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발리, 헨델, R. 슈트라우스, 오펜바흐의 오페라에 담긴 제우스의 여인 편력
그리스-로마 신화는 인간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인간적’이란 일반적인 휴머니즘의 의미보다는 신들의 감정이나 행동 양태가 인간의 그것에 가깝다는 뜻이다. 이는 사랑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 하여 강한 남성의 바람기를 합리화하는 말이 있듯이, 최고 신 제우스 역시 가장 많은 여신과 여인을 품었고, 그 결과 수많은 자식을 두었다.
신과 신이 결합하면 그 자식은 신이다. 반면 신과 인간 사이의 자식은 인간으로 간주된다. 물론 보통의 인간을 뛰어넘는 영웅이거나 절세미녀로 묘사된 경우가 많다. 이달에 제우스의 ‘여신’ 편력은 다루지 않는다. 그들과 자식들은 다음 호부터 다룰 기회가 충분히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우스가 여러 여신을 사랑했다는 것은 절대 권력자의 속성으로 볼 때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 흥미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반면 제우스의 ‘인간 여성’ 편력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관계라 할 수 없다. 민망한 표현이지만 이종교배에 해당하지 않는가!
제우스는 변신의 귀재
제우스는 아내 헤라의 감시와 질투를 끊임없이 받았음에도 미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날아갔다. 다만 제우스의 속성인 번개의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타나면 상대방을 태워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변신하여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인간 여성에 대한 그의 편력은 대단히 광범위하지만 이야깃거리로, 혹은 예술작품의 소재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은 아래의 표와 같다. 다만 그 순서를 시대순으로 명확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각지의 다양한 일화가 비체계적으로 축적되고 분화되면서 형성된 그리스-로마 신화의 속성 때문이다.
모친이 인간인데 그 자식이 처음부터 신으로 인정된 경우는 세멜레의 아들 디오니소스(로마신화의 바쿠스)가 유일하다. 그 경위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있다. 테베 공주 세멜레는 제우스의 사랑으로 임신한다. 이를 안 헤라는 세멜레가 의심을 품게 한다. 제우스의 진정한 사랑을 받으려면 그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제우스는 세멜레가 조르기 시작하자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지만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주기로 약속한 상태라 어쩔 수 없이 천둥과 번개에 휩싸인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다. 세멜레는 화염에 휩싸이고, 제우스는 재빨리 그녀의 뱃속에서 6개월 된 아이를 꺼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는다. 디오니소스는 달을 채우고 제우스의 넓적다리에서 탄생한다. 즉, 모친은 인간이지만 제우스가 직접 낳은 귀하신 몸이니 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림포스 12신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이야기는 헨델의 ‘세멜레’(1744)에 다루어졌는데, 헨델이 영어로 쓴 극음악이라 당대에는 오페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라토리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페라로 본다. 줄거리는 신화의 내용과 조금 다르다. 여름에 다룰 예정인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를 접목시켰는데, 제우스가 세멜레를 납치하여 비밀의 궁전에 숨겼으며, 쓸쓸해하는 세멜레를 위해 자매 이노가 방문하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이노로 변신한 헤라는 세멜레에게 제우스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면 여신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꼬드긴다. 이 오페라에는 아주 유명한 노래 두 곡이 있다. 만물이 세멜레를 받들게 하겠다고 제우스가 부드럽게 약속하는 ‘당신이 걷는 곳마다’, 헤라가 건넨 마법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스스로 감탄하는 세멜레의 노래 ‘나 자신을 숭배하게 되네’가 그것이다. 특히 거울 속 자신에게 빠진 세멜레의 모습은 요즘 여성들이 ‘셀카’를 찍는 것과 정서적으로 아주 흡사하다.
작품마다 재구성되는 스토리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다나에 공주를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청동의 방에 가둔다. 딸이 낳은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예언에 놀라 아예 남자의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는 황금비(雨)로 변신하여 청동의 방에 스며들고, 다나에의 사타구니를 파고든다. 클림트의 ‘다나에’가 바로 이를 나타낸 그림이다. 이렇게 태어난 인간 영웅 페르세우스는 수많은 모험 끝에 자신의 의지와 달리 할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다나에의 사랑’(1940)은 대문호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아이디어를 요제프 그레고리가 대본화한 것인데, 신화와는 상당히 다르다. 다나에는 에오스 섬의 공주이며, 왕은 나라가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만드는 미다스 왕을 사위로 맞이하고자 한다. 미다스로 변신한 제우스와 진짜 미다스가 모두 궁전에 도착하는데, 제우스는 미다스에게 초야권을 자기에게 주면 황금의 능력을 평생 보장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다나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미다스가 주문 푸는 것을 잊은 채 그녀를 안는 바람에 공주는 황금이 된다. 제우스의 힘으로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다나에는 전능한 제우스가 아니라 황금의 힘을 상실한 미다스와 함께 궁전을 떠나 오두막집에서 부부로 살아간다. 황금비를 미다스의 능력으로 치환한 아이디어는 기발하지만 ‘다나에의 사랑’은 음악적으로 좀 지루한 오페라다. 그러나 신화를 숙지하고 있는 감상자라면 묘미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제우스가 사랑했던 세멜레·에우로페·알크메네·레다가 옛정 운운하며 제우스 앞에 나타나는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온다.
또 다른 여인 칼리스토는 요정일 수도 인간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여신은 아니다.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로마신화의 디아나)를 흠모하여 그녀를 모시며 처녀로 지낼 것을 맹세한다. 그러자 제우스는 아르테미스로 변신하여 칼리스토와 사랑을 나눈다. 여성 동성애 코드가 풍긴다. 칼리스토는 아르카스를 낳고 그 벌로 곰이 된다. 일반적으로 큰곰자리는 칼리스토, 작은곰자리는 아르카스라고 본다. 몬테베르디 직후의 위대한 바로크 오페라 작곡가 프란체스코 카발리는 ‘라 칼리스토’(1651)란 오페라를 썼다. 바흐가 태어나기도 전에 초연된 아주 오래된 오페라인데, 줄거리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포함된 칼리스토 이야기와 거의 같다.
왕비 레다, 소년 가니메데와도 통하다
제우스의 여인 편력은 처녀에 국한하지 않았다. 유부녀이고 그 신분이 왕비일지라도 절세가인이라면 제우스의 레이더망에 잡히게 마련이었다.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가 그 대표 사례다. 백조를 사랑하는 마음 착한 레다를 차지하기 위해 제우스는 독수리에 쫓기는 백조인 척한다. 레다가 백조를 동정하자 그 틈을 타서 레다의 품속에 파고든다. 이렇게 해서 두 딸과 두 아들이 탄생하는데 그중 두 딸이 잘 알려져 있다. 훗날 스파르타 왕비가 되는 헬레네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가리는 심판에서 승리한 아프로디테가 자신을 도운 심판관 파리스에게 그녀를 선물로 준다. 헬레네의 자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트로이 원정에서 그리스 총사령관을 맡는 아가멤논의 왕비가 되는데, 남편이 참전한 사이 시동생과 눈이 맞아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남편을 살해한다. 그 죄로 친아들 오레스테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레다의 이야기를 직접 다룬 오페라로 유명한 것은 없지만 헬레네가 파리스를 따라 스파르타를 떠나는 이야기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아름다운 엘렌’(1864)에 유쾌하게 그려 있다. 엘렌은 ‘나는 백조의 딸’이라고 노래하는데 그 백조가 바로 제우스임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펜바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아 전작 ‘지옥의 오르페’(1858)에서도 파리로 변신한 제우스가 에우리디체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그렸다. 신화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오페레타에서 새로 창조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내용이 풍부해진 것도 2000~3000년 전에 이런 삽입 과정을 수없이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R.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1909)에 등장한다. 엘렉트라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딸이며 오레스테스의 누나다.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는 그리스 3대 비극작가가 모두 다루었는데, 그중 소포클레스가 오페라의 직접적인 원작자다. 엄숙하고 기교적이며 냉혹할 만큼 감정이 배제되어 도덕적 심판에 관한 작가의 감정은 거의 느낄 수 없다. 여기서 아들보다도 모친에 대한 살의에 불타는 인물은 엘렉트라다. R. 슈트라우스의 이 작품은 이런 분위기를 날카로운 오케스트라로 차갑게 표현하여 ‘잔혹 오페라’로 불리곤 한다.
테베의 왕비 알크메네는 남편에 대한 정조가 굳어 제우스에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결국은 왕이 궁전을 비운 사이 남편으로 변신하여 왕비를 품에 안는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다. 헤라클레스는 신화적 명성과 달리 오페라 소재로는 인기가 없었다. 그가 완수한 12개 과업을 무대극에 담는 것이 오페라의 공식에서 벗어나기 때문인 듯싶다. 카발리의 ‘사랑에 빠진 에르콜레’(1662), 헨델의 영어 오라토리오 ‘허큘리스’(1744)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헤라클레스 신화의 일부만 취급했고 별로 인기도 없다.
제우스는 어쩌다 인간 미소년에게도 사랑을 느끼곤 했다. 그 유명한 예가 가니메데다. 독수리로 변신한 제우스는 트로이의 어린 왕자 가니메데를 올림포스로 납치하여 곁에 두고 술시중을 들게 했다. 원래 청춘의 여신 헤베의 몫이었는데, 헤베는 자기 일을 잃고 인간 영웅에서 신의 반열에 오른 헤라클레스의 아내가 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가니메데 이야기는 같은 제목의 괴테 시에 의한 슈베르트 리트로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가니메데는 천상의 제우스 품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을 벅찬 기쁨으로 만끽하고 있으니 납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글 유형종
발레·오페라·클래식 음악 등 공연 예술 전반에 관한 집필과 해설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무지크바움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