 아버지에게 네 살 때부터 음악에 관한 기초 이론과 악보 읽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부유한 집안의 딸 같지만, 4남매 중 둘째인 그녀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었고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월드뮤직 음악가 양방언은 1984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을 거쳐 마취과 의사가 됐다. 2년 후 동경대 병원으로 발령받았는데, 며칠 뒤 병원 의국장을 찾아가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음악이 좋아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집을 나온 그는 건강진단 아르바이트를 하며 음악 활동을 했다. 취미가 전공으로, 전공이 부업이 된 것이다.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도 아르바이트를 통해 인생의 대전환이 있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그녀는 한동안 방황했고, 경비행기 조종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 공연 차 들른 박동진 명창의 통역 아르바이트를 맡게 됐다. 그때 박동진의 “넌 소리를 해야 쓰겄다”는 말을 듣고 한국으로 건너와 ‘박카스’를 들고 박동진의 연습실을 드나들었다.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작곡으로 석사 과정을 밟았고, 한국적 색채가 녹아든 창작 뮤지컬에서 음악감독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김메리가 작곡한 ‘학교종’에는 음악과 관계없는 그녀만의 아르바이트 체험이 녹아 있다. 외부대신, 즉 조선 말 외교에 관한 사무를 통할하던 칙임관을 지낸 김익승의 셋째 딸로 태어난 김메리는 1923년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 전신) 문과에 입학했다. 독립성이 강했던 김메리는 졸업할 때까지 기상·식사·취침·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종치기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이 1948년에 작곡한 ‘학교종’의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로 알려진 이규태는 오히려 음악을 아르바이트로 삼은 경우다. 1950년대에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외화 번역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종로 1가에 위치한 음악다방 르네상스에서 디스크자키로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르네상스는 작곡가 백병동·강석희부터 문학평론가 이어령 등 당시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집합지였다. 그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에는 ‘디스크자키 이규태’에 관한 추억이 나온다. 또 누군가는 그런 음악적 감수성이 뒷받침됐기에 왕성한 문기(文氣)를 뿜어낸 것이 아니었나 하는 말도 한다.

많은 이들이 음악가는 세속과 담을 쌓고 예술에만 매달리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풍족한 가문의 자제이기에 세상 물정에 초월하여 돈 안 되는 예술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음악가에게나 불안으로 점철되고 가난했던 젊은 날의 초상이 있다. 하고 싶은 예술과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 일치하지 않았던 시절, 어쩌면 그 때의 아르바이트는 자기 자신과 그의 예술이 언젠가는 꽃피울 것이라는 자신감에 택한 삶의 버팀목일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버티자, 조금만 더 버티자. 나는 언젠가 높이 날 것이다···라며. 한 예술가가 성공의 반열에 오르면 자신이 이력서를 쓰는 게 아니라 세상이 이력서를 써준다. 그 때마다 그가 올라온 높이보다 뚫고 온 깊이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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