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M 레이블 음반 커버에 작품을 실은 안웅철과 음악 감상 공간 스트라디움을 설계한 구승회. 이들이 말하는 음악에 깊이를 더하는 법
음악은 무형이다. 그렇기에 이미지로 포장되고, 공간에 담겨 소비된다. 음반을 양손에 쥐었을 때 첫눈에 들어오는 커버 이미지는 음악의 인상을 결정하며, 음악을 듣고 있는 공간의 모습과 분위기에 따라 듣는 이의 흥취는 달라진다.
어쩌면 당연한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이들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등장한 제주 서연의집 건축가로 유명한 구승회는 지난 10월 16일 오픈한 음악 감상 공간 스트라디움을 설계했다. 음악·공연 애호가로 정평이 나 있는 사진가 안웅철은 한국인 작가로는 처음으로 ECM 레이블의 음반 커버에 작품을 실었다. 건축가와 사진가. 음악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우리 마음에 와 닿는 음악은 이들로 인해 완성되는지도 모른다.
이태원에 자리한 스트라디움, 정식 오픈 당일 오전 10시에 이들과 만났다.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마련된 이들과의 대화는 음악, 그 주변에서 시작됐지만 끝날 때까지 멀어지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두 사람이 들려준 새로운 이야기를 지면에 옮긴다.
이곳은 정말 멋진 공간입니다. 아이리버로부터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음악 감상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구 소장은 어떤 공간을 꿈꿨나요?
구승회 건축가는 건축주의 목적과 의도에 맞게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건축주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아이리버가 주장하는 것은 단 하나였어요. ‘음악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 고민이 무척 많이 됐습니다. 여러 가지 편안한 감상의 방식을 떠올렸어요. 혼자 듣기, 모여서 듣기, 그리고 모여서 혼자 듣기. 각각이 지니는 스토리를 상상해 기능에 맞게 설계했습니다. 아이리버의 포터블 하이파이 오디오 브랜드인 아스텔앤컨의 주요 소비자 연령대가 40대 이상 남성이라고 하더군요. 가격대가 높아서겠죠. 젊은 여성들에게도 어필해야 하니 편안하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려 노력했습니다.
2, 3층에 있는 스튜디오는 런던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 설계자인 샘 토요시마와 작업하셨죠.
구승회 음향 전문가인 샘 토요시마에게 기술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배워가며 작업했습니다. 벽 단면의 형태에 따라 소리 울림의 모양이 달라지니 토요시마의 의견을 듣고, 구조를 잡은 뒤 다시 그에게 확인받는 식으로 진행했어요. 레코딩 스튜디오와 소규모 공연장을 겸해야 하는 공간이라 토요시마에게도, 저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음악 외적인 부분으로는, 동양의 정서를 살려 옷깃처럼 접어 넣는 모양으로 벽면을 디자인했습니다. 감싸 안는 듯 포근한 느낌도 주면서 아티스트가 가운데 섰을 때 에반게리온의 날개처럼 멋진 모습도 연출될 것 같았어요.(웃음)
두 분은 음악이나 미술 등 다른 예술에 영감을 받아 작업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두 분의 일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안 작가가 촬영한 제주 곶자왈 풍경 사진이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이루마에게 영감이 되어 그의 연주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더군요.
안웅철 아주 오래전부터 제가 찍은 사진이 인화되어 벽에 걸려 있기만 하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활용되고, 확대되고, 재생산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단지 그게 어떤 방식인지 알지 못했죠. 이루마 씨는 평소 친한 사이인데, 예전에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사진 한 장을 마음에 들어 하기에 선물한 적이 있어요. 굉장히 힘든 시기에 피아노 위에 악보가 아닌 사진을 놓고 연주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제 사진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요. 당시 촬영 중이던 제주 곶자왈 풍경 사진을 보내줬더니 마음에 들어 했고, 그렇게 이루마의 9집 음반이 나왔습니다. 곶자왈 사진은 이번에 한 코즈메틱 회사의 아티스트 컬래버레이션 제품 론칭에도 활용되어 곧 저와 제 사진의 이름을 딴 향수가 발매될 예정입니다. 제 사진이 음악이 되고, 향기가 되는 건 꿈같이 행복한 일입니다.
‘영감’이라는 말이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두 분은 어디에서 영감을 받는지 궁금합니다. 건축과 사진 모두 계산적으로, 또 계획적으로 대상에 접근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정성을 담아내야 하는 일인데요.
안웅철 저에게는 영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촬영 대상은 그대로이고 작품의 비주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만, 사진에 담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촬영할 때 항상 음악을 듣는데, 제가 대상을 포착하는 순간에 흘러나온 음악이 결과물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구승회 저도 일할 때 음악을 자주 듣는 편입니다. 사실 매 프로젝트마다 ‘작업송’이라는 게 있어서 같은 곡을 무한 반복하는데요. 스트라디움 작업 때는 고난과 역경이 많아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의 ‘칸토 안티고’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혔어요.(웃음) 영감이라는 건 받는다 해도 정확히 인지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인지한다 해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저는 그저 경험의 산물로서 외부에서 얻은 것들을 순간순간 내면에서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듯합니다.
안 작가는 작년부터 ECM 레이블과 인연을 맺었는데요. ‘ECM 음반의 감상은 커버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정도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담는 것으로 유명하죠.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됐는지.
안웅철 워낙 ECM 음반을 좋아했고, ECM 커버 특유의 음울하면서도 미술적인 느낌이 제 사진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레이블로 포트폴리오를 보냈는데 회신을 받지는 못했어요. 그러다 2013년, 전시를 목적으로 ECM 대표인 만프레드 아이허가 내한했고, 음반사의 요청으로 아이허의 사진을 찍게 됐죠. 촬영 사진을 정리해 보내야 하는데 꾀가 생겨 아이허 사진에 제 작품 사진들을 끼워 함께 보냈어요.(웃음) 결국 아이허 측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때 보냈던 사진 중 현재까지 총 4장이 ECM 뉴 시리즈 신보 커버에 실렸어요. 정명훈(2014), 아냐 레흐너·프랑수아 쿠튀리에(2014), 안나 구라리(2014), 키스 자렛(2015)의 음반이죠.
완성된 음악을 어떤 포장지에 담을지 결정하는 과정은 굉장히 신중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만프레드 아이허에게 400번 이상 컨펌받았다는 한 디자이너의 일화가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실제 과정은 어떤지요?
안웅철 누군가는 음악을 먼저 들어볼 수 있어 좋겠다고 하던데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음반이 완성되면 수많은 작가가 미리 보내놓은 사진 중 아이허가 음악과 어울릴 만한 이미지를 골라 실어요. 전적으로 아이허의 권한이죠. 작가들은 ‘ECM 스타일’의 촬영 사진을 프린트와 이미지 파일로 각각 보내놓으면 그만입니다. 음반 커버에 사진이 실리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레이블과 음반에 대한 가치를 알고 애정이 깊으니 저에게는 기쁘고 뿌듯한 일입니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기도 하고요.
비움, 소통, 그리고 행복
두 분이 평소 고민하고 생각해왔을 단어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비움’입니다. 얼마 전 한 연출가가 인터뷰에서 무대 연출할 때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비워두는 게 가장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두 분도 설계와 촬영을 할 때 ‘비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실 것 같습니다.
안웅철 비우는 건 정말 채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뉴욕에 갈 때마다 모네의 ‘수련’ 시리즈를 보는데 물감이 머금은 깊이, 붓의 질감 등이 다채로워 여러 번, 오래 봐도 매우 흥미로워요. 반면 사진은 평평한 단면이기에 단조롭죠. 사진가들은 풍경 사진을 찍을 때 자꾸 뭔가를 집어넣으며 이야깃거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역설적으로 공간이 비워져야 그 안에 나만의 이야기를 채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구승회 건축 분야에서는 ‘비움’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건축주는 설계도면이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당황하고 걱정해요. 완성되기 전에는 실물을 볼 수 없으니 그렇죠.
안웅철 현대인들은 ‘비움’에 대한 훈련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음악을 들을 때도 LP를 꺼내 바늘을 올려놓거나 테이프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 듣고 싶은 곡을 들었는데, 지금은 손가락만으로 넘겨버릴 수 있으니 음악을 만드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요소를 기대하죠. 기다리고, 익숙해지고, 생각하는 시간이 아예 사라져버린 것 같아요.
‘소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죠. 음악과의 소통, 대중과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는 연주자와 마찬가지로 건축가와 사진가도 짓거나 찍는 대상과의 소통,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에 대해 생각할 것 같습니다.
구승회 저는 일단 건축주와 실사용자를 구분 지어 생각합니다. 공간의 주인이 원하는 것을 듣는 것 외에 실제로 공간을 활용할 사람들에게 필요할 만한 걸 상상하고 유추하는 과정을 스스로 거칩니다. 최후에 제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죠.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2012)를 보면, 저의 스승이기도 했던 고(故) 정기용 건축가가 본인이 설계한 공중목욕탕 입구 옆 구석에 앉아 그곳을 드나드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을 보는데 울컥하더군요. 건축가는 사람이 아닌 자신이 지은 건물과 소통하는구나, 그리고 건축가는 죽어도 건물은 남는구나 등의 생각을 하면서 많은 감정을 느꼈어요.
안웅철 프랑스의 유명 패션 사진가 파트리크 드마셸리에는 자신이 촬영할 배우나 모델이 오면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근황도 묻고, 안부도 묻고 하는 거예요. 이후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해 짧은 시간 안에 최고 결과물을 완성했답니다. 그는 이미 말로써 두 시간 동안 촬영을 한 거죠. 저 또한 촬영 대상과 감정 교류를 하며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사진의 감흥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음악과의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해왔어요. 2010년에 올림푸스홀에서 저와 정서적으로 교류했던 황병기·송영훈·김광민 씨와 함께 전시와 연주가 한데 열리는 ‘사진, 음악을 사랑하다’라는 공연을 주최한 적이 있죠. 사진과 음악이 하나가 되는 형식의 음반이나 페스티벌 등을 제작해보고 싶어 여러 음악가에게 제안하기도 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아직까지 실현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은 ‘행복’입니다. 건축가로서, 사진가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안웅철 제 작품이 비싸게 팔릴 때요.(웃음) 농담처럼 말했지만, 누군가와 교감하는 순간이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저의 사진을 보고 감동받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상업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모차르트도 골방에서 홀로 예술혼을 불태운 것이 아니라 전폭적 후원을 받으며 예술 활동을 했어요. 고(故) 백남준 선생은 예술가가 필독할 책으로 경제지를 꼽았죠.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이 목적일 수는 없지만 전투적으로, 고집스럽게 일하기보다는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면서 자신의 예술성도 당당히 지켜가는 그런 예술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구승회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 고민하다 보니 행복한 순간을 바라고 꿈꾸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자의식이 강하거나 야망이 큰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제가 집을 지어 주는 사람, 그리고 저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건축 사무소를 운영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앞에서 이끌어가야 하는 입장인데요.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합니다. 건축 일을 20년 간 해왔는데, 이 분야는 50년은 해야 뭐가 좀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 행복하게 버티는 것이 목표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스트라디움을 빠져나오면서 공간 안에 흐르는 리듬감, 사진에 담긴 역동성, 그리고 음악이 입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 모든 건 생각보다 일상적이다.
▲ 구승회
연세대 건축공학과 졸업 후 컬럼비아 대학교 건축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창조건축과 야마사키코리아건축사사무소를 거쳐 현재 (주)크래프트 대표로 있으며, 영화 ‘건축학개론’에 등장한 제주도 서연의집을 설계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 안웅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광고회사에 근무하다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1993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개최했다. 저서 ‘Are You Going with Me?’ ‘공차는 아이들(김훈 공저)’ ‘스틸 라이프-안웅철의 음악 같은 사진 이야기’와 사진을 함께 수록한 컴필레이션 앨범 ‘런던 스토리’ ‘뉴욕 스토리’ 등을 발간했다.
사진 심규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