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지만 신비로운 그 선율
미국 남동부에 자리한 조지아 주는 동쪽에 인접한 대서양 해변에 많은 섬을 거느리고 있다. 이 섬들은 노예제가 존재하던 약 300년 동안 쌀과 목화의 경작지였다. 여름에는 말라리아를 피해 백인들은 내륙으로 피신했고, 그래서 서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들만 자신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던 곳이다. 그러니까 이 섬들은 1920년대에 육지와 연결되는 교각이 건설되기까지 북미의 문화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곳이다.
할렘 르네상스 시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를 연구한 인류학자 조라 닐 허스턴은 선친 때부터 의회 예산으로 미국 민요들을 채집하던 앨런 로맥스를 1935년 조지아 주 섬들로 데리고 갔다. 당시 앨런은 그 노래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12년 뒤 미국 전역의 흑인 교도소(당시 남부를 떠나 새로운 터전을 향해 정처 없이 떠돌던 흑인들은 많은 수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에서 녹취한 노동요들을 듣고서 12년 전 조지아 주 섬에서 듣던 노래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노래들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네 마디로 구성된 한 행이 한 번 혹은 두 번 반복되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발전한 형태는 삼행으로 이뤄진 열두 마디 노래였고 1·4·5도, 단 세 개의 화성만 쓰이는 단순한 형식이었다. 앨런 로맥스가 이 노래를 발견했을 때 이러한 노래의 중심지는 이미 조지아 주를 떠나 미국 남부의 농장 지대, 흑인들의 주요 교통로였던 미시시피 강 주변, 소위 델타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더 단순한 4·8마디-형태의 노래들이 조지아 주에서 바로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서아프리카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훗날의 민속학자들은 발견했다. 사람들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이러한 노래들을 블루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부루쓰’라는 토착화한 명칭이 상징하듯이, 블루스는 한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도 가장 몰이해된 음악일 것이다. ‘부루쓰’는 한국 나이트클럽에서 남녀가 붙들고 추는 퇴폐적이고 느린 춤을 위한 음악이었고, 설사 그러한 왜곡은 아닐지라도 ‘블루’(blue)라는 이름 때문에 반드시 우울한 음악이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이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노동요에 이 형식을 이용했고 빠르고 즐거운 노래에도 블루스의 형식과 가락을 사용했다. 1930년대 ‘부기우기’라고 불리던 8비트의 빠른 음악은 실상 블루스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고, 이 음악이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백인 젊은이들에 의해 연주되자 사람들은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블루스였다. 다시 말해 록은 블루스의 아들인 셈이다.
독주자의 기교를 자랑하는 한 판의 장
재즈 역시 초창기부터 블루스의 형식을 그대로 갖다 썼다. 루이 암스트롱·카운트 베이시·빌리 홀리데이·셀로니오스 멍크·찰리 파커·마일스 데이비스·존 콜트레인은 모두 블루스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했다. 그런 가운데 재즈 역사에 가장 창조적인 작곡가로 불리던 듀크 엘링턴은 첫 번째 행을 아무런 변화 없이 세 번 반복하는, 무책임할 정도로 단순한 ‘C Jam Blues’를 발표해 의표를 찔렀다. 하지만 연주자들은 그 단순함 때문에 이 곡을 제목 그대로 전혀 리허설 없이 즉석으로 연주하는 잼 세션 곡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곡에서 정교한 앙상블을 뽐내던 엘링턴 오케스트라가 78회전 디스크 전체를 여섯 연주자의 솔로로 꽉 채운 1942년도 첫 녹음은 블루스의 단순, 유쾌함의 표상이었다.
1960년대 프로듀서 밥 실은 이 곡에 가사를 붙여 보컬리스트를 위한 곡으로 만들었고, 아울러 ‘Duke′s Place’이란 새 제목을 붙였다. 밥 실의 가사로 루이 암스트롱(Roulette)·스터프 스미스(Storyville)·조야 셰릴(20th Century Fox)·클라크 테리(Flying Dutchman) 등이 노래를 불렀지만 역시 최고 녹음은 엘링턴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녹음이었다. 쿠티 윌리엄스의 장쾌한 솔로로 문을 여는 이 녹음은 엘라의 목소리 뒤편에서 울리는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그 어느 때보다 육중한 열기로 가득하다.
한편 ‘C Jam Blues’는 듀크의 공간이자 독주자들의 한 판의 장이었다. 얼 하인스(Limelight Records)· 케니 버럴(Fantasy)의 녹음은 이 곡을 소재로 한 열띤 잼세션의 표본이다. 하지만 밍거스의 1974년 카네기홀 실황에서 밍거스 그룹과 이날 초대된 올스타 멤버들의 사력을 다한 뜨거운 격전은 그 어느 녹음과도 비교를 거부한다. 특히 24개 코러스를 통해 펼쳐지는 롤랜드 커크의 격정적인 솔로는 그해 중풍으로 마비가 오기 전에 남긴 실질적인 마지막 사자후였다.
동시에 ‘C Jam Blues’는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오스카 피터슨(RCA Victor· Verve), 레드 갈런드(Prestige), 레이 브라이언트(Columbia), 얼 하인스(New World), 데이브 매케나(Chiaroscuro·Concord) 모두 단순한 블루스 형식을 통해 그들의 화려한 기교를 과시했다. 하지만 노년의 마리언 맥파틀랜드가 매우 느리게 펼쳐내는 분산 화음은 블루스가 얼마나 신비로운 비경(祕境)을 숨기고 있는지를 환상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름 모를 수많은 민초에 의해 불렸던 민요, 블루스는 보컬리스트 존 헨드릭스가 말했던 것처럼 푸른 하늘과 바다 그 아래 있는 모든 것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달의 추천 재즈음반
❶ 듀크 엘링턴 ‘The Blanton-Webster Band’
RCA-Victor 5659-2-RB|연주시간 2분 42초|1942년 1월 21일 녹음|듀크 엘링턴(피아노)/레이 낸스(바이올린)/렉스 스튜어트(코넷)/벤 웹스터/조 ‘트리키 샘’ 낸턴(트롬본)/바니 비거드(클라리넷)/듀크 엘링턴(지휘)/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❷ 엘라 피츠제럴드 & 듀크 엘링턴 ‘Ella at Duke’s Place‘
Verve 314 529 700-2|연주시간 4분 14초|1965년 10월 녹음|엘라 피츠제럴드(보컬)/쿠티 윌리엄스(트럼펫)/조니 호지스(알토 색소폰)/폴 곤잘베스(테너 색소폰)/지미 해밀턴(클라리넷)/듀크 엘링턴(피아노·지휘)/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❸ 찰스 밍거스 ‘Mingus at Carnegie Hall’
Atlantic-Rhino R2 72285|연주시간 24분 40초|1974년 1월 19일 녹음|조지 애덤스(테너 색소폰)/해미에트 블루이에트(바리톤 색소폰)/돈 풀렌(피아노)/찰스 밍거스(베이스)/대니 리치먼드(드럼)이상 밍거스 그룹/게존 패디스(트럼펫)/찰스 맥퍼슨(알토 색소폰)/존 핸디·라산 롤랜드 커크 (테너 색소폰)
❹ 마리언 맥파틀랜드 ‘The Single Petal of a Rose’
Concord CCD-4895-2|연주시간 6분 43초|2000년 4월 17일 녹음|마리언 맥파틀랜드(피아노)/빌 더글러스(베이스)
글 황덕호
KBS 1FM ‘재즈 수첩’을 16년째 진행하고 있다. ‘평론가’보다는 ‘애호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쓰고, 듣고, 틀고,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