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는다. 음악은 천재의 단독적인 작품인가, 당신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음악은 천재의 단독적인 작품인가, 당신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사회학 | 인간 사회와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연구한다
마리나 마와 존 A. 랄로가 함께 쓴 ‘내 아들, 요요마’를 읽은 소설가 장정일은 흔히 한 가문에서 좋은 음악가가 나오기 위해서는 3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1세대는 자녀에게 양질의 음악교육을 시킬 만한 돈을 벌고, 2세대는 그 돈으로 최상의 음악교육을 받는다. 그러면 3세대에 이르러 걸출한 음악가가 탄생한다. 요요마의 조부들은 1930년대에 자식들을 유학 보낼 만큼 재력이 있었고, 요요마의 부모들은 최상의 음악 교육을 받았으니, 결국 요요마는 두 세대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타고난 천재? 만들어진 천재?
많은 사람이 천재 음악가란 타고나는 것일 뿐 재력의 대물림 끝에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작곡가는 소리라는 재료들을 모아 배치-재배치 과정을 실행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작품 속에 온전히 녹아들지 않는다. 흔히 ‘신의 몫’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음악에는 인간의 기술과 신의 연금술이 공존한다. 이러한 신적 영역을 가장 많이 받은 존재를 우리는 천재라고 하지 않던가. 이러한 천재의 산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지며,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명작을 바라보는 시선’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학적 관점은 다르다. 음악은 사회 속에서 생성되고,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에 기능하는 결과물일 뿐이다. ‘천상’의 고고한 산물이 아니라, ‘세속’의 감염과 물듦과 삼투를 통해 비로소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흔히 “음악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라고 하는 고루한 반영 이론보다 “음악은 사회를 먹는 위장이다”라는 조금 더 과감한 사유. 음악사회학은 그 입에 손을 넣어 음악이 사회의 어떤 것을 먹었고, 소화한 것과 소화하지 못한 것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음악사회학은 이러한 것들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인문적 작업이다. 신으로부터 받은 ‘영감’이 있다면, 그 안에는 사회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음악사회학은 천재 만들기를 위한 미학의 반대학(反對學)일지도 모른다. 이 점에 관해 ‘사회학의 쓸모’를 외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회학은 좋든 싫든 대중이 ‘필연성’이나 ‘자연적 질서’라고 믿고 있는 기반을 무너뜨려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음악가를 통해 읽는 사회 변혁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성공 요인, 가정교육과 환경, 당시 관객들의 음악 기호(taste)와 지식 등을 상호적인 맥락에서 연구하여 1991년 ‘모차르트’를 발간했다. 국내번역본(문학동네)의 표지에는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엘리아스는 ‘타고난 천재’로 인식되는 모차르트에 관한 통상적 견해를 ‘모차르트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천재’라는 명제로 상대화한다. 한 음악가가 태어나는 과정을 사회와 연관하여 서술함으로써 천재 음악가가 품은 반역적이고 저항적인 성격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아직 어떠한 대안적 시장 체계가 완전히 도래하기 이전인데도 왕실 내부에 종속된 낮은 신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일하는 ‘자유음악가’의 지위를 열망한 모차르트의 시도가 그에게 어떻게 경제적 불운을 가져왔는가에도 초점을 맞춘다. 왕실에서 굴욕감과 좌절감을 느낀 모차르트는 더 넓은 일반 대중사회에서 돌고 있는 자신의 인기를 알기에 자신만의 대중연주회와 리사이틀을 준비하고자 했다. 이것은 18세기 빈의 중간계급의 다른 직업과 견주어보건대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모차르트는 이 사업에서 실패했다. 왜냐하면 익명의 일반 대중의 음악 소비, 즉 시장 주도 시스템이 아직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석처럼 경직되고 나태해진 관습과 기존 형식을 파괴하고 확대하려는 창조적 충동은 모차르트의 삶을 관류하고 있다. 우리가 모차르트 개인의 천재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기존 관습과 사회관계는 오직 장애물로만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공기의 압력은 비둘기의 비행을 어렵게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칸트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음악의 창조적 표현은 관습의 형태에 맞서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저항 ‘덕에’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차르트를 천재 음악가로 만든 ‘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차르트가 궁정사회의 시민 예술가라는 것으로 함축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그는 비상한 창조력을 지닌 천재였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정립되는 천재에 관한 개념을 모르던 시대에, 강한 개성을 지닌 천재 음악가에게 내부의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태어난 천재다. 그래서일까. 엘리아스의 사회학적 해석은 “사람들은 역사를 일구지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는 아니다”라는 마르크스의 명언을 모차르트를 통해 연상케 한다.
궁정사회가 시민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순과 갈등 속의 음악가. 티아 테노라도 그의 저서 ‘베토벤 천재 만들기: 1792~1803년 빈의 음악 정치’에서 두 가지 경제적 예술지원 체제 사이의 이행기, 즉 낡은 사적인 후원 체제에서 새롭기는 하되 아직 주도권이 없는 공개 시장의 판매 제도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베토벤을 통해 읽어낸다. 당시 귀족계급은 표면상 일반 대중 연주회지만 실제로는 매우 배타적인 연주회를 즐겼다. 이 연주회를 장식한 것은 귀족계급의 취미를 입증하는-좀 더 낮은 귀족계급 및 중간계급과 뚜렷이 구별되는-진보적 형식의 클래식 음악이었다. 테노라는 베토벤이 이 딜레마를 빈의 상류 귀족계급과의 신중한 협력 전략을 통해 해결했다고 한다.
창조가 아닌 생산
자네트 월프는 그의 저서 ‘예술의 사회적 생산’을 통해 예술작품이란 천재 개인만의 소산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창조’가 밀실에서 신과 영감을 주고받은 ‘1인’에 의한 행위라면, ‘사회적 생산’이란 여러 명의 개인이 모인 장(場)에서 산품(産品)을 생산하는 것으로, 천재의 작품에는 익명의 공동 생산자가 있다는 것을 주시하여 ‘창조’가 ‘생산’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월프가 분석을 위해 선정한 익명의 공동생산자는 과학기술 및 생산 매체와 맺는 관계(예를 들어 인쇄술과 악보, 악보시장의 관계), 예술가들의 훈련과 교육, 지원 공급처와 시장, 후원 제도 등이다. 그래서 월프는 예술 작업을 다른 종류의 산업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스몰은 저서 ‘뮤지킹 음악하기’를 통해 산업사회 이전에는 공동체적 삶 속에서 직접적으로 행해지고 향수되던 음악이 산업화된 사회의 요구에 의해 삶에서 이탈하여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에 따르면 음악을 하는 능력은 ‘말하기’ 능력이 그렇듯 평범한(특별한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닌 능력이다. 우리 자신이 이러한 천부적 능력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대중매체를 장악하거나 그 밖의 사회적 권력을 지닌 이들은 음악을 하는 것이 마치 특별한 재능을 갖춘 소수의 전문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행위인 양 사람들을 속여왔다는 것이 스몰의 주장이다. 그들의 속셈은 음악을 자본주의 시장의 값비싼 상품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음악 전문인들의 희소가치를 과장하여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음악하기’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스몰의 주장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요구가 된다.
돈을 벌면 클래식 음악을 찾는 이유
음악사회학은 묻고, 또 묻는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왜 듣는가라고. 이 답변을 위해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펼친다. 이 질문들이 이 책을 관통하면 이러한 형태로 바뀔 것이다. 자본가들은 왜 클래식 음악을 듣는가라고.
사회학자의 시선을 통과한 음악 소비에 대한 관심은 이른바 교양·소양 쌓기 같은 고고한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베블런은 이러한 감상(소비) 행위는 ‘과시적 소비’를 통해 부와 신분을 드러내려는 유한계급의 욕구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술과 사회이론’을 쓴 오스틴 해링턴도 이러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유럽 상류사회에서 오페라하우스의 기능을 예로 든다. 사람들이 오페라하우스에 가는 것은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다른 사람한테 보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며, 객석의 좌석에 따라 재력과 지위를 과시하거나 또 다른 사람을 염탐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는 것. 또는 귀족 여인의 장신구 노릇을 한 19세기 피아노 음악과 부르주아 가정에서 구애하고 교제하는 일에 이용된 감상적인 예술가곡을 예로 든다.
오늘날 보편적인 취미로 자리 잡은 ‘음악 감상’이라는 행위에 사회학적 현미경을 들이대며 “취미는 분류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라고 말한 이는 피에르 부르디외다. 그는 저서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을 통해 재력, 권력, 학력, 가정교육 수준, 그리고 문화적 아비투스(계급의 관행을 생산·재생산하는 원칙)라 일컫는 것이 취미를 통해 계급간 차이와 시그너처를 어떻게 연출하는지를 보여준다.
부르디외는 세 곡의 음악에 대한 선호도를 검토한다.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부르디외는 응답을 세 부류로 나누어 상위 중간계급, 하위 중간계급, 노동계급 등 세 개의 층으로 구분한다. 부르디외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선호한 사람들이 거의 다 상위 중간계급 직업을 보유한 사람임을 알아낸다. 경영진보다 교육기관에 고용된 사람들이 훨씬 높은 선호도를 보이기도 한다. ‘랩소디 인 블루’를 가장 선호한 사람들은 하위 중간계급 직업을 보유한 사람들로서, 기술자, 엔지니어, 행정직원 등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가장 선호한 사람은 노동계급과 하위 중간계급 직업을 보유한 사람으로서, 육체노동자·소매상인·사무직원을 포함한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 형식적으로 복잡하고 역사적으로 클래식한 작품에 대한 감상은 그에 따르는 절대 지식의 습득에 달려 있으며, 그 습득은 결국엔 문화자본의 소유에 있고, 그 문화자본이란 경제자본의 소유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같은 클래식 음악을 가장 좋아한 사람은 아이들에게 학교의 정규교육 외에도 보충 교육 활동을 시킬 여유가 있는, 비교적 잘사는 중간계급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일찍이 클래식 음악을 접하는 경험을 했음직하다. 게다가 중간계급 가정의 아이들은 노동계급 가정의 아이들보다 악기 연주를 배울 기회가 더 많았을 것이다(그 밖에도 외국어 학습 같은 또 다른 보충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하도록 격려 받았을 것이다).
그에 반해 육체노동자나 소매상인, 또는 사무직원은 높은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소유한 가정에서 양육받지 못했을 것이며, 이후 살아가는 동안에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늘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작품이나 예술적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특별한 지식을 요구하는 음악보다는 라디오 방송이나 텔레비전 같은 대중미디어를 통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악과 음악 형식에 더 반응했음직하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은 이러한 음악 형식이지만, 좀 더 명백한 예는 주류 대중음악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부르디외는 작품에 대한 문화적 지식과 인식 기술의 차이가 결국 계급별 차이로 이어지고, 사회집단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차별화하는 상징적 ‘구별짓기’의 원동력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상이한 계급과 집단은 음악에 대한 선택과 소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타인, 타 계급과 구별 짓는다.
우리는 보통 취미로 음악 감상과 독서를 꼽는다. 오늘날 취미는 직업 이외의 행동이자, 내면에 숨겨진 특별한 기호(taste)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취미는 곧 개인 취향의 반영이다. 그런데 취향이 사소한 기호의 차이가 아니라 계급적 지위를 담는 그릇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음악 ‘감상’과 책 ‘읽기’가 어떤 ‘음악’을 감상하고 어떤 ‘책’을 읽느냐의 문제로 바뀌면, 그 사람의 경제적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표식이 되기 때문이다.
재밌게도 우리에게 ‘운수 좋은 날’로 잘 알려진 현진건의 단편 ‘피아노’는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적 이론을 소설로 변주한 것 같다. 조선의 일제강점기, 부모의 덕으로 날 때부터 수만 원 재산의 소유자가 된 궐의 이야기다. 당시 스무 칸 되는 집을 장만한 그와 아내는 ‘이상적 가정’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서양식 문화가 고급문화로 각광받던 그 시기에 도화심목 테이블을 놓고 주위를 소파로 둘러 응접실을 만든다. 안방은 침실, 건넌방은 서재, 아랫방은 식당으로 정했다. 마루 정면 바람벽 한가운데에는 큰 체경(거울) 박힌 양복장, 그 양편으로는 탁자와 아기자기하게 얹힌 사기그릇과 유리그릇을 놓았다. 식구라야 단둘뿐. 하지만 찬비(반찬을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여자 하인을 일컫는 말)와 침모를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이상적 가정’에 없는 것을 떠올렸다. 피아노다. 피아노 한 대가 집 두 채 값이던 시절. 피아노가 그들에게 행복을 줄 것을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남편의 눈에는 벌써 피아노 건반 위로 움직일 아내의 뽀얀 손이 어른어른했다. 그리고 피아노 한 채가 그 집 마루에 여왕과 같이 임했다. “한번 쳐볼 것 아니오. 이상적 아내의 음악에 대한 솜씨를 좀 봅시다 그려” 하고 사나이는 행복에 빛나는 얼굴을 아내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궐녀의 얼굴은 흐려졌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내에게 “먼저 쳐보셔요” 한다. 서먹서먹한 사나이. “그러지 말고 한번 쳐 보구려.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야 무엇 있소”라고 말하고 한참 뒤, 궐녀는 말한다. “나··· 칠 줄 몰라.” 그러자 궐은 “내 한번 치지”라며 건반 위를 치훑고 내리훑을 따름이었다. 그제야 아내도 매우 안심된 듯이 해죽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참, 잘 치시는구려.”
음악 속 불편한 리얼리티
밀란 쿤데라의 소설 ‘커튼’을 읽은 바우만은 사회학의 소명을 “위장하고 리얼리티를 감추기 위해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찢는 것’”에 비유한다. 음악사에 길이 남은 천재음악가의 삶이나 자연적으로 몸에 밴 취향이라고 믿는 것에 사회학의 현미경으로 들이밀 때, 우리는 ‘불편한 리얼리티’와 마주한다. 마이클 박산달은 ‘회화는 사회관계의 침전물이다’라고 했다. 사회학이란, 음악사회학이란 그 작품을 흔들어 침전물에 녹아든 ‘사회’를 살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