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녹음의 탄생,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

황덕호의 JAZZ RECORDING HISTORY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2월 1일 12:00 오전

뉴올리언스 태생의 즉흥 음악, 세계 음악사에 화려하게 입적하다


▲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

토머스 에디슨이 1877년에 발명해 이듬해에 특허권을 따낸 원통형 포노그래프 실린더가 납작한 원반 앞뒷면에 정보를 담은 그라모폰 디스크로 변형돼 에밀레 베를리너에게 특허권을 안겨준 것은 1889년이다. 소리를 녹음해 그것을 저장·재생할 수 있는 인류의 기술은 이때를 시작으로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발전해 대략 20년 뒤인 1910년대 초에 이르러 하나의 포맷을 완성했다. 천연 수지인 셸락으로 만든 지름 10인치의 원반에 한 면당 대략 3분 안팎의 러닝타임을 담아 축음기에서 1분당 78회전하는 이 기록 매체는 이후 30년 이상 음반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음반이 만들어진 1889년부터 그 표준을 완성한 1910년대 초까지, 바로 같은 기간에 미국 남단 뉴올리언스에서 탄생한 재즈는 유사한 기존의 다른 음악들과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고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당시 이 새로운 음악에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 음악보다 먼저 존재했던 블루스 혹은 래그타임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를 연주하고 있는 음악인들은 이 음악이 종전의 음악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를리너가 음반 특허권을 취득한 1889년에 뉴올리언스의 가난한 시칠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도미닉 제임스 라로카(Dominic James LaRocca)란 이름의 아이가 4월 11일에 태어났다는 것은 꽤나 운명적인 일이다. 간단하게 ‘닉(Nick)’으로 개명한 라로카는 자신과 동갑인 그라모폰 디스크에 재즈란 음악을 담은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라로카가 재즈를 녹음하기 이전에도 재즈는 존재하고 있었다. 엔리코 카루소가 프란케티의 ‘들으라 학생들이여’를 자신의 최초 음반으로 녹음한 1902년에 자칭 재즈의 창시자 젤리 롤 모턴은 자신이 뉴올리언스에서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많은 역사가는 이미 모턴 이전에도 몇몇 재즈 연주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최초의 재즈 연주자로 여겨지는 코넷 주자 버디 볼든이 뉴올리언스에서 자신의 첫 밴드를 결성한 때가 1895년이었고, 드러머 파파 잭 레인은 1900년부터 뉴올리언스에서 자신의 밴드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0년 잭 레인의 밴드에서 코넷을 연주한 인물이 바로 닉 라로카였다.

1916년에 라로카는 파파 잭 레인 밴드를 떠나 미시시피 강을 타고 시카고에 도착했다. 이때를 전후로 시카고에는 많은 뉴올리언스 재즈 음악인들이 모여들었는데 시드니 베셰, 토미 래드니어, 웰먼 브로드, 로이 파머, 조니 도즈, 멋 캐리 등 초기의 재즈 명인들이 모두 여기 속했다. 다시 말해 1910년대 후반부터 재즈의 중심지는 뉴올리언스에서부터 시카고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고, 재스(Jass)란 이름이 탄생한 곳도 시카고였다(초기에 쓰이던 이름 Jass는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의 Jazz로 정착했다. 철자가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중 하나는 광고 칠판에 Jass라고 써놓으면 누군가가 장난으로 자꾸 J를 지워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도시에서 닉 라로카는 드러머 조니 스타인이 이끌던 밴드에 합류했고, 이 밴드의 이름은 곧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스 밴드(Original Dixieland Jass Band, 이하 ODJB)로 바뀌었다. 닉 라로카와 에디 에드워즈(트롬본), 래리 실즈(클라리넷), 헨리 라거스(피아노), 그리고 조니 스타인 대신 들어온 토니 스바배로(드럼)로 짜인 5중주 밴드였다.

ODJB는 이듬해 1월 뉴욕으로 진출해 브로드웨이에 자리한 라이젠웨버 레스토랑에서 정기적인 연주를 시작했다. 당시 뉴욕 사람들로서는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이 센세이셔널한 음악은 곧장 음반 관계자들의 귀에 전해졌고, 컬럼비아 레코드는 ODJB가 라이젠웨버에 출연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들과 발 빠르게 계약을 맺었다.

컬럼비아 레코드가 재즈란 새로운 음악에 어떤 가능성을 본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음악을 어떻게 녹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ODJB는 피아노와 드럼, 여기에 세 대의 관악기가 더해졌다. 녹음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대미문의 편성이었다. 당시까지 음반 녹음은 피아노가 반주하는 성악 혹은 현악 실내악이 주종을 이뤘다. 하지만 음반사는 ODJB 같은 5인조 연주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편성이 큰 존 필립 수자 밴드 같은 고적대의 음악도 20세기 초 녹음 기술은 성공적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고적대의 녹음을 통해 당시에는 타악기의 녹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고, 드럼 세트를 나무 조각의 우드블록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ODJB 녹음에 응했다.

우렁찬 타악기의 녹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시의 녹음 기술이 ‘어쿠스틱’ 녹음 방식이란 점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당시의 녹음은 마이크를 통해 소리를 전기 신호로 전환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하는 실제 소리가 대형 관(horn)으로 들어가 연결되어 있는 커팅 바늘을 수직으로 진동시켜 소리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울림이 큰 드럼이나 베이스는 녹음이 불가능했다. 아울러 각 악기 소리의 볼륨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성량이 작은 악기는 관 가까이에 배치하고 소리가 큰 악기는 관에서 멀리 떨어져 연주함으로써 전체 소리의 균형을 잡았다. 그런데 컬럼비아 레코드는 재즈 밴드 음향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상태였고, ODJB가 막상 스튜디오에서 연주를 시작하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세 대의 관악기가 미친 듯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에 녹음은 전부 깨져 나갔다. 그들은 이 녹음이 도무지 음반으로 발매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컬럼비아는 단 두 곡만을 녹음한 뒤 ODJB에게 250달러를 쥐어 주고는 그들을 스튜디오에서 내쫓다시피 했다.

화가 난 ODJB는 일주일 뒤 컬럼비아 레코드의 라이벌 회사인 빅터에 직접 찾아가 녹음을 제안했다. 당시 빅터의 엔지니어 찰스 수이는 새로운 음악 재즈를 어떻게 하든 녹음하고 싶은 호기심과 인내심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연주자 한 명 한 명의 소리를 듣고 관으로부터 적정 거리를 잡아냈으며, 천장에 천막을 설치해 악기의 소리를 적절하게 흡수했다. 그 결과 관으로부터 피아노-클라리넷-트롬본-트럼펫-드럼 순으로 악기가 배치됐고, 피아니스트 헨리를 제외하면 ODJB의 모든 멤버는 동료의 등을 바라보면서 소리를 힘차게 관 속으로 불어넣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1917년 2월 26일 빅터에서 녹음된 이들의 ‘Livery Stable Blues’와 ‘Dixieland Jass Band One-Step’은 역사적인 최초의 재즈 녹음으로 기록되면서 동시에 100만 장의 판매를 기록했다. 그것은 북미 남단 뉴올리언스 태생의 시끄러운 즉흥 음악이 탄생한 지 대략 20년 만에 세계 음악사에 공식적으로, 그것도 화려하게 입적하는 순간이었다.

추천 음반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 ‘The 75th Anniversary’

Blue Bird RCA-Victor 61098-2|1917년 2월 26일~1921년 6월 7일 녹음|
닉 라로카(코넷)/에디 에드워즈(트롬본)/래리 실즈(클라리넷)/베니 크뤼거(알토색소폰)/
헨리 라거스·J. 러셀 로빈슨·프랭크 시그노렐리(피아노)/토니 스바배로(드럼)/클리포드 케언스(보컬) 외

글 황덕호

KBS 1FM ‘재즈 수첩’을 17년 동안 진행하고 있다. ‘평론가’보다는 ‘애호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쓰고, 듣고, 틀고,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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