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자율성 없는 통합 속에서 1961년 출범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예총). 애초부터 삐걱거린 그들의 역사를 통해 1960년대 음악문화사를 살펴본다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지만 1961년에 창단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예총)은 국가 권력에 의해 기능하는 집합체였다. 1960년대에 예총을 통해 예술가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군사정권의 미화와 예술을 통한 선전대로 앞장서기도 했다. 이번 호는 예총이 탄생한 1960년대 음악문화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5·16 군사정변을 바라보던 예술계의 시선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5·16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와 시상제도 등이 신설되었다. 당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4월 21일 아침 ‘혁명과업 1년 동안의 업적 소개와 애국심 고취 및 국위선양을 위한 기념행사 계획’을 발표했고, 5월 문예상과 신인예술상, 큰 규모의 예술제를 신설했다. 그해의 “혁명 한 돌을 맞는 5월은 갖가지 국제적인 예술행사와 국내예술제전으로 꾸며질 예술의 달”(경향신문 1962년 5월 1일)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무질서와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세워진 혁명정권이 정치·사회·도덕혁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국민들의 ‘자각 있는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는가 하면, 국민들 또한 5·16 군사정변이 불가피한 것이었다며 지지했다. 국민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재건국민운동본부를 통해 진행되는 각종 개혁과 사업에 기대를 걸었고, 대다수의 음악인들도 소극적 지지를 보냈다. 음악가들은 음악 활동을 비롯하여 정치적 발언에도 제약을 받지 않았다. 개선을 위한 비판적 목소리는 여과 없이 언론에 실렸다. 나운영(작곡)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세워진 혁명정부에 대하여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서의 제언”으로 악기를 사치품으로 치부하는 악법의 폐지, 한국 창작곡을 반드시 연주하기 위한 법령 정비, 국민개창운동의 본격적 전개, 문교부에 음악자문위원회 설치, 음악회 면세와 음악저작권법 시행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상계’는 권두언에서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바로잡는 것이 어렵겠지만,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잘 해결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1961년 5월 문화예술과 관련하여 ‘새로운 예술운동의 모색’이라는 제목의 좌담회를 열었다. 김성태(작곡)와 박용구(음악·무용평론)가 참석하여 과거 정권의 문화예술 전반을 비판하고 새롭게 들어선 정부에게 문화부 신설, 보조금 지원 등을 주문했다. 김성태는 장면 내각의 문교부 예술계 예산정책을 비판하며 교육의 주무부서인 문교부가 문화예술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우려를 표했고, 박용구도 문화부 신설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만든 것은 문화부가 아니라 언론보도 정보, 선전, 선전영화 제작, 인쇄·정기간행물 및 방송에 관한 사무 등을 관장하는 공보부였다. 1961년 6월 17일 포고령 제6호를 공포하여 기존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단체들을 해산시킨 정부는 22일 공보부의 직제를 제정하여 문화예술 담당 부서의 역할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12월 오재경(공보부 장관)과 김창구(공보부 문화과장)는 이승만 정권 아래 예술 조직이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해체시켰다. 이른바 ‘문총’으로 약칭되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는 좌익계와 공산진영에 대응하기 위해 1947년 전국음악문화협회 등 우익계 33개 문화단체가 연합하여 만든 단체였다. 새롭게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이승만 정권에서 활약하던 단체를 해체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정부는 공보부 산하에 문화단체 통합준비위원회를 두고 새로운 이념에 맞도록 예술단체들을 통합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예총의 출범
1961년 12월 29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는 창립대회를 가졌고, 다음 해 1월 사단법인으로 출범했다. 산하의 음악 단체로 한국음악협회와 한국국악협회가 설립되었다. ‘음악’과 ‘국악’이 분리되는 모순된 명칭들이 당연시될 만큼 당시에도 ‘음악’은 서양음악을 뜻했으며, ‘국악’은 이러한 음악과는 다른 것으로 인식되었다.
예술가들의 친목과 권익옹호를 목적으로 1961년 11월 설립된 한국음악협회는 예총 산하기관으로 대한음악가협회와 한국음악단체연합회를 통합한 것이었다. 규모가 컸던 한국음악단체연합회는 한국작곡가협회(회장 김세형), 한국연주가협회(회장 김인수), 한국음악평론가협회(회장 계정식), 한국교육음악협회(회장 이흥렬), 한국관악연맹(회장 박태현), 고려오페라단(회장 서영모), 한국교향악협회(회장 김생려) 등 7개 단체로 구성되었다.
예총의 출범은 정부가 예술계를 효율적으로 통제·관리하기 위해 기존 예술단체를 통폐합한 조치였고,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던 문총의 연장이었다. 많은 언론은 잡음이 많던 문총을 대신해 예술인들이 단합을 모색하고자 예총을 창립했다고 보도했고, 음악계에선 박정희 의장의 지시에 따른 통·폐합이 예술계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 및 단합을 가져올 것이라며 지지했다.
예총 이사장으로 유치진(극작·연출)이 선출되었고, 윤봉춘(영화감독·배우), 김환기(화가), 이유선(테너·음악평론) 세 명이 부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유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로 기억되는 1948년 ‘춘희’ 공연을 올린 이인선(테너)의 동생으로, 1957년부터 1976년까지 중앙대 교수 및 테너로 활동하는가 하면 ‘한국양악 80년사’(1968) ‘기독교음악사’(1977) ‘한국양악백년사’(1985)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훗날 예총의 결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해방 후 십여 년간 일을 해왔으면서도 부질없는 악단의 실태와 분열로 인한 부진은 이 모두가 다 정부나 사회의 경제적 뒷받침이 전무했었음에 기인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에 분산된 문화단체를 개별적으로 우선 통합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될 것이다. (···) 중요한 설계로서는 사회법인체화(준비완료), 연주, 창작, 교육, 음악문화사절 및 연주가, 국제교류, 외국연주자 초빙, 국제회의 및 국제음악경연 참가, 음악콩쿨(특상으로 해외파견), 저작권 옹호 시비 등 허다한 과제가 있다. (···) 이제는 실현성이 농후함을 주저 없이 말하고 싶다. 우리는 1962년을 ‘음악의 최고의 해’로 만들려고 온갖 힘을 경주하련다.”
예총은 1962년 1월 18일과 19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창립기념종합예술제를 가졌다. 국악에는 박귀희, 김소희 등이 참여했고, 양악에는 KBS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KBS합창단, 대한합창단, 김몽필(지휘), 성악가 황병덕, 김천애, 서영모 등이 참가했다.
예총의 출범과 함께 대다수 음악가는 10여 년에 걸친 갈등이 해소되었다며 앞으로 국제음악협회에 가입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성태(작곡)는 “십여 년간 무의미하게 분열되었던 음악인이 한국음악협회라는 이름 아래 한 덩어리로 뭉치게 되었다”며, “5·16혁명의 쾌거로 음악계에 새나라 건설과 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유선도 “연주단체는 음연(한국음악단체연합회)과 음협(한국음악협회)이 서로 갈등을 보이다가 1958년 초에 이르러 통합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여의치 않고 (···) 아직도 단합되지 않던 차 5·16혁명 후 공보부 문화시책에 의하여 통합하고 모든 단체는 예총 산하 단체로 가입”되었다고 했다.
당시 음악계는 해방 이후 체계를 잡지 못하며 갈등을 겪고 있던 처지라서 음악가들은 이러한 ‘통폐합’이 정권의 ‘통제’ 조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조직화’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박정희는 단순히 통폐합에만 그치지 않고, 예총이 각종 지원과 음악제 개최, 악단 조직, 음악상 제정 등의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도록 지원했다. 이를 통해 음악계를 비롯한 예술계는 예술을 정치적으로 수단화하거나 정치·경제 영역처럼 국가 통제 아래 두려는 의도라기보다는 발전을 위한 조치로 이해했다. 유치진(극작·연출)이 최고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던 박정희를 방문했을 때에도 박정희는 “문화예술단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것이며 문화단체들도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예술계와 예술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진보 성향 예술지인 ‘한양’도 군정(軍政)의 이 같은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뒤표지에는 군사혁명 공약을 실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예술정책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예총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활기를 띠는 것 같았다. 1962년 예총은 금년 사업계획 결정을 보고했는데, 예총 산하 한국음악협회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 발간, 작곡 전집 간행, 창작오페라 공연 등의 명목으로 예산을 받기도 했다.
흔들리는 예총
하지만 출범한 지 몇 달 만에 ‘예총 이전, 보조비 안 나와 비명’(조선일보 1962년 6월 21일) ‘예산 없어 허덕이는 예총, 마치 개점휴업 상태’(조선일보 1962년 7월 23일) 등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혁명정부가 모처럼의 성의를 가지고 분파 알력에 허덕이던 예술단체를 통합하여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무용, 건축, 사진, 연예, 국악, 영화협회 등 각 회원 단체를 망라하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를 창립하였는데 오늘날 예총은 극심한 예산궁핍으로 인하여 개점폐업상태에 놓여 있다. 금년 1월 5일에 창립된 이래 지난 6월 20일까지 예총이 공보부로부터 보조받은 예산이란 불과 70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조선일보 1962년 7월 23일)
예총은 “문화예술인들의 혼연한 참여로 이루어진 대동단결과는 거리가 먼 일부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성립에 있어서 산파역을 맡았던 공보부로서도 아무 원칙이 없었고, 결성에 동원된 각 분야의 예술·문화인들 역시 이렇다고 할 방법론 없이 그저 피동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결성은 무작정한 단합이나 통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의 핵심은 4·19 또는 5·16혁명정신에 의한 개혁이 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그 점이 도무지 도외시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동아일보 1962년 5월 17일)
출범한 지 1년 후인 1963년. 예총은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주요섭(소설가), 박목월(시인), 조동화(무용평론가), 이봉상(동양화가), 김환기(화가), 한규동(음협 부이사장), 이유선(음악평론가)은 ‘예총은 무엇을 했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힘을 모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동아일보 1963년 1월 23일)
“공보부의 홍보 사업으로 이용”되는 예총
주요섭은 “예총이 한 일이란 거리에 돈을 뿌린 가장행렬뿐”이라고 비판했다. 부이사장직을 맡아 내부자 격인 이유선도 “문화단체에 끼친 공과는 뚜렷이 보이지 않”으며, “각 개인과 단체 등의 자의에서 조직된 예총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계의 융화, 단결이 완전하게 이룩되었다고 보아지지 않는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게다가 “자활 능력 및 자주성이 없는 한 현 예총 기구의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지지 않는”다고도 평했다.(동아일보 1963년 1월 23일)
‘‘일하는 예총’의 구호는 좋으나. 적은 예산에 고민’이라는 기사는 예총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기총회를 앞둔 예총에서는 책임개선과 사업 계획 등의 중대한 문제를 조상에 놓고 현재 최의(最議)에 대비할 여러 가지 문제를 준비 중에 있는데 예총이 작년도처럼 통합하는 단체로부터 일하는 예총이 되기 위하여 7천만 원의 규모로 된 사업계획을 세우기로 했으나 또다시 개점휴업인 예총이 되지 않을까 일반의 기우심도 없지 않다. (···) 공보부가 금년도부터는 모든 정부주최의 문화행사를 예총으로 전적으로 넘기겠다고 다짐했던 사업들도 아직 그 이행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어 결국 사상누각격인 사업계획이 되지 않는가 보는 측도 없지 않다.”(조선일보 1963년 2월 1일)
이런 상황에서도 예총은 1963년 6월 28일에 예총회관 기공식을 가졌고, 그해에 예총회관을 개관했다. 300평 규모에 지상 8층, 지하 1층 규모. 하지만 운영난은 여전했다. 10개 산하 단체에 속한 130여 명 직원의 월급이 밀렸고, 이사진은 총사퇴를 결의했다.
“공보부 손으로 만들어지고 키워지기로 되었던 예총은 계획되었던 여러 사업이 예산 관계로 실현되지 못하고 더욱 예총이 공보부의 홍보 사업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왔고 권위마저도 상실했다는데 예총의 근본적인 결함이다. 그러므로 개점휴업 상태인 예총의 해체까지 주장하고 있다.”(동아일보 1963년 12월 27일)
예총과 비슷한 예는 나치 집권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33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자신의 ‘집권’을 ‘문화혁명’으로도 인식했고, 나치 체제에 대한 순응 또는 편입은 음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따라 나치 정부는 1933년 9월 22일을 기해 민족 공동체의 개념으로 작가, 언론인, 방송인, 연극인, 음악가, 미술가, 영화제작자들이 소속된 각 협회를 7개 국(局)으로 구성된 ‘제국문화원’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국가적 강제기구로 통합했다. 그리고 민주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문화 이념을 철저히 ‘민족적’인 이념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국민계몽선전부의 산하 부서로 만들었다. 1933년 11월 1일에 제국문화원의 하위 부서로 공식 설치된 ‘제국음악국’은 음악계 개혁을 위해 독일 음악가들을 직업군에 따라 통합하는 역할, 다시 말해 조직적인 차원에서 음악가들을 정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어떻게 보면 제국문화원과 예총, 예총 산하의 한국음악협회와 제국문화원 산하의 제국음악국은 비슷한 성격과 기능을 지닌 집단인 셈이었다.
“관제(官製)와 아마추어리즘”의 피로
군사정변으로 인한 경직된 사회 분위기에서 군사정권은 자신의 정통성을 미화할 예술이 필요했다. 5·16 이후 음악 분야에서 양적으로 늘어난 것은 음악제, 국제교류를 위한 몇몇 연주회, 각종 포상제도였고, 이러한 것들은 5·16을 기념하기 위한 국가의 문화정책의 하나였다. 1962년에는 5월 문예상과 신인예술상이 신설되었는데, 신인예술상은 “공보부가 주최하고 군사정부가 새로이 정비시킨 예총이 주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제 갈 길을 가지 못했다.
“1년 전의 내부 의욕과 추진력은 벌써 꿀꺽 시든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상금이 덜썩 깎이고 있었다. (···) 그러자 응모자의 수도 현저한 내리막길을 보였다. 이미 신인상 경연은 매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권위도 전망되지 않았다. 새로운 재검토와 운영의 결정적인 혁신이 없는 한 시시한 또 하나의 관료적인 형식적 업적에나 계산될 뿐 기대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일부의 예리한 논평이었다. 신인상의 신인이란 말도 차츰 지극히 모호하다는 중론으로 퍼졌다. (···) 결국 신인예술상 경연은 공보부의 행적과 예총 기구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리고 전근대적인 문화예술인의 관제 계급 산지로서의 쇼로 되고만 것이다.”(경향신문 1964년 3월 12일)
예총은 왜 이렇게 흔들렸던 것일까. “문화예술단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것이며 문화단체들도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동아일보 1962년 1월 25일)”고 강조한 박정희와 그 정부는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듯싶다. 1961년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정권을 잡은 지 2~3년이 지나면서 예술계는 ‘관제(官製)와 아마추어리즘’에 의한 피로도가 극도로 높아져 갔다. 이는 5·16 군사정변의 성공으로 권력을 잡은 정권의 정책이 ‘조국근대화’에만 있었고, 구체적인 문화정책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화예술과 관련된 정책 역시 공보부를 통한 전시 효과만을 위한 것이거나 권위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선진국가의 것과 비교하여 이쪽의 문화정책은 구체성에 있어서 크게 어긋난 것이요, 또 그 때문에 정책적인 의욕의 면과 비하여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고 또 어느 의미에선 (···) 역효과까지 파생시키는 실패로 돌아가고만 결과도 낳게 되었다. 다른 행정 분야에서도 그런 맹점이 있는 줄 알지만 특히 문화정책에 있어서 군정부가 착각을 한 것은 문화예술의 행진도 전장(戰場)의 강행군과 같은 명령과 복종의 직선관계로써 되는 줄 안 점이다. (···) 내가 비평가의 입장에서 우리 제작계를 돌아볼 때에 지난 2년간의 작품들을 차라리 수년전의 작품들보다도 후퇴한 인상을 받는데 그 기본원인은 작가 시인들의 자발적으로 의사 발표를 하는 자유성에 대한 회의와 불안감, 그래서 작품 하는 의욕과 패기가 상실된 때문이다. 그런 압박감과 불안성을 조성한 것에 대해서는 과거의 문화정책이 크게 책임져야 한다. (···) 인도주의 행동도 반혁명의 행위로 보고 그것을 ‘체크’하고 명단을 만들고 감시를 계속하는 일들이 상당히 노골적으로 가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불순한 간섭수단은 엄격히 규명되어 해제되어야 한다. 요컨대 문화예술의 독자성을 해치는 간섭 등의 일체의 정치성은 깨끗이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백철 ‘군정의 문화정책비판’, 동아일보 1963년 12월 16일)
백철(문학평론)의 주장은 군사정권의 획일성, 경직성, 비민주성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지나친 간섭과 권위주의, 통제와 억압, 그로 인한 예술가의 창작의욕 상실은 예술이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주었다. 결국 언론은 “군정(軍政) 문화유산”이라는 표현과 함께 “문화계에 햇볕이 들리라곤 아무도 기대하지 않으리만큼 사람들은 정치에 시달려왔다”라고 비판했고, 예총을 산하에 둔 공보부도 “관제(官製) 문화활동이 문화계의 빈축을 사기가 일쑤였다”.(동아 1964년 12월 16일)
이러한 상황 아래 정권의 쿠데타 미화 행사에 동원되는 예총의 존재와 진로 역시 주먹구구식이었고 갈피 또한 잡지 못했다. 정권에 의하여 통합된 그들의 역할이란 국가의 행사나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업적 미화 및 홍보의 장에 동원되거나 그러한 역할을 기다리는 ‘피동’의 존재였다. 예를 들어, 1964년 8월 15·16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가진 8·15 경축예술축전에는 예총 산하 기관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었다. 참여한 회원 수는 총 361명. 음악에는 서울합창단, 조념(바이올린), 이규도(소프라노), 장영(테너) 등이 출연했고, 국악에는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성금연, 안비취, 이소향 등이 출연했다.
또한 1965년 3공화국 수립 2주년 경축예술제, 한·일 협정, 3선 개헌, 10월 유신 등을 지지하는 각종 성명서 발표와 행사 유치를 진행하기도 했다. 예총은 민간단체였지만 이처럼 국가적 성격을 띠며 군사정권의 행보에 부합하며 움직였다.
창작의 시녀가 아닌 국가 홍보의 시녀
당시의 정부는 실질적 국가 권력을 의례나 공연의 형식을 통해 유지하는 ‘극장국가(theater state)’에 가까웠다. 이것은 통치자의 정치권력이 일정한 정치제도가 아닌 권력을 과시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러한 국가의례 진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퍼포먼스적 진행과정을 의식하여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극장국가’라는 연극적 개념을 사용했다. 1960년대 정부의 문화정책은 지원과 동원을 통해 빈약한 문화를 양적으로는 풍성하게 했고 외형상으로 활성화되는 듯 보인다. 예총 산하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이유선(음악평론·테너)은 1968년 출간한 ‘한국양악 80년사’에서 1960년대 음악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1960년대의 학생봉기에 의한 4월 혁명, 그리고 1961년 5월 혁명은 한국의 정치사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문화 학문 전반에 걸친 질서의 진도를 가져왔다. 4월 혁명은 근대적인 독재의 씨를 뽑았고 5월 혁명은 그릇된 민주주의로 인한 방종과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러나 5월 혁명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결과는 민족주의의 불길이었다. 지난날 동학혁명이 그러했듯이, 이제 우리들 자신을 긍정하고 우리들 자신의 디딤돌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싹텄다.”
하지만 5·16에 대한 정부의 홍보 차원에서 진행된 여러 정책과 사업은 시작만큼 많은 부작용을 안고 있었다. 또한 정치적 흐름에 의해 진행된 간헐적인 정부 지원은 해외 음악의 주체적 수용이나 국내 악단(樂壇)의 자생력 강화보다 기능적이고 외형상의 효과만을 추구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1963년 설립된 공보부가 1968년 정부의 조직 개정에 따라 문화공보부로 확대·발족되면서 문화국과 예술국이 설치되어 전문적인 행정체제를 비로소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의 문화공보부 예산은 국가 예산총액의 1.1~1.2%에 머물고 있었다. 이것을 문화(37.7%), 예술(6.9%), 공보(55.4%)로 나누었는데, 절반 이상이 정부 홍보비용임을 알 수 있다. 가시적 선전과 전시행정, 한마디로 보여주기식 행정의 군사문화가 문화정책의 빈약화로 이어진 것이다. 민간과 다양성에 의한 문화예술 진흥이나 성장은 불가능한 채, 관제(官制)적 성격의 예술만이 기능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8년에 “고유문화의 가치체계화와 설정된 가치 위에서의 새로운 문화 창조”를 문공부의 목표라고 전제한 홍종철 장관은 “창작활동의 시녀로서 문화육성의 행정적 뒷받침을 담당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동아일보 1968년 9월 7일), 문공부가 예술창작의 시녀가 된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이 국가의 시녀가 된 셈이었다.
1968년 문공부는 최남선의 신시(新詩)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지 만 60년째가 되던 이 해를 ‘신문화 60년’의 해로 정하고, 그해 10월을 문화의 달로 정했다. 이에 따라 예총은 세미나, 연극대합동공연, 연예제, 아시아 사진예술단체연합회 2차 총회 및 13개 반공국가촬영대회, 문협회지 ‘월간문학’ 발간 등을 진행했고, 기념 표창식도 예총 주최로 11월 21일에 국립극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비판을 면치 못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15개의 신문화 60년 기념사업은 전시효과에 지나치게 편중했고, 그나마 예총의 10개 산하단체가 기왕에 연례적으로 벌여온 것이 대부분이라는 평. 새로운 사업이란 (···) 몇 가지에 불과하다.”(동아일보 1968년 9월 7일)
“문화의 달을 보내면서 푸짐한 문화행사만으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해서 그 참뜻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문화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데서 문화의 달의 의의를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경향신문 1968년 10월 28일)
유명무실한 예총
예총의 ‘1960년대’는 한마디로 오합지졸이 끌고 간 시간이자, 단체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이념이 부재한 시간이었다. 앞서 나치 시기의 제국문화원을 예총과 비교했는데, 제국문화원이 받았던 비판 역시 예총이 면치 못하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가는 곳마다 제국문화원의 방향 상실을 한 목소리로 성토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방에서도 문화원에 오합지졸이 모여 있음을 알고 있다.”
예총 산하 음악계와 음악가들은 늘 ‘어정쩡하게’ 동원되었다. ‘서양음악’이나 ‘클래식 음악’이라 불리던 음악문화는 대부분 창작(작곡)보다는 기존의 곡을 연주(행위)하는 것이 주였고, 그렇다보니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담지한 작품 생산보다는 화려한 스펙터클을 연출해야 하는 행사의 볼거리를 위하여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의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처럼 프로파간다 기능에 맞게끔 곡을 지능적으로 선곡하여 연주한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국내 음악가들의 연주력과 반경이 협소했던 것이다.
예총 해체론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 것은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 몰락한 1980년이었다. 당시의 비판들을 분석해보면 예총이 고수해온 정치적 성격이 뚜렷이 드러난다. 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을 지낸 박용구는 논쟁 당시 “6·25전쟁으로 문총이라는 목적단체는 그 역사적 임무가 벌써 끝났으므로 그 후신인 예총의 존립목적은 상실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폈다. 해방 후부터 전쟁 이전까지는 좌·우익이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전쟁 후 남북이 갈라진 다음에는 남쪽에 우익만 남게 됐으므로 ‘좌익에 대응’한다는 명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권과의 유착 관계도 문제가 됐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할 당시 홍사중(문학평론)은 “예총이 계속 한국문화 예술계의 대표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예술의 자유를 지상의 생명으로 삼는 예술가의 자긍심을 위해서나 문민정부의 명예를 위해서나 조금도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고 비판했다. 예총이 정부행사 때 동원되어 앞장섰을 뿐 아니라, 문화예술과 관련 없는 정치적 사건에도 무분별하게 정권을 옹호하는 성명을 남발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예총은 1965년 한일협정, 1969년 삼선개헌, 1972년 10월 유신에 대한 지지성명을 했으며, 1980년 봄에는 군복도 벗지 않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1987년 4·13 호헌 조치를 지지했고, 두 달 후의 6·29 선언에 대해서는 지지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예총 옹호론으로는 “분단 상황에서 북측의 통일된 문화예술계에 대응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입장과 “예술인들이 심사숙고해 만든 단체이니 해체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 그리고 “엄연히 존재하는 단체이니 문제가 있으면 개선하면 된다”는 입장 등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논리로 따지면 구식의 발상일 뿐이다.
1993년 11월 ‘객석’은 ‘관주도 예술단체, 이래서 개혁 필요하다’라는 기사를 마련하여 “5·16 쿠데타 후 정권의 문화예술 장악을 위해 발족됐고, 이후 적지 않은 정부의 지원 예산을 받으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발 빠르게 협조해온 과거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며 예총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에 들어가기도 했다.
“예총이 지금처럼 안정되게 지급되는 문예진흥기금을 받아 안이하게 되풀이되는 치루기식 행사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예총은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예술인들의 권익옹호나 정책개발에 대한 압력집단으로서의 기능은 예술인 스스로 자율적인 단체를 만들어 힘을 모아간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월간객석 1993년 11월)
1961년 출범 때부터 예술의 자율화와 다양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고수해온 관제적 성격과 정부 정책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과 동원되고자 하는 피동의 움직임은 오늘날 예총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하는 암묵의 원인으로 작동했다. 예총이 정관상에 밝히고 있는 목적은 “예술문화인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그 권익을 옹호”하는 데 있다. 그러나 예총이 생긴 이래 연례적으로 벌어지는 감투싸움은 예술계의 상호친목을 해쳤으면 해쳤지 강화시키지는 않았고, 군사정권 이래 계속돼온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대해서도 예총은 침묵으로 일관했던 게 사실이다. 예술인의 가장 기본적인 권익은 유사성과 통합보다는 개성과 다양성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총과 같이 예술계를 총망라한 조직은, 일부 사회주의국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채택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예술에 대한 관제화와 통제의 욕망, 그리고 그에 속하려는 피학적 욕망은 예총의 역사에 이처럼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