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과 전쟁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아테나

유형종의 MYTH+MUSIC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6월 1일 12:00 오전

무(武)와 미(美)를 겸비한 두 처녀신의 이야기. 바가노바·애슈턴의 발레와 카발리·글루크·바그너의 오페라에 담긴 아르테미스와 아테나 신화

무(武)와 미(美)를 겸비한 두 처녀신의 이야기.

바가노바·애슈턴의 발레와 카발리·글루크·바그너의 오페라에 담긴 아르테미스와 아테나 신화

제우스는 여러 여신들과 네 딸을 낳았다. 아르테미스(디아나), 아테나(미네르바), 아프로디테(베누스), 페르세포네(프로세르피나).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를 제외한 세 딸은 지상 최고신 올림포스 12신에 속해 있다. 이 중 아르테미스와 아테나는 처녀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연약한 처녀가 아니다. 사냥과 전쟁을 수호하며 강력한 무기를 지닌 여신들이다.


▲ 티치아노 베첼리오 ‘악타이온의 죽음’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그녀의 실체는?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와 티탄족의 딸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태양의 신 아폴론과 쌍둥이 남매지간이다. 레토는 헤라의 지독한 질투 때문에 아이 낳을 곳을 찾지 못했다. 그 어떤 신도, 인간도 헤라의 저주가 두려워 함부로 레토를 돕지 못하자 포세이돈이 헤라의 눈을 속이고 그녀를 델로스 섬으로 보내주었다. 레토는 그곳에서 가까스로 해산했다. 이렇게 태어난 아르테미스는 일찌감치 처녀로 지낼 것을 맹세하고 들짐승과 숲을 지키는 여신이자 사냥의 여신이 된다.

아르테미스에게는 활이란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역시 명사수인 쌍둥이 아폴론과 함께 어머니 레토를 보호하고 다녔다. 프리기아의 공주 니오베가 일곱 아들과 일곱 딸을 낳은 자신이 레토보다 낫다고 자랑하고 다니자 그 자식들을 모조리 활로 죽여버리기도 했다. 레토를 겁탈하려던 거인 티튀오스 또한 아르테미스 남매에게 죽임을 당한다.

스스로 순결을 맹세한 처녀신이었기 때문에 부하 님프들에게도 순결을 요구했으며, 제우스에게 속아 뜻을 거역한 칼리스토를 곰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렇듯 순결을 지키지 않은 부하를 엄벌하고, 어머니를 능욕한 자를 거침없이 활로 쏘아 죽이는 여신 아르테미스는 무조건 남자를 싫어하는 처녀신이었을까?

악타이온 이야기를 보면 그럴 것만 같다. 사냥꾼 악타이온은 사냥개들과 숲을 쏘다니던 중 아르테미스를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버린다. 몰래 아르테미스를 쫓아다니던 악타이온은 여신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기에 이른다. 이를 발견한 아르테미스는 격분하여 악타이온을 사슴으로 만들어버리고, 악타이온은 변한 주인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사냥개들에게 물려 죽고 만다.

반면 엔디미온이라는 목동의 이야기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엔디미온은 처녀신도 반해버릴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러나 아르테미스에게 남자, 그것도 인간에게 반했다는 사실은 감추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서 엔디미온을 늘 잠에 취해 있도록 한 뒤, 다가가 바라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 발레 ‘디아나와 악타이온’ ⓒJack Devant

발레 ‘디아나와 악타이온’을 보면 또 헷갈린다. 여기서 디아나는 아르테미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극 중 디아나와 악타이온은 경쾌한 음악 속에서 연인처럼 보이는 파드되를 춘다. 어찌된 일일까? 아마 아르테미스와 엮인 두 남자 중 악타이온이 더 잘 알려져 있고, 고전 발레에서 자신을 연모하는 남자를 죽이는 것은 영 어색한 흐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신화시대의 사냥꾼 복장을 한 남자 무용수는 목동이 아닌 사냥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디아나와 악타이온’은 원래 독립된 발레 작품이 아니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를 다룬 쥘 페로의 발레 ‘에스메랄다’(1844)가 러시아 로열 발레의 레퍼토리가 된 후 여러 차례 개작됐고, 1935년 바가노바 기법으로 유명한 안무가 아그리피나 바가노바가 ‘디아나와 악타이온’을 삽입했다. 그런데 ‘에스메랄다’의 줄거리와 무관한 이 장면이 큰 인기를 끌면서 독립된 작품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18세기 후반의 오페라 대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2부작 ‘아울리데의 이피게니아’(1774)와 ‘타우리데의 이피게니아’(1777)의 내용도 아르테미스와 연관된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사슴을 사냥하고는 자신이 아르테미스보다 낫다며 자만한다. 이를 들은 아르테미스는 아가멤논이 트로이로 향하는 그리스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됐을 때 저주를 내린다. 결국 아울리데 항구에 집결한 선단은 바람이 불지 않아 출항하지 못하고,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원정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것이 ‘아울리데의 이피게니아’의 줄거리다.


▲ 오페라 ‘타우리데의 이피게니아’의 한 장면

‘타우리데의 이피게니아’의 내용은 이렇다. 아르테미스는 제물로 바쳐진 죄 없는 이피게니아를 살려주고, 흑해 연안 크림 반도에 있는 타우리데의 아르테미스 신전 여사제로 만든다. 트로이 전쟁 후 아가멤논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에게 살해당한다. 그러자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모친과 그 정부를 죽여 복수한다. 친족을 살해한 죄로 심판을 받은 끝에 사면된 오레스테스는 아르테미스 조각상을 찾아 타우리데로 향하고, 그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누나 이피게니아와 상봉하여 그리스로 돌아간다.

이 두 오페라는 프랑스 궁정 오페라 양식을 따랐지만 글루크가 빈에서 주도한 오페라 세리아 개혁 운동의 취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관현악 반주가 수반된 짧은 레치타티보, 불필요한 관습적 장면 삭제, 군더더기 없고 극에 충실한 음악, 가창력을 과시하지 않는 노래 스타일 등이 그 예다.

발레 ‘실비아’에 투영된 디아나

들리브의 음악이 돋보이는 발레 ‘실비아’에서도 아르테미스의 흔적이 발견된다. 실비아는 디아나 무리의 부두목 격인 님프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대문호 타소가 ‘아민타’란 극시에 등장시켰다. 초연 당시 안무는 전해지지 않고, 지금은 프레더릭 애슈턴이 로열 발레를 위해 안무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실비아를 사모하는 목동 아민타는 에로스 사원을 찾았다가 실비아 일행이 다가오는 소리에 몸을 숨긴다. 실비아는 자신이 섬기는 디아나처럼 남자에게 무관심하기에 에로스를 조롱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던 중 숨어 있던 아민타를 발견한 실비아는 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화살을 쏘고 만다. 이를 괘씸히 여긴 에로스는 실비아에게 사랑의 화살을 쏜다. 잠시 후 에로스의 마법이 효력을 발휘하자 실비아는 쓰러진 아민타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때 실비아에 반한 거대한 체격의 사냥꾼 오리온이 실비아를 납치해가고, 은자(隱者)로 변신한 에로스가 아민타의 목숨을 구한다. 오리온의 동굴에 갇힌 실비아는 궁리 끝에 그를 유혹한다. 고혹적인 춤과 술에 취한 오리온 일당이 의식을 잃자 실비아는 에로스에게 구원을 청한다. 아민타와 실비아가 디아나 신전 앞에서 행복하게 재회하는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오리온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비아는 디아나 신전으로 몸을 피하고, 행패를 부리던 오리온은 격분한 디아나가 쏜 화살을 맞고 죽는다.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디아나는 순결을 맹세한 실비아의 사랑을 금하려 하지만, 에로스가 디아나 역시 목동 엔디미온을 사랑했음을 상기시키는 바람에 그 둘에게 축복을 내린다.

실비아에 투영된 디아나의 속성은 사냥의 여신에게 감추어진 여성성을 부각시켜 준다. 아민타에게는 아르테미스 신화의 악타이온과 엔디미온의 모습이 투영됐다.

오리온의 경우 신화에서 아르테미스가 사랑했으나 아폴론의 속임수에 넘어가 실수로 죽인 사냥꾼 혹은 아르테미스가 피해 건달이라고 보는 전혀 다른 두 관점이 존재한다. 발레 ‘실비아’에서는 후자에 가까우며 디아나의 화살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존 노이마이어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발레 ‘실비아’(1997)는 또 다르게 해석했다. 신화적인 요소 일부를 무대 장치에 남기되 전체적인 무대와 의상은 현대적이다. 극 중 오리온은 실비아가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인물로 묘사된다.


▲ 자크 루이 다비드 ‘아테나와 아레스의 전투’

아테나, 제우스의 머리를 가르고 탄생한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제우스가 직접 낳은 딸이다. 지성의 여신 메티스는 제우스가 헤라와 만나기 전에 결혼한 첫 아내였는데, 둘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면 제우스를 밀어낼 것이란 예언을 받는다. 아버지를 밀어내고 권력을 획득했던 제우스는 두려움에 떨며 메티스를 자기 몸속에 가둔다. 그러나 메티스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산달이 되자 제우스는 극심한 두통을 호소한다. 이에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도끼로 제우스의 머리를 갈랐고 그 안에서 완전무장한 여신 아테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테나는 이름처럼 아테네의 수호신인 동시에 제우스가 가장 총애하는 딸이었다. 모친은 올림포스에서 가장 현명한 여신인 데다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기에 누구보다도 총명했다. 헤겔은 ‘미네르바(아테나의 로마식 이름)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갯짓을 시작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여기서 올빼미란 아테나의 지혜를 뜻한다. 서양의 학교나 도서관 앞에 올빼미 상징물이 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완전무장한 상태로 태어난 것에서 알 수 있듯 아테나는 전쟁의 여신이다. 이복남매인 아레스가 파괴적인 전쟁광이었다면 아테나는 문명과 도시를 수호하는 전쟁의 명수였다. 아테나를 상징하는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아이기스(Aegis)라고 불리는 방패다. 영어로는 ‘이지스’라고 읽는데, 최첨단 레이더와 중장거리 미사일을 이용해 적의 비행 무기에 대응하는 통합 전투 체계를 갖춘 전함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적의 어떠한 공격도 무력화하는 아테나의 방패에서 착안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테나는 클래식 음악의 소재로는 인기가 없었다. 처녀신이며 파리스의 심판에 등장할 만큼 아름다운 여신이었음에도 완전무장한 차림과 전쟁을 주관한다는 이유로 여성적인 느낌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여전사 발퀴레, 그 중에서도 브륀힐데가 창과 방패를 든 아테나를 연상케 한다. 부친이 특별히 아끼는 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글 유형종
발레·오페라·클래식 음악 등 공연 예술 전반에 관한 집필과 해설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무지크바움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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