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풍미했던 ‘블루스 보이’, 세계인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나다
‘블루스가 뿌리이며, 다른 모든 음악은 그 열매다’(윌리 딕슨)
이 말은 블루스가 현대의 대중음악에 남긴 영향력과 효용성을 설명한다. 지난 5월 14일, 음악의 위대한 뿌리, 블루스의 제왕으로 살아온 아티스트가 세상을 떠났다. 블루스를 찬미했던 현대의 모든 기타 연주자에게 존재만으로 정신적 우상이던 비 비 킹(B. B. King). 그의 죽음은 수많은 아티스트, 음악 팬들의 가슴 시린 상실과 슬픔이다.
‘블루스 보이’의 탄생
‘블루스 보이’라는 애칭과 함께 ‘비 비 킹’이라 불린 그의 본명은 라일리 B. 킹(Riley B. King)이다. 1925년 9월 16일, 블루스의 고장 미시시피 주 이타비나 지역에서 태어난 소년은 네 살 때부터 교회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그의 유년 시절은 친구들과 교회에서 노래하고, 거리에서 기타 치며 놀이를 하는, 블루스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는 티본 워커·로니 존슨·소니 보이 윌리엄스 같은 블루스 선배들을 추종하며 동시에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찰리 크리스천을 흠모했다.
라일리 B. 킹은 10대 중반에 자신의 첫 번째 밴드인 엘크혼 싱어스를 결성해 미시시피 인디애놀라 지역에서 활동했다. 1943년 징집되어 군복무를 마친 후 그가 향한 곳은 미국 남부의 음악적 중심지 멤피스였다. 그곳에서 무명의 가수로 활동하다 델타 블루스의 창시자 중 한 명이던 친척 부카 화이트의 곁에서 수련했고, 그의 음악은 조금씩 깊이를 더해갔다.
그의 음악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은 1948년, 자신의 음악적 우상이던 하모니카 주자 소니 보이 윌리엄스가 진행하는 라디오 쇼에 출연하면서다. 소니 보이 윌리엄스의 추천으로 WDIA 라디오 방송국의 프로그램에서 10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 코너의 진행을 맡게 되었고, 그는 기타리스트가 아닌 DJ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때 자칭·타칭으로 불린 애칭이 ‘블루스 보이(Blues Boy)’다. 그는 ‘비 비 킹(B. B. King)’이라는 이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비 비 킹이 애용하던 깁슨사의 ES-335 모델 기타는 ‘루실’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1949년, 멤피스의 어느 바에서 비 비 킹이 무대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때 관중석에서 두 사내의 다툼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누군가가 석유램프를 걷어차 건물이 커다란 화염에 휩싸였다. 다행히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지만, 기타를 미처 챙기지 못한 비 비 킹은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기타를 들고 나왔다. 화제의 원인이 루실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두고 벌어진 다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비 비 킹은 목숨 걸고 구한 자신의 기타에 ‘루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 비 킹만의 앙칼진 톤과 비브라토 가득한 기타 사운드를 각인시키며, 비 비 킹의 음악과 동고동락했던 ‘루실’은 비 비 킹에게 본격적인 뮤지션으로의 성공을 약속했다. 1949년, 리더 데뷔작 ‘Miss Martha King’을 통해 그는 드디어 DJ가 아닌 출중한 블루스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로 환영받기 시작했다. 이후 ‘Three O’Clock Blues’ ‘You Know I Love You’ ‘Please Love Me’ ‘Whole Lotta Love’ ‘You Upset Me Baby’ ‘Everyday I Have the Blues’와 같은 곡들이 블루스와 R&B 시장에서 조금씩 전파되기 시작했다. 1957년 ‘Be Careful with a Fool’이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 것은 당시 흑인 블루스 뮤지션으로는 뚜렷한 성과였다. 그러나 여전히 비 비 킹은 그저 변방의 음악 장르인 블루스와 R&B 시장에서 주목받는 여러 뮤지션 중 한 명이었다.
1950년대 후반까지 그의 여러 곡이 꾸준히 히트했지만, 그저 R&B 차트에서 언급되거나 간혹 팝 차트에서 기웃대다 사라지는 미미한 성공이었다. 1961년, 메이저 레이블의 범주에 포함되던 ABC 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었지만, 주류 음악 시장에서의 특별한 주목은 없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척 베리·빌 헤일리 등에 의한 로큰롤 열풍이 몰아치면서, 그 음악의 원류 격인 블루스는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흑인음악도 세련된 솔이나 R&B의 감성이 유행하면서 정통 블루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만 갔다.
영원히 기억될 비 비의 넉넉한 웃음
1965년에 발표한 ‘Live at the Regal’은 비 비 킹의 음악의 새로운 전환점이자 본격적인 비 비 킹의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됐다. 1964년 11월, 미국 시카고의 리글 시어터에서 열린 라이브 실황 음반은 비 비 킹의 생생한 블루스를 고스란히 담았고, 빌보드 음반 차트 78위에 오르는 뜻밖의 수확을 거뒀다. 1968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과 필모어 웨스트 공연에 참가해 블루스의 묘미와 유연하면서도 신비로운 테크닉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비 비 킹은 당대의 기타리스트, 블루스를 동경하던 젊은 음악인의 우상으로 거듭났다. 1960년대 중·후반, 비 비 킹의 존재는 비슷한 시기에 물밀 듯이 등장하는 록 기타리스트에게 분명한 자극이 되었다.
모던 블루스 기타의 3대 제왕이라 불린 비 비 킹·앨버트 킹·프레디 킹. 이들의 음악에 도취해 블루스에 기반한 록을 피력했던 영국과 미국의 기타리스트들은 비 비 킹을 포함한 세 명의 아티스트를 위대한 스승으로 숭배했다. 1960년대 중·후반에 불어닥친 블루스 리바이벌 현상의 수혜자는 에릭 클랩턴·지미 페이지·제프 벡·조지 해리슨·키스 리처즈·지미 헨드릭스·마이크 블룸필드·두에인 올맨·로이 뷰캐넌 등이다. 넓게는 1960~1970년대를 누빈 대부분의 영미 기타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열거한 기타리스트들이 소속된 각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비 비 킹은 비로소 현대 대중음악 역사의 주류로 기록되었다.
1970년대에도 비 비 킹을 향한 동경은 계속됐다. 생애 15회의 그래미상 수상 기록을 남긴 비 비 킹의 첫 그래미상 수상은 1969년 발표한 앨범 ‘Completely Well’의 수록곡 ‘The Thrill is Gone’을 통해서다. 데뷔 초기에 남긴 곡과 ‘The Thrill is Gone’ ‘Lucille’ ‘Why I Sing the Blues’ 등의 새로운 히트곡이 블루스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그와 함께 작업하기를 희망하는 뮤지션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싱어송라이터 리언 러셀, 그리고 그룹 이글스의 기타리스트 조 월시와 함께한 음반이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공히 사랑받았다. 1974년 R&B 보컬리스트 보비 블랜드와 함께 발매한 음반 ‘Together for the First Time… Live’는 밀리언셀러 음반이 되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와 호텔을 중심으로 미국·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의 공연장과 라이브 클럽을 순회하며 매일같이 블루스를 연주했다. 1979년에는 옛 소련에서 공연한 최초의 블루스 뮤지션으로, 약 두 달간 소련의 다섯 지역을 순회하는, 냉전 시대에 특별한 이력을 남기기도 했다. 전 세계 음악 팬에게 블루스의 매력을 전파하며, 블루스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비 비 킹은 1980년 블루스 명예의전당, 1987년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헌액되었다.
비 비 킹의 일생은 블루스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정통 블루스의 본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70여 년의 음악 인생에서 비공식적으로 2만 회 이상의 라이브 무대에서 연주했다. 1980년대 이후 건강 악화로 휴식기를 갖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는 무대에서 넉넉한 웃음과 포용력 넘치는 음악으로 후배 뮤지션들과 숱한 감동을 전했다. 퓨전 재즈 그룹 더 크루세이더스와 록 그룹 U2와의 협연을 비롯해 에릭 클랩턴·번 모리슨·게리 무어·셰릴 크로·존 메이어 등과의 무대는 그 자체로 대중음악사의 명장면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칠순의 나이를 넘어 활동이 뜸해졌지만, 2000년 에릭 클랩턴과 발표한 ‘Riding with the King’은 명백히 비 비 킹이 돋보이는 명작이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지그시 에릭 클랩턴의 기타를 끌어주고 받쳐주는 여유와 넉넉함에 새로운 세대의 청중은 노장의 음악적 경지에 경이감을 느꼈다. 음반은 200만 장 이상 판매고를 올렸고, 그래미상 블루스 부문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그의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음반 ‘80’에 에릭 클랩턴·엘턴 존·마크 노플러·번 모리슨·보비 블랜드·존 메이어·셰릴 크로·글로리아 에스테판 등 스타들이 참여해 성대한 축연을 나누었다. 2010년에는 영국의 권위 있는 공연장인 로열 앨버트홀에서 롤링 스톤스의 로니 우드, 건스 앤 로지스의 슬래시, 심플리 레드의 믹 허크널 등의 후배들과 함께 85회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당뇨병은 블루스 왕의 삶을 89세에 멈추게 했다. 2015년 5월 14일, 비 비 킹은 당뇨병에 의한 탈수 증세로 블루스와 함께했던 유장한 생을 마감했다. 에릭 클랩턴은 “나에게 음악적 영감을 안겨준 사랑하는 친구를 잃어 슬프다.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라고 애도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블루스는 왕을 잃었고, 미국은 전설을 잃었다. 비 비는 갔지만 그가 남긴 전율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추모의 성명을 읽었다.
몇 해 전, 어느 대학 실용음악과 강의에서 블루스의 위대함과 효용성을 침 튀기며 말한 적이 있었다. 공감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중 ‘블루스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기타를 연주하는 어느 나이 많은 학생이 웃으며 답했다. “블루스는 비 비 킹이 자신의 육중한 배 위에 루실을 얹어놓고,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입니다”라고. 그의 명쾌한 대답에 나는 곧장 유튜브로 비 비 킹의 연주 영상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제야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저게 블루스구나!”라며 탄성했다.
글 하종욱
하종욱은 ‘좋은 음악에는 장르와 경계의 구분이 없음을 신봉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다. 공연 및 음반 기획, 연출, 제작, 평론, 강의 등 음악과 이웃한 일을 하고 있다.
추천 앨범
Live at the Regal(1965)
비 비 킹의 전설의 출발점이 된 음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튜디오가 아닌 라이브에서 보다 진정한 빛이 발산되는 그의 기타는 섬세함과 농염함으로 가득하다. 생기 넘치는 비브라토의 기타 사운드와 하나 된 블루스 보컬 또한 그가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이자 동시에 보컬리스트였음을 인식하게 한다.
Riding with the King(2000)
평생 진정한 친구이자 제자로서 비 비 킹의 곁을 지킨 에릭 클랩턴의 특별한 선물. 캐딜락 오픈카에서 두 기타 명인이 주고받은 음악적 교감은 블루스만의 풍치를 압축해 보여주는 명품이다.
80(2005)
에릭 클랩턴·마크 노플러·셰릴 크로·존 메이어와 나누는 블루스 기타의 향연만으로도 이 음반은 들을 거리가 풍성하다. 비 비 킹의 기타에 어우러지는 엘턴 존·글로리아 에스테판의 블루지한 목소리는 신선한 감각을 지녔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