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 ①

ACROSS THE 1960's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6월 1일 12:00 오전

천재 소년·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등장. 김영욱·정경화·강동석 등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탄생과 언론의 주목. 1960년부터 5년 간 한국 바이올린계를 둘러싼 연주·교육·콩쿠르·유학 환경을 살펴본다

 
천재 소년·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등장

김영욱·정경화·강동석 등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탄생과 언론의 주목.
1960년부터 5년 간 한국 바이올린계를 둘러싼 연주·교육·콩쿠르·유학 환경을 살펴본다

“십대의 소년 소년들(…)은 허다한 교습소에서 대량으로 양성되고 있으며, 기술면에서는 벌써 기성음악인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어 계절마다 이들의 연주회가 직업음악가의 연주회수를 상회하고 있는 형편이다.”(전봉초(첼로), ‘한국에서의 연주가의 가치’, 경향신문 1960년 10월 13일)

1960년대에 김영욱·정경화 등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학생 신분을 넘어 정식적인 연주자로 국내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음악에도 천재, 준재(俊才), 영재 등의 개념이 생겼고, 음악교육의 시기도 갈수록 앞당겨졌다. “혹시 우리 아이도…?”라는 궁금증과 함께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서울 가정을 중심으로 음악교육과 유학의 붐이 불기도 했다. 그 열기의 중심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있었다.

1960년대부터 1964년까지의 5년간, 한국에는 학생이 아닌 ‘어린’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주목과 함께 천재·영재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 유학 붐은 이에 대한 결과이자 천재·영재 개념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김영욱을 필두로 정경화·강동석·김남윤·강효 등이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영욱은 휘문중, 정경화는 이화여중, 강동석은 대광중 출신으로 세 사람 모두 줄리아드·커티스 음악원을 다니면서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가 되었다. 이번 호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의 한국 바이올린계를 살펴본다(인용 기사는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다).

김영욱의 독무대

1960년대 초반은 김영욱(서울대 교수 역임, 현 초빙교수)의 ‘독무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60년, 서울 휘문중 1학년에 재학 중인 13세의 김영욱은 임원식/KBS교향악단과 하이든 바이올린 협주곡, 14세에 임원식/한국교향악단과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소년 바이얼리니스트 김영욱군(…)은 당년 14세, 휘문중학 2년 재학 중으로 8세 때 전국초등학교 음악콩클에 1등으로 입상한 재동이다.”(경향신문 1961년 5월 26일)

여기서 말하는 ‘전국초등학교 음악콩클’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이화경향음악콩쿠르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를 역임한 내과의 김승현(1911~1993)의 6남매 중 막내라는 수식어는 그의 연주 소식을 전하는 기사마다 따라붙었다. 클래식 음악 마니아였던 모친 이현경도 루돌프 제르킨이나 번스타인 등 해외 음악가들이 내한하면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한옥의 자택에서 정갈한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사남 김영욱 위로 장남 김영식은 UC버클리대 교수, 차남 김영기는 미네소타대 교수, 삼남 김영무는 김&장 법률사무소의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모친의 품에서 잠들었던 김영욱은 생전의 모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어머니는 제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여섯 살부터 장안의 유명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매일 세 시간 이상씩 레슨을 받게 했어요. 꾀를 부리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드셨죠. 유학을 떠나면서 ‘이제는 해방이구나’하는 생각이 앞서더라고요. 자녀교육 만큼은 양보가 없으셨던 어머니는 해외를 돌아다니며 연주생활을 하는 제가 안쓰러웠던 듯 종종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이주호(바이올린 제작자)는 당시 어린 영욱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선생이 임원식과 원경수였다고 회상했다.

1961년 휘문중 2학년이던 김영욱은 서울예술고 1학년에 재학 중인 누이 김덕주(피아노)와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 신문기자협회의 초청으로 덴버 심포니와 함께 하는 공연 참석차 출국하기도 했다. 언론은 ‘천재남매 도미’(경향신문 1961년 6월 20일)라는 제목을 내걸었다.

1960년 이화여중 재학 중이던 김덕주는 그해에 루돌프 제르킨(피아노)이 내한했을 때 임원식(지휘)의 소개로 그 앞에서 연주를 했다. 제르킨은 김덕주를 보고 즉시 “내가 개런티해서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시키도록 하겠다”고 장담했고, 15세 나이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또한 김영욱의 연주에도 “나는 바이올린 전공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커티스 입학은 전혀 문제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김영욱 역시 김덕주와 함께 입학하게 되었다. 이후 1963년, 김영욱은 필라델피아 교향악단과의 연주하기도 했다. 당시 커티스 음대 학장이던 제르킨의 초청으로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가 되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학교에 재학중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15=의학 박사 김승현 사남) 군이 12일 전미국에 방송되는 WCAU TV를 통하여 유진 올만디 지휘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게 되었다. 하오 9시부터 10시까지 한 시간 동안 방송되는 (…) 이 프로는 비데오 테이프를 이용하여 이미 녹음·녹화가 완료되어 있는데 지휘자 올만디 씨는 프로 내용과 함께 두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를 전미국의 시청자에게 친절히 소개하게 된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홀인 아카데미 어브 뮤직에서의 특별 초대 연주를 그대로 녹음·녹화하여 방송하는 이 프로에서 김영욱 군은 랄로의 서반아교향곡 제1악장을 (…) 연주한다. 김 군이 세계 굴지의 교향악단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영예를 차지하고 또한 아홉 살 때부터 동 교향악단과 공연한 경력을 갖고 (…) 김 군이 금년 3월 18일에 있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청소년 오디션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뽑혔었기 때문이다. 바이올린부 1명 김군, 피아노부 2명, 관악부 1명이 뽑혔던 청소년의 등용문인 이 오디션에 이어 김 군은 3월 22일에 올만디의 청으로 아카데미 어브 뮤직에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시청회를 열었었다.”(동아일보 1963년 9월 12일)

교육이냐, 경쟁이냐

1960년대부터 대도시를 중심으로 기악 레슨 붐과 유학, 각종 콩쿠르의 증가 현상이 불어닥쳤다. 특히, 1968년을 전후로 전 시기에 비해 연주회 수가 약 20% 증가한 것을 보더라도, 당시 서양음악 연주의 양적 성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경제적 안정을 얻은 계층이 늘어나면서 이를 자본으로 한 음악 인력의 증가라는 현상이 생겼고, 자녀들의 예술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김동진(작곡)은 ‘음악교육은 재능아만 되는 것 아니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장래에 음악가로 대성하기를 원한다면 4~5세 때에 피아노를 시작할 수 있는데 처음에 악보를 가르치는 것은 무리이며 아는 노래를 피아노로 치도록 하고 또 피아노를 만지고 치는 것이 어린이에게 재미나는 장난처럼 생각되도록 노력하여 악보를 배울 수 있는 지각이 생길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경향신문 1960년 7월 26일)

김동진의 논조는 “음악이란 어린이들의 정서 교육상 필요한 것”이라며 보편적인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음악가로 대성하기를 원한다면 4~5세 때에 피아노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당시 음악 교육에서 조기교육 붐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직관할 수 있다. 한편, ‘정서적인 가정생활’이라는 글은 정서 함양을 위한 음악 교육의 과잉이 낳은 부작용을 보여준다.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 억지로 가르쳐 소질이 있거나 없거나 강요하는 것을 정서교육이라고 자처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 거기에는 다분이 허영이라는 불순한 감정이 포함되었을 뿐(…).”(경향신문 1960년 10월 26일)

위의 김동진의 글에서 볼 수 있는 부모의 ‘조기교육’ ‘강요’ ‘대성’ ‘허영’을 부추기던 불씨는 1960년대 급속도로 번진 각종 콩쿠르에도 원인이 있었다. 1965년 12월에 창간된 ‘음악생활’(국민음악연구회 출간. 1966년 폐간)에서 박용구(평론)는 김영욱과 정경화가 미국 무대에서 거두는 성과를 보며 “이러한 사실을 계기로 우리나라 각종의 음악교사들의 책임도 아울러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 바 있다. 그 책임이란, 즉 음악 영재의 발굴과 육성이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에서 정석으로 공부한 인력이 1990년대 들어서야 자리를 잡았기에 1960년대에 이러한 ‘책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력은 별로 없었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콩쿠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콩쿠르가 영재 ‘발굴’이나 ‘격려’보다 ‘경쟁’과 ‘입시’의 장이 되어가는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한편으로 콩쿠르는 재능과 끼를 분출하고 발견할 수 있는 장이었고, 콩쿠르를 통하여 배출된 스타와 그들을 향한 지원은 자라나는 음악학도들에게 꿈과 도전 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했다.

바이올린계의 새싹을 찾아라!

누구나 ‘제2의 김영욱’을 꿈꿨지만, 그 누구도 ‘제2의 김영욱’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바이올린 학생들은 콩쿠르를 통해 자신의 꿈을 키워갔다.

1960년에 콩쿠르의 증가는 물론, 기존 콩쿠르도 경연 부문을 다양하게 개설했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화경향음악콩쿠르는 이화여고 신봉조(교장)와 같은 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임원식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에 창설되었고, 1960년대에는 ‘전국 국민교 아동음악콩쿠르’라는 명칭으로 진행되었다. 제1회는 1952년 11월 이화여고의 부산 임시 교사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청주사범부속초등학교 6학년생으로 제1회에 참여하여 2등을 차지한 신수정(피아노)은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제1회 참가자는 대부분 서울에서 피난 온 초등학생들이었고 지방 출신은 극히 드물었다. 나는 비가 온 뒤 진흙으로 변한 땅을 밟고 이화여고 가교사인 텐트 속에서 피아노를 쳤다. 참가자 중에는 정명훈 씨의 형제인 명근·명소 씨 등이 기억난다. 정명근 씨는 바이올린 부문 2등을 차지했다. 그들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는 연주를 앞둔 내 손을 꼭 잡고 ‘왜 이리 차가우냐’며 녹여주었다. 그때는 예선과 본선곡이 모두 자유곡이었다. 피아노 1등을 차지한 김덕주 씨(당시 초등 1학년, 김영욱의 누이)는 앙증맞게 바흐 곡을 쳤고, 그와 동갑으로 5등이었던 이경숙 씨(현 연세대 명예교수)는 심사위원석에 자신이 연주할 바흐 인벤션 악보를 제출하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당시 신동 소리를 듣던 한동일 씨는 나와 같은 6학년이었는데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했다. 곡이 너무 대작이어서였을까. 그는 3등에 그쳤다. 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와 멘델스존의 ‘뱃노래’를 쳤는데 그때 받은 은수저 두 벌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1960년대에 이르면서 이화여중·서울예술고와 경향신문사의 공동 주최, 서울시 교육위·문교부가 후원을 하면서 이화경향음악콩쿠르의 규모는 더욱더 커졌다. 이화여중과 서울예술고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유는 두 학교가 당시 같은 재단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본래는 초등부만 있었으나 중·고등부와 대학부도 차례대로 신설되었다.

1960년(제9회)에는 ‘전국 국민교 아동음악콩쿠르’라는 경연 명을 내걸었다. 바이올린을 비롯해 피아노·첼로·플루트·성악 부문을 두었고, 각 종목별로 1·2·3등을 수여하고 장학금과 연주기회를 제공했다. ‘전국 국민교’라는 명칭에 맞게끔 전국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했고, 바이올린 부문 지정곡은 비발디 협주곡 A단조 3악장이었다. 참가자들은 주최 측인 경향신문 지면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1960년(제9회) 바이올린 부문의 수상자는 김경실(장충초 5학년)이다. 경향신문에서 공동 주최하는 만큼 입상자들은 지면에 크게 실렸다. 당시의 기사를 살펴보면 악기를 배우게 된 동기, 기존의 수상 경력 등은 지금의 인터뷰 기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만 부모, 특히 부친의 직업과 형제자매들이 무엇을 공부하는 지를 기사화하는 것은 지금의 인터뷰 기사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 김경실은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느낌이 예민해서 김 양을 잘 이해하고 희생적으로 김 양을 위해 힘을 써주고 오빠는 피아노를 잘 치며 언니는 미술을 잘하는 말하자면 예술에 소양이 많은 집안에서 자라고 있다”(경향신문 1960년 10월 9일)고 밝혔다. 1961년(제10회) 바이올린부에서 우승한 윤숙경에 대해서는 “이번 콩클의 1등 입상자 가운데는 아버지가 없는 불우한 어린이가 많은데 윤숙경 양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다. (…) 큰 언니는 피아노로 역시 이 아동 콩클에 입상한 일이 있고, 둘째가 윤 양으로 바이얼린 (…) 셋째가 첼로로서 형제간에 멋진 트리오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의 재력과 삶과 여유는 음악 교육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1962년(제11회) 전국 국민교 아동음악콩쿠르 1등은 강호상(서울 덕수초 4학년)이, 1963년(제12회)에는 전년에 3등에 입상한 최한원(서울사대부속초 5학년, 현 이화여대 교수)이 1등을, 그리고 1964년에는 강동석(서울청계초 5학년, 현 연세대 교수)이 바이올린 1등은 물론 전체 특상을 거머쥐었다. 이택주(현 이화여대 교수·예음(禮音)실내악 멤버 역임)는 서울청계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1961년(제10회)에 바이올린부 3등을 시작으로 1962년과 1963년 장려상을 수상했다.

별들의 전쟁

전국 국민교 아동음악콩쿠르가 제10회를 맞이하던 1961년, 지금의 동아음악콩쿠르가 개최되었다. ‘전국음악경연대회’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이 콩쿠르는 바이올린을 비롯하여 피아노·첼로·작곡·성악 부문별로 1·2·3등상을 수여했고, 다섯 부문을 통틀어 가장 우수한 재원에게 ‘음악대상’을 수상했다.

동아일보가 주최한 전국음악경연대회는 독특하게도 ‘대한민국에 한하되 연령, 학력 등 일체의 제한을 두지 않는’(동아일보 1963년 3월 15일) 콩쿠르였다. 따라서 초·중·고는 물론 대학생들이 한 부분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었다. 제1회(1961년) 바이올린 부문 우승자는 민초혜였다.

“서울예고 재학 중, 9세 때 이화여중고교 주최 전국아동음악콩쿠르 바이올린부 3등 입상, 2년 뒤 동 콩쿠르 바이올린부 1등 입상. 12세 때 문교부 주최 전국음악콩쿠르 바이올린부 3등 입상, 제1회 콩쿠르 바이올린부 우수상.”(동아일보 1963년 3월 29일).

당시 피아노부에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22세의 신수정이, 첼로에는 서울대 음대 재학 중이던 17세의 이종영이 수상했다.

1960년대 당시, 콩쿠르를 개최하고 그 현장을 기사화하는 신문사들 간에도 경쟁이 치열했다. 1962년 12월 13일 국립극장에서 민초혜가 독주회를 가질 때다. 경향신문의 아동음악콩쿠르와 동아일보의 전국음악경연대회에 입상한 민초혜를 놓고 동아일보는 “작년도 본사 주최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는 바이올린 특상을 획득하여 그의 놀라운 연주력을 다시 한 번 평가받았다”며 그녀의 소개란에 아동음악콩쿠르(경향신문)에 입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경향신문은 “본사와 이화여중이 주최해오는 전국아동음악경연대회에 입상한 바 있으며 현재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라며 전국음악경연대회(동아일보)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이들은 각 신문사의 콩쿠르가 배출한 ‘스타’이자, 콩쿠르를 선전하는 ‘간판’이기도 했던 것이다.

1961년 문을 연 동아음악콩쿠르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아도 흥미로운 대결 중 하나는 하나는 1963년(제3회)일 것이다. 당시 이화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인 김남윤(14세)과 서울음대생 김민(21세)의 대결. 1차 예선 과제곡은 베리오 ‘발레의 정경’, 2차 예선은 베라치니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전악장, 본선은 비오티의 바이올린 협주곡 22번이었다. 1위 김남윤, 2위 황보엽(16세, 서울예술고), 3위 김민이 입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정회석의 평은 치열한 경쟁 현장의 생생함을 담고 있다.

“(…) 행 불행(?)으로 등위를 가려달라는 주최 측 요청에 의하여 우열을 구별해야 했음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 결선출연자 세 사람은 막상막하의 시소를 했기 때문이다. 비록 결과는 1·2·3위로 나왔으나 그 점수의 차는 극히 비슷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차를 둠으로써의 1·2점의 차가 났으리라고 본다. (…) 김남윤은 아카데믹과 더불어 좋은 음악성을 과시했다. (…) 2위 입상의 황보엽은 역시 훌륭한 연주를 하였다. (…) 불행하게도 3위에 입상한 김민은 상기 두 사람에 비하여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좋은 연주와 장래를 예약하는 음악학도임을 확인한다. 다만 그는 제2악장부터 실력을 발휘했으나 제1악장의 연주 시는 마음의 불안정과 더불어 본인의 가진 바 실력을 발휘 못했을 따름이다.”(동아일보 1963년 10월 21일)

김남윤과 김민은 이듬해 독주회를 가진다. 서울예고에 진학한 김남윤은 6월 29일 국립극장에서 임원식 지휘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선보였고, KBS교향악단 단원이 된 김민은 10월 6일에 임원식의 지휘로 베토벤과 비에니아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했다. 한국전쟁 시기 피난지 부산에서 이화경향음악콩쿠르를 개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임원식은 바이올린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음악학도들에게 협연과 실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큰 나무’였다. 어쨌든 김남윤은 입상 이후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갈라미언 교수를 사사했고, 김민은 함부르크 음대에서 수학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울대 음대 교수로 함께 재직했고, 김남윤은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으로 새 둥지를 틀었다.

이 외에도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콩쿠르는 해가 지날수록 증가했다. 1963년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 주최로 제2회 여고생 음악경연대회(바이올린·피아노·첼로·성악·합주·합창)가 열렸고, 1964년 10월 서울대·경희대·연세대가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음악경연대회를 열었다. 제6회 전국남녀고교생음악경연대회(경희대)는 작곡·현악·피아노·성악·관악·합창·관악합주를, 제5회 전국고등학생음악경연대회(연세대)는 피아노·성악·바이올린·첼로·관악·작곡을, 제16회 전국남여중고교생음악콩쿠르를 대학신문사와 공동 주최한 서울대는 성악·피아노·바이올린·첼로·오보에·바순·호른·작곡·중주 분야로 구성되었다.

바이올린 교육의 대부 안용구

1960년 11월 16일 명동 YWCA강당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의 리사이틀이 있었다. 서울대 교수와 KBS교향악단 악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리사이틀 외에 1962년에 현악합주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합주단이 안용구 씨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현재 구미 각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현악합주단은 각개인의 연주능력과 가장 고도의 음악성을 요구하는 것이며 순음악 악상의 절대형식을 자아내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라 이런 합주단이 우리나라에도 생기게 됨에 따라 악계에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다는 의의가 크다.”(동아일보 1962년 11월 22일)

현악합주단은 안용구를 주축으로 고명삼·백운창·김민·윤정남·노정숙·서순정·신명혜(바이올린), 김용윤·영달송(비올라), 장정자·이종영(첼로), 김영일(베이스), 신수정(피아노)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안용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안용구 현악 3중주단과 안용구 현악 4중주단을 연이어 결성해 실내악의 기반을 닦고자 했다.

그의 큰 기쁨은 무엇보다 재능 있는 제자들이었다. 김영욱·정경화·강동석·강효·김민 등을 가르쳤는가 하면, 재능이 있다면 레슨비 없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무료로 가르치던 네 명의 아이들 중 두 명은 고아원 출신이기도 했다. 내한했던 미국의 세노프스키는 당시 안용구의 제자였던 어린 강효의 연주를 듣고 그를 미국으로 데려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미국 대사관에서 강효의 유학 수속을 알아보느라 하마터면 자신의 연주회에도 늦을 뻔했다.

“10·11일 양일동안 시민회관서 공연한 미국의 세계적 바이얼리니스트인 벌 세놉스키 씨는 한국의 한 천재소년 바이얼리니스트에게 그가 한국 공연서 받은 개런티 5백 달러를 몽땅 제공했다. 행운의 주인공은 서울음대 2년생인 강효(18)군으로 강군의 재질에 감탄한 세놉스키가 그의 도미 유학 여비로 전달한 것이다. 강군은 안용구 씨에게 사사해왔는데 안 씨의 추천으로 세놉스키 씨에게 연주를 들려준 결과 그의 놀라운 재질이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세놉스키 씨는 강군의 도미 유학을 자진해서 권고하면서 자기의 스승인 이반 갈라미안에게 지도 받는 일과 자기의 집에 기식토록 하는 한편 일체의 학비도 자담하겠다고 나섰다. 세놉스키 씨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유능한 학생들의 연주를 들었지만 강군만이 자기가 인정한 단 한 사람의 학생으로서 그의 재질에 놀랐다”고 말했다. 강군은 의학박사 강동완(효성의원장)씨의 자제로 59년 서울대음대 주최 전국 중·고교음악콩쿠르에서 특상을 받은 바 있다.”(경향신문 1964년 6월 13일)

안용구가 가르친 또다른 제자 김영욱은 거장 루돌프 제르킨의 마음을 앗아 갔다. 결국 그는 제르킨의 주선으로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가 되었다. 정경화와 강동석도 안용구의 제자로 출발하여 비슷한 수순으로 갈라미언의 제자가 되었다. 안용구는 자신의 제자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정경화는 내게서 이삼 년 레슨을 받은 뒤 비에냐프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그 곡은 기교면에서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기성 바이올리니스트도 손을 못 대던 곡이었습니다. 경화는 아무리 어려운 곡이라도 빨리 배웠으며 기술면에서 뛰어난 연주자였어요. 김영욱은 음악의 내면을 파고들어 가서 그가 느낀 것을 청중에게 전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습니다. 브루흐 협주곡 2악장을 연주하던 영욱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바이올린 위로 뚝뚝 떨어뜨린 적도 있었어요. 그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그가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월간 ‘객석’ 2005년 2월호)

바이올린 인구의 증가, 사치품으로의 오해

당시 콩쿠르의 종목은, 클래식 음악 중 인기 있는 영역으로 국한되었다. 일례로 동아음악콩쿠르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당시의 악기 분포를 살펴보면 1963년 제3회의 1차 예선에는 피아노 12명, 첼로 15명, 성악 15명 그리고 바이올린 16명으로 바이올린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동아일보 1963년 9월 17일). 음악에는 창작·연주·이론·비평 등 여러 장르가 있음에도 기악음악의 정착이 곧 서양음악의 정착이라는 생각과 서양악기가 부의 징표가 되는 사회 풍토는 서양악기 중 특히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급속한 증가를 낳았다.

한편 바이올린을 비롯하여 첼로, 하모니카, 아코디언, 축음기, 레코드 등이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밀수단속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부는 1961년 4월 10일 정례각의에서 밀수품 및 외래품 판매 금지책으로서 특정 외래품 판매 금지 법안을 의결했다. 판매 금지된 외래품 중 바이올린·첼로·하모니카·아코디언과 같은 악기는 도서, 그림, 레코드, 부채, 목걸이, 컴퓨터, 라이터 돌, 완구, 안경, 담배 등과 함께 금지물품 중 제19종에 속했다.

사실 1960년대에 서양음악 중 특히 기악음악 교육이 붐을 이루었지만, 음악 활동을 위하여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인력과 악보, 악기 등이 외국에서 유입되는 경로에는 한계가 많았다. (1980년대까지도 남아 있던) 악기를 사치품으로 분류하는 경향에는 위정자들의 문화적 몰이해, 대중의 무지도 한몫했다. 하지만 음악가들의 계급과 경제적 위치, 또는 음악가들의 보수적인 태도에서 발생하는 대중과의 문화적 괴리 등이 복잡한 일면을 만들고 이러한 풍조를 더 공고하게 만들었다. 당시 음악가들은 법적으로 악기를 ‘사치품’으로 분류하는 것을 폐지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비엔나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귀국한 저자는 백 불도 못되는 싼값으로 피아노를 한 대 사 가지고 왔던 것인데 세관에서는 외국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막대한 세금을 내야만 했었다. 세금을 내는 것까지는 나라에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납득이 가는 것이었지만 피아노가 전리품목에 들어있다는 세관원의 애기를 듣고서는 가슴이 써늘하였었다.”(조상현(성악), ‘민족음악을 위한 제의’, 동아일보 1961년 5월 4일)

다음 호에는 1965년부터 1969년까지 5년 동안 바이올린을 둘러싼 교육·연주·유학 등 다양한 환경과 변화를 살펴볼 예정이다. 1960년대 초반에 김영욱이 강세를 보였다면, 이후에는 앞서 살펴본 여러 콩쿠르가 배출한 학생들이 해외 유학과 무대로 진출하면서 새로운 기류를 조성했다. 그러한 기류 속에서 정경화의 등장은 또 하나 새로운 역사를 여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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