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시작과 프로메테우스

유형종의 MYTH+MUSIC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월 1일 12:00 오전

베토벤·리스트·스크랴빈·홀스트에게 영감을 준 그리스 신화와 영웅 이야기

베토벤·리스트·스크랴빈·홀스트에게 영감을 준 그리스 신화와 영웅 이야기


▲ 페터 파울 루벤스 ‘포박된 프로메테우스’(1618)

서구 문화의 양대 뿌리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한다. 그중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 핵심은 신화다. 그리스 신화에는 수많은 신과 인간의 이야기가 어느 신화보다도 방대한 규모로 담겨 있으며,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본(異本)이 전승되곤 한다. 단지 몇 명의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라는 의미다. 물론 모든 서구 문화를 헬레니즘 또는 헤브라이즘의 관점에서만 풀어내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리스 신화의 흔적은 클래식 음악사를 통해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미술이나 문학을 살펴보는 책이 넘쳐나는 것에 비해 신화를 기준으로 명곡을 살펴보려는 시도는 매우 부족한 듯싶어 이번 기회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로마식 이름도 알아야 그리스 신화를 알 수 있다!

그리스 신화가 언제부터 전승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1200년 즈음에는 이미 상당한 이야기가 축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 신화의 뒷자락에 해당하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것이 기원전 1230년 무렵이니 말이다. 이후 새로운 신화가 풍부하게 더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리스에 아티카 문자가 등장하면서 기원전 750년경에는 문자로 기록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가 그 시기의 대표적 산물이다. 신화 속 이야기가 도자기에 그려지고, 조각과 신전 건축의 형태로 만개하는 시기가 몇 세기에 걸쳐 펼쳐졌으며 드디어 그리스 비극의 형태로 신화가 각색되거나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한다.

그리스를 복속시킨 대제국 로마는 현명하게도 정복된 땅의 빛나는 문화를 받아들였다. 대신 여러 신의 이름은 로마식으로 바뀐다. 이것은 우리들이 그리스 신화를 접할 때 처음부터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문제다. 그러다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신화는 타격을 받았고, 로마가 멸망해버리자 적어도 서유럽 기준으로는 1000년에 가까운 헬레니즘의 암흑기가 도래한다. 다행히 중세 말기에 르네상스 운동으로 되살아나지만 신화 속 이름들은 거의 로마식으로 표기되었다. 그리스식 표기가 다시 대세를 이룬 것은 19세기에 여러 저자가 다양한 종류의 그리스 신화 책자를 내면서부터다. 심지어 그때도 대부분은 고대 로마의 문호 오비디우스가 그리스 신화를 로마 신화로 정리한 ‘변신 이야기’를 글쓴이의 스타일대로 편집해서 그리스식 표기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리스식 표기와 로마식 표기를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다. 의외로 로마식 표기가 더 친숙한 경우를 여럿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그리스식 표기가 표준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옛 문학이나 그림, 음악 속의 이름은 거의 로마식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중요한 이름들은 로마식 표기로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 생생한 예가 태양계 행성의 이름이다. 태양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살펴보면 수성은 메르쿠리우스, 금성은 베누스, 화성은 마르스, 목성은 유피테르, 토성은 사투르누스, 천왕성은 유러너스, 해왕성은 넵투누스인데 모두 로마식 표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국의 구스타브 홀스트는 7곡으로 구성된 관현악 모음곡 ‘행성’(1916)을 작곡했다. 행성의 이름들은 영어로 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전부 로마 신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곡 화성(Mars)에는 ‘전쟁의 신’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집요하게 반복되는 강력한 리듬이 대군의 행진을 묘사한다. 2곡 금성(Venus)은 의외로 ‘평화의 신’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신화 속의 육욕적인 아름다움의 여신이 의미하는 바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화려함이 감추어진 잔잔한 곡인데 화성과 대조를 이루기 위함일 것이다. 3곡 수성(Mercury)은 ‘날개 달린 전령’이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워 공전주기가 가장 빠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어 있다. 익살스런 스케르초풍 곡이다. 4곡 목성(Jupiter)은 ‘쾌락의 신’이다. 올림포스 주신(主神)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나타내는 설명이지만 신의 제왕을 묘사한 곡답게 대규모 편성을 요하는 곡이어서 용솟음치는 기쁨은 물론 위엄까지 느껴진다. ‘행성’ 중 가장 유명한 곡이기도 하고, 꽤 오래전이지만 MBC TV 뉴스의 시그널로 쓰이기도 했다. 5곡 토성(Saturn)은 ‘노년의 신’이란 설명이 붙었는데, 그 원어인 로마 신화의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이며 제우스의 부친이다. 1세대 신이기 때문에 ‘늙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6곡 천왕성(Uranus)은 ‘마술의 신’이다. 우라노스는 태초의 천왕이란 의미처럼 하늘의 신이었다. 그러나 아들 크로노스의 급습을 받고 천왕의 지위에서 쫓겨난다. ‘마술의 신’이란 의미는 태초의 신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벼운 요술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큰 스케일의 마법이다. 7곡 해왕성(Neptune)은 ‘신비의 신’으로 설명되어 있다. 넵투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이며 바다의 신이다. 물론 바다는 신비를 간직한 세계다. 한편으로 홀스트가 이 모음곡을 작곡할 당시에는 명왕성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해왕성이 태양계에서 가장 바깥쪽에 있는 신비로운 별이었다.

참고로 명왕성은 플루토, 즉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이자 지하세계의 신인데 1930년에 발견되어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으로 편입되었다. 홀스트는 명왕성까지 작곡하여 제대로 마무리하라는 제안에 응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는데,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2006년에 명왕성은 태양계의 왜소 행성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여 다른 몇몇 별과 함께 독립된 행성의 지위에서 퇴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의 창세기

신의 계보를 정리한 것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태초의 카오스(혼돈)로부터 모태 신이자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가 생겨나는데 천신 우라노스가 가이아를 덮쳐 여러 자식을 낳았다. 이 자식들이 거인을 의미하는 티탄 족이다. 그러나 원래 서열이 위인 가이아는 우라노스가 늘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꼴을 참지 못했다. 결국 아들 중 막내였던 크로노스가 가이아와 공모하여 잠든 부친의 성기를 자르고 새로이 권좌에 오른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똑같은 방식으로 권좌에서 밀려난다. 자식들이 두려워 아내 레아가 낳는 즉시 자기 뱃속에 넣어버렸는데, 제우스를 낳았을 때는 레아가 강보에 싸서 넘긴 돌을 제우스인 줄 알고 먹어버렸다. 부친 몰래 자라난 제우스는 신분을 속인 채 크로노스의 일꾼으로 일하다가 부친에게 구토제를 먹여 형제자매들인 포세이돈·하데스·헤라·데메테르·헤스티아를 토하게 한다. 그리고 함께 힘을 합쳐 티타네스와 전쟁을 벌인다.

결국 제우스가 이끄는 새로운 신족인 올림포스 신들이 승리하여 패권을 차지하고 티타네스는 대부분 깊은 땅속의 지옥 불에 해당하는 타르타로스에 갇혀버린다. 올림포스 신족의 막내인 제우스가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아버지 뱃속에서 자라지 못한 채 남아 있던 형, 누나들과 달리 정상적으로 성장한 덕에 실질적인 맏이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의 여러 판본을 보면 티타네스와의 싸움 말고도 올림포스 신들이 패권을 잡는 과정에서 두 차례 큰 전쟁이 더 벌어지지만, 후대의 문학·미술·음악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지 못했다. 사실 올림포스 신족과 티타네스의 싸움도 오랫동안 문화적 소재로 다뤄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할리우드 영화에 이용된 편이다. 리암 니슨·레이프 파인스·샘 워딩턴이 주연한 ‘타이탄’(2010)과 ‘타이탄의 분노’(2012) 2부작이 그 예인데, 신화 속 인물 구도를 복잡하게 각색하는 바람에 그리스 신화를 이해하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면도 있다.

인류의 은인 프로메테우스를 다룬 클래식 음악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누가 창조했을까? 이건 명확하지 않다. 제우스 창조설도 있고, 프로메테우스가 창조했다고도 하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 창조설에서는 신의 형상으로 진흙을 빚어 만들었고,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영혼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제우스보다 격이 낮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의 창조자로 더 인기가 높은 것은 올림포스 신족이 대체로 인간을 하찮게 여긴 것과 달리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계속 도움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타네스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다.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의 살코기를 인간이 차지하도록 제우스를 속이는가 하면 다른 동물에 비해 아무런 육체적 우위를 지니지 못한 인간에게 기술을 가리키고, 제우스가 금지한 불까지 훔쳐내어 전했다. 격분한 제우스는 그를 동쪽 땅의 코카서스 산맥에 쇠사슬로 묶어놓고 매일 독수리가 간을 파먹게 하는 벌을 내렸다. 불사의 몸이 된 프로메테우스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오랜 세월 견뎌야 했다. 그러나 결국 제우스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활로 쏴 죽이는 것을 방조함으로써 프로메테우스가 풀려나도록 했다.

프로메테우스를 다룬 음악은 제법 여러 곡이 있다. 우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관현악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1801)이 있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발레음악인데, 서곡을 제외하면 베토벤답지 않게 전개되다가 마침내 장중한 피날레로 마무리된다. 이 피날레 선율은 3년 후 완성된 교향곡 3번 ‘영웅’의 마지막 4악장에 전용되었다.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에게 실망하여 그에게 헌정한다는 악보 표지를 찢어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베토벤이 처음엔 나폴레옹을 19세기의 프로메테우스, 즉 유럽인들을 해방시킬 은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밖에 프란츠 리스트의 교향시 ‘프로메테우스’(1850)가 있고, 알렉산더 스크랴빈은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1911)를 통해 그를 예찬했다. 신비주의자였던 스크랴빈은 이 곡을 연주할 때 빛을 내는 장치를 배치하여 일곱 가지 무지개색과 백색광을 곡의 진행에 따라 스크린, 혹은 합창단의 흰 의상에 투사하라고 표시했다. 곡 자체는 제법 복잡한 내용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핵심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이란 이야기다.

글 유형종
발레·오페라·클래식 음악 등 공연 예술 전반에 관한 집필과 해설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무지크바움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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