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을 둘러싼 음악 환경의 변화 ②

ACROSS THE 1960's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7월 1일 12:00 오전

1960년대에 김영욱·정경화 등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국제무대를 누비기 시작한다. 1964년까지 살펴본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는 그 이후의 연주·교육·콩쿠르·유학 환경을 살펴본다

196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서 한국 음악계는 서서히 국제화되었다. 국내 콩쿠르를 통해 배출된 인재들은 해외 유학을 위해 비행기에 하나둘 올라타기 시작했다. 국내 언론은 이들의 콩쿠르 참가와 연주 소식을 부지런히 날랐다. 세계 명연주가들이 내한하여 리사이틀 및 국내 교향악단과 협연했는가 하면, 그들의 눈에 띄어 유학을 성사시키는 음악학도들도 있었다. 이번 호는 지난 호에 이어 196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바이올린 문화를 살펴본다(인용 기사는 당시의 표기법을 따랐다).

아버지가 누구니?


▲ 동아일보 1965년 10월 2일

1965년 10월 동아일보 주최 전국음악경연대회(현 동아음악콩쿠르)의 예선에는 구진경(17·서울예고 3학년), 강귀희(16·서울예고 2학년), 김애실(16·이화여고 2학년), 박혜수(17·서울예고 3학년)가 본선에 올랐다. 1960년대 초반에는 대학생들도 있었으나 이제 이 콩쿠르 결선장은 앳된 여고생들의 차지로 변했다.
1위에 박혜수를 비롯하여 2위에 구진경, 3위에 강귀희가 입상했다. 당시 입상자 인터뷰에는 수상 소감, 음악 입문동기, 경력, 취미, 스승, 가정환경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특히 아버지의 직업은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올해 17세인 서울예고 3년 생 박 양은 (···) 안용구 씨에게 사사. 3남매의 둘째 딸로 부친은 전 재무차관인 박종식 씨.”(동아일보 1965년 10월 14일)


▲ 동아일보 1965년 10월 14일

다른 분야의 입상자들도 마찬가지. 성악 1위 장미혜의 “집안은 (···) 피아노를 치던 동생 미영 양이 지금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수업 중”, 피아노 1위 박현자는 “정진우 씨에 사사. 부친은 한국 비락 사장 박태식 씨”, 첼로 1위 우명순은 “오빠가 있는 미국에 가서 음악을 계속하는 게 꿈”이라는 등의 내용이었다(동아일보 1965년 10월 14일). 당시 악기 레슨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경제적 안정을 얻은 그들은 자녀들의 예술 활동을 통하여 ‘문화자본’을 획득해나갔다. 따라서 ‘서양 음악’은 곧 ‘부(富)’의 뒷받침 없이 불가능했고, 둘은 직결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해에 바이올린부 심사위원 정회석(서울대 교수)은 “예년보다 콩쿠르 참가자가 적은 것은 지정곡이 무거운 탓인지 (···) 서운한 감을 금치 못하겠다”라며, “질적으로 저조하였으며 참가자들이 과제곡에만 치중한 나머지 기초적인 훈련을 소홀히 한 감이 있다”(동아일보 1965년 10월 21일)라고 평했다.

1965년에도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다양한 무대가 이어졌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과 1993년 예술의전당 개관 전이었던 1960년대에 음악공연은 주로 국립극장과 시민회관에서 있었다. 당시 국립극장은 현재 명동예술극장으로 사용되는 곳이었고, 시민회관은 1972년 화재로 전소되기 전까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다. 서울대·이대·한양대 및 서울예고에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바이올리니스트 양해엽은 모차르트·베토벤·브람스의 소나타와 라벨·쇼팽의 소품을 연주했다(1965년 4월 23일, 국립극장). 11월 2일 국립극장에는 빌헬름 슈트로스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한독협회의 후원이었고, 1962년 슈트로스 현악 4중주단 내한 이후 두 번째 무대였다.


▲ 동아일보 1965년 4월 20일

유학 붐과 병폐

유럽 콩쿠르의 최종 결선에서 한국음악가들‘끼리’ 경쟁하는 것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1965년 6월 2일, 워싱턴 메리웨더 포스트 경연대회에서 18세의 김영욱과 17세의 정경화가 각각 1위와 2위에 입상했을 때도 외국에서, 그것도 같은 스승(이반 갈라미언) 밑에서 수학한 두 사람의 경쟁은 화제를 낳았다.


▲ 9세 때의 정경화


▲ 월간 ‘객석’ 2012년 4월호 표지 정경화

“상금은 1위 1500달라, 2위 750달라 (···) 수석 입상한 김영욱 군은 시내 낙원동에서 개업 중인 의학박사 김승현 씨의 4남 2녀 중 막내, 2위 입상한 정경화 양은 서울에서 고려정을 경영하다 미국 시아틀에서 (···) 코리아하우스를 열고 있는 정준채 씨의 4남 3여 중 3녀이다. 김 군은 커티스, 정 양은 쥴리아드로 학교는 다르지만 다 같이 이반 갈라비안 씨에게 사사 중이다.”(동아일보 1965년 6월 5일)


▲ 동아일보 1963년 9월 12일

갈라미언의 클래스는 스파르타식으로 악명 높았지만, 그의 제장 사랑은 극진했다고 한다. 후에 갈라미언 문하에 있었던 강동석(연세대 교수)은 “선생님은 가르치는 것 외에는 전혀 눈길을 두지 않으셨어요. 콩쿠르 심사도 하지 않으셨죠. 제자가 겨루는 대회의 심사를 맡게 되면 공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죠”라고 했다.


▲ 갈라미언과 강동석

해외 유학생들은 점점 증가했다. ‘해외의 한국청소년음악도’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는 해외유학생의 현황을 한눈에 기사화했다. 기사를 보면, 피아노는 한동일·한옥수·신수정·이청·이종효·김정규·김덕주·박봉희·이경숙·조성미·김정자·장혜원·백낙정·유규호·백건우·장유경이 그 주인공들. 유학지는 대부분 미국이었고, 줄리아드음악원 재학생이 가장 많았다. 바이올린도 미국이 가장 많았다.

“이종숙=서독서 교향악단 멤버로 활약(이화여고 졸, 도독 후 모찰트음악학교 졸), 현해은=발티모어교향악단 멤버(예고 졸, 커티스 졸), 김원모=위스컨신대 강사(배재중 졸, 이스트맨음대 석사학위), 김영욱=커티스 재학(휘문중 재학 때 도미), 정경화=줄리아드 재학 중(이화여중 졸), 민초혜=보스톤음악학원 재학(예고 졸), 박미영=커티스 재학(이화여중 졸), 강효=줄리아드 재학(서울음대 재학 중 도미), 임유직=스웨덴 로얄심포니 멤버(오산고 졸·빠리 음악원 졸), 김의명=뉴욕에서 수학 중(서울중 졸).”(동아일보 1965년 6월 8일)

유학을 통해 클래식음악의 ‘본국’에서 인정받는 ‘어린’바이올리니스트들이 늘어나면서 국내 음악교육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서울예고 교장이자 어린 음악가들에게 협연과 실전의 기회를 제공하던 임원식 역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 동아일보 1965년 6월 8일


▲ 월간 ‘객석’ 1994년 12월호 표지 임원식

“바이올린의 박미영, 민초혜, 김의명··· 거의 다 우리나라에서 중학이나 고등학교 재학 중에 유학을 간 것이다. (···) 수많은 어린이들의 음악수업은 현재의 우리나라 교육제도 하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는 학생들에게 수학이나 사회생활이니 하는 고등학교의 교과과목을 모두 시험 치게 하는 입시 제도를 시정하기 전에는 앞으로도 중·고 재학 시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학생들이 속출될 것(···)이다.”(동아일보 1965년 6월 8일)

신동들이 점령한 음악계

1965년 18세의 김영욱과 17세의 정경화가 미국을 무대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을 때, 한국에는 11세의 천재가 음악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바로 강동석이다. 그는 6월 22일 국립극장에서 KBS교향악단과 멘델스존 E단조·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 경향신문 1965년 6월 12일

“강군이 신동이란 말을 듣게 된 것은 지난해 본사(경향신문-인용자)와 이화여중·고 주최인 전국아동음악콩쿠르(현 이화경향음악콩쿠르-인용자)에서 전 종목에 걸쳐 특상을 차지했을 때였다. 이 때 심사 위원장이던 임원식 씨는 (···) 1년 후에 강군이 독주회를 갖는다면 자신의 지휘로 KBS교향악단이 반주할 것을 약속했었다. (···) 강군이 정경화 양이 쓰던 악기를 물려받아 쓰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경향신문 1965년 6월 12일)

전 부문에 걸쳐 딱 1명에게만 주어지는 특상을 1964년에 강동석이 차지했고, 1965년(제14회) 특상은 최영선(혜화초 6학년)이 차지했다. 특상에는 중학교 입학금 면제와 1년간의 장학금이 주어졌다.


▲ 경향신문 1965년 9월 18일

“특상인 (···) 최 양은 4남매 중 셋째인데 어머니 박제후 씨가 피아노를 하시고 아버지 최석범 씨는 한국은행에 다니고 계십니다.”(경향신문 1965년 9월 18일)

이 해의 1위는 “조상현 씨의 둘째 딸인 조영미 양(동북교 5학년)”이, 2위는 이성주(서울사대부속초), 3위는 김순영(덕수초)이 차지했다. 조영미는 성악가이자 국회의원(민주정의당)을 지낸 조상현(1924~2010)의 딸로, 형제인 조영창(첼로)·조영방(피아노)과 조 트리오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5년 이화경향음악콩쿠르의 참가금은 500원이었다. 국민 소득수준이 매우 낮을 때로, 짜장면 한 그릇 또는 ‘신탄진’이라는 이름의 최고급 담배 한 갑이 50원 안팎일 때였다. 전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콩쿠르의 예선은 타르티니 소나타 G장조 1·2악장과 베라치니 소나타 E단조 1·2악장, 본선은 비오티 협주곡 23번 1악장과 모차르트 협주곡 4번이었다. 음악교육 수준과 범위가 저조하고 넓지 못하던 당시 기준으로 보면 높은 수준의 참가곡이었다.


▲ 월간 ‘객석’ 1993년 2월호 표지 이성주

1965년 2위에 입상한 이성주(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는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이던 1966년에 같은 콩쿠르에서 특상을 수상한다.


▲ 경향신문 1966년 10월 10일

이 해의 바이올린부 1위에 이희태(동북초 5학년), 2위에 임원빈(중앙대부속초 4학년), 3위에 장민수(동북초 5학년)가 입상했고, 훗날 인디애나 음대 교수로 재직한 배익환(1956~2014)이 성신여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4학년 생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 양은 5년 전부터 바이얼린을 배우기 시작 (···) 이번 콩쿠르를 준비하기 위해 하루 3~4시간씩의 맹연습을 했다고. 국회 재경위원회 자문인 아버지는 성악에 조예가 깊고 언니는 서울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어 이 양의 가정은 음악에 차있다. 이성주 양은 또 미술에도 뛰어나 지난번 한국일보 주최 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탔다.”(경향신문 1966년 10월 10일) 이듬해인 1967년 콩쿠르에는 1위에 신진우(수송초 5학년)가 2위에 배익환이 입상했다.


▲ 경향신문 1966년 9월 17일


▲ 경향신문 1967년 10월 21일

콩쿠르 현장을 개방하다 

1966년 제6회 동아일보사 전국음악경연대회(현 동아음악콩쿠르)는 1·2차 예선과 본선으로 진행되었다. 연령 제한이 없는 이 콩쿠르는 이화경향음악콩쿠르 입상자들의 다음 관문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입상자가 다시 참가할 때는 1차 예선이 면제되는 특권 탓에 이듬해 1위에 재도전하는 음악학도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게다가 1966년부터는 각 부문의 1·2·3위를 선정하는 본선과 각 부문을 망라하여 수여하는 ‘대상’ 수상자 선정을 위한 경연장을 유료로 공개했다. 서울대음대 강당과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본선 중 바이올린 부문은 10월 24일(오전 10시) 국립극장에서 있었다. 입장료는 50원. 100원의 입장료를 받은 음악대상 연주회는 당일 오후 6시 같은 장소에서 진행됐다. 대상 선정을 위한 음악회에는 오전에 치러진 각 부문 1위 입상자들이 출연했다.

1966년 동아음악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의 본선 진출자는 김복수(16·배재고 1학년), 강동석(12·대광중 1학년), 최한원(13·이화여중 2학년), 이택주(14·경복중 3학년)였다. 대상과 1위는 강동석이 차지했고, 2위에 최한원, 3위에 이택주가 입상했다. 성인과 달리 1년이라는 시간이 육체적·정신적으로 큰 차이를 빚는 청소년기에, 누나·형들과 겨뤄 1위와 대상을 차지한 강동석은 당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 동아일보 1966년 10월 22일

“12세의 나이로 대상을 타 음악계를 놀라게 한 강군은 (···) 별로 유복하지 못한 가정에서나마 꾸준히 노력, 오늘의 영광을 누린 것. (···) 안용구·김용윤 씨에게 사사했다. 부친 신석 씨(풍한산업이사)의 4남매의 셋째.”(동아일보 1966년 10월 27일)


▲ 동아일보 1966년 10월 27일

당시 콩쿠르는 점점 다양해지고 늘어났다. 학교는 콩쿠르 개최에 여념이 없었다. 1966년만 하더라도 수도여대(현 세종대)의 제5회 전국여자중고등학교 음악경연대회, 서울대 음대 동창회가 개설한 서울음악콩쿠르, 서울교대가 주최한 제3회 전국아동음악경연대회 등이 열렸다.

“7~8살에서 재능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지만, “10살 이상이 지나면 약간 문제”라는 기사(경향신문 1965년 4월 26일)에선 당시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시작하는 나이가 한참 어려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울 부유층만의 전유물이던 미취학 아동들의 악기 교육이 크게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경제적 형편과 부모들의 교육열은 높아지고, 음악교육은 보편화되면서 ‘경제력+교육열+음악교육 대중화=콩쿠르 현장’이라는 도식이 떠오르던 그때에 아이들의 정서 함양보다 콩쿠르 입상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풍토에는 문제가 제기되고는 했다.


▲ 경향신문 1965년 4월 26일

“자기의 아이들이 피아노나 바이얼린을 킬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아이들이 가지지 못한 특기라고 해서 어머니로서 우월감을 갖거나, 자신이 이룰 수 없었던 꿈을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이라면 위험천만이다.”(경향신문 1965년 4월 26일)

“가정에서는 아이들 재질도 돌보지 않고 무턱대고 피아노니 바이얼린을 가르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아는 모양인데 꾸지람을 받아가며 억지로 배우고 있는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보라. 자녀는 결코 부모의 허영을 채워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 지나친 욕심은 바로 허영인 것이다.”(경향신문 1965년 5월 14일)
바로 위의 기사 제목은 ‘자녀를 괴롭히는 부모의 허영’이었다.

유학이라는 특권

한쪽에서는 위와 같이 과열된 풍토에 대한 비판이 오갔지만, 또 다른 한쪽은 국내 내로라하는 콩쿠르 입상자들의 해외 유학과 현지 활동으로 촉수를 뻗고 있었다.
다음 기사는 1961년 동아음악콩쿠르(제1회)에서 1위에 입상 후, 보스턴음악원에 재학 중이던 민초혜의 보스턴여성교향악단 협연 소식이다.
“위니아브스키(비에니아프스키-인용자)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거침없이 연주했는데 진분홍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17살의 민 양은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에 의해 다섯 번씩이나 무대에 나와야 했다.”(동아일보 1965년 9월7일)


▲ 동아일보 1965년 9월 7일

1966년 조선일보 주최로 청룡음악장학생 선발대회가 생겼다. 이 대회의 가장 큰 특전은 당시 힘들던 미국 유학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분야는 바이올린·피아노·성악으로, 이 해의 바이올린부 1위는 황보엽이었다.

“결선에서 파가니니 24개의 기상곡과 하이든 C장조 협주곡을 독주한 이번 대회 단 하나의 남성 출연자인 황보엽 군. 열아홉 살이지만 몇 해 전부터 KBS교향악단 제1바이올린 멤버로 활약 중이다. (···) 수송→영중→배재→서울예고의 코스를 거쳐 현재 서울음대 2년생. (···) 5형제 중의 셋째.”(조선일보 1966년 11월 22일)


▲ 조선일보 1966년 11월 22일

심사를 맡은 양해엽은 “자기 감성을 적절히 조절하여 과장 없이 음악에 결부시키고 있는 그의 개성에서는 이미 하나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평했다. 이후 황보엽은 도미하여 1973년 보스턴심포니에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입단해 부악장으로 재직했고, 탱글우드음악원과 뉴잉글랜드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젊은 슈퍼스타들의 내한

해외에서 본고장의 음악적 자양분을 빨아들인 음악학도들은 더 높은 관문의 콩쿠르에 도전했다. 그리고리 소콜로프(피아노)가 16세의 나이로 우승한 1966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정명화(첼로)도 참가하고자 했다. 당시 심사위원이자 그녀의 스승 피아티고르스키 교수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주미 한국대사관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김현철 주미대사는 한국 유학생 정명화(22) 양에게 소련 여행 허가를 허락해주도록 본국 정부에 간곡히 청원하는 공한을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보내와 외무부에서 새로이 검토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경향신문 1966년 3월 28일)


▲ 경향신문 1966년 3월 28일

김남윤이 서울시향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구진경이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협연하던 1966년. 그 해의 스타는 뭐니 뭐니 해도 김영욱과 그의 누이 김덕주(피아노)의 내한 공연(5월 19일, 시민회관)이었다. 이 공연을 대서특필한 기사를 보면, 마치 국가영웅 같은 존재로 이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동아일보 1966년 4월 9일

“우리는 이 두 남매를 가짐으로써 준엄한 음악의 고봉이 우리들에게는 한때 흐렸고 때로는 절망에 가까웠으나 이제는 눈앞에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 것을 팬 여러분과 같이 기뻐하는 바입니다.”(동아일보 1966년 5월 12일)


▲ 동아일보 1966년 5월 12일

동아일보 1966년 5월 13일자에 안내된 예매처는 영창악기(종로), 수부피아노(충무로), 명동피아노(명동), 수부악기(종로), 동아일보사였다. 당시 악기점은 ‘악기’를 비롯하여 악보·음악잡지·음반·입장권 등을 거래하는 문화공간이었다. 김영욱·김덕주 공연의 A석은 300원, B석은 200원, C석은 100원. 짜장면 한 그릇이 50원 안팎이었고, 한국에 최초로 TV방송이 시작되어 금성(현 LG)사가 흑백 TV를 출시하던 때였다.


▲ 동아일보 1966년 5월 30일

1966년 김영욱·덕주 남매가 ‘5월의 봄’을 뜨겁게 했다면, ‘9월의 가을’은 정명화·경화 남매의 열풍이 있었다. 9월 13·14일 시민회관에서 자매연주회 예정 소식을 동아일보는 1966년 8월 27일자로 전하고 있는데, 공연 당일 또는 바로 전날에 공연 소식을 전하는 일간지의 생리로 볼 때 이는 굉장히 빠른 보도였다.


▲ 경향신문 1966년 3월 28일

“지난 5월 모스크바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회에 참가하려 했던 명화 양은 본국의 허가가 없어 뜻을 못 이루었지만, 당시 존슨 대통령 부인도 정 양의 대회 참가를 적극 후원, 보통 수개월 걸리는 재입국허가 수속을 1주일에 끝나도록 해주었다고 지나간 얘기들을 전했다.”(동아일보 1966년 8월 27일)

김영욱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의 일거수일투족과 바다 건너 진행되는 공연은 하나하나 특종이었다.

“김영욱 군은 10일 밤 (···) 발렌슈타인이 지휘하는 내쇼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브륵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 갈채를 받았으며 워싱톤의 양대 신문인 워싱톤 포스트와 워싱톤 스타지의 평론가들로부터 최상급의 찬사를 받았다.”(동아일보 1967년 1월 14일).

“지난해 12월 17일 레놀드 번슈타인이 지휘하는 필하머니 오키스트러와 협연했을 때 (···) 번슈타인은 ‘이런 세계적으로 드문 천재와 협연한 것은 내 일생 최대의 영광’이라는 (···) 장면이 전국에 방송되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경향신문 1967년 1월 28일)

김영욱의 승승장구는 처음에 부친 김승현 박사를 ‘김영욱의 아버지’로 주목하게 했다. 그리고 이어 ‘김영욱의 어머니’인 이현경 여사가 어머니날 기념식(1967년 5월 8일, 시민회관)에서 ‘67년의 어머니’로 선정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경향신문 1967년 5월 8일).


▲ 경향신문 1967년 5월 8일


▲ 조선일보 1967년 5월 7일

“40세 때 3남 2녀의 어머니였던 이(李) 여사는 막내둥이인 영욱 군을 배고선 낳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해산했다고 말했다. 18년 전 9월 1일 오전 8시 30분쯤 영욱 군이 세상에 태어난 시간에 유난히 밝은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빛날 욱(旭)자를 따서 영욱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 서울 태생인 이 여사는 숙명여고를 졸업한 후 용산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23세 때 경성제대 의학부 3년생이던 김승현 씨와 결혼, 김 씨가 연구생을 하던 9년 동안 남편의 뒷바라지를 혼자 맡았고, 4남 2녀를 자랑스럽게 키워, 모두 미국에 보내어 공부시키고 있다. 네 아들 가운데 둘은 의사로, 또 한 아들은 고등고시에 합격하고, 세 남매는 음악가로서 내일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조선일보 1967년 5월 7일)


▲ 월간 ‘객석’ 1990년 11월호 표지 김영욱

정경화의 역사가 펼쳐지다

김영욱과 이현경 여사가 주목을 받고 며칠 뒤, 1967년 미국 레벤트리트 콩쿠르 결선에 진출한 4명의 바이올리니스트 소식이 한국 음악계를 긴장시켰다.

“결선에 진출한 4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 16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1천 달라의 상금을 주는 1위를 다투게 될 것이다.”(동아일보 1967년 5월 16일)

이어 정경화의 우승 소식이 1967년 5월 한국을 강하게 흔들었다. 1966년 한동일(피아노) 입상에 잇는 2년 연속 한국인 우승이었다.


▲ 경향신문 1967년 5월 18일


▲ 경향신문 1967년 5월 19일


▲ 월간 ‘객석’ 1987년 4월호 표지 한동일

‘정경화(19) 양은 17일 (···) 이스라엘 출신의 핀카스 주켈만(20) 군과 함께 공동으로 우승했다. 17세에서 28세까지로 연령이 제한 (···) 번스타인 지휘의 뉴욕필하모니, 필라델피아 교향악단, 보스턴심포니 등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오케스트라들이 독주자로서 정 양을 초빙, 정기연주회 및 순회 콘서트의 협주곡 독주자로 계약, 협연하게 된다. (···) 정양은 언니 명화 양, 큰언니 명소(플루트 전공으로 줄리어드를 나와, 예일대학 대학원 재학중) 양과 함께 음악형제 7남매 중 셋째 딸. (···) 서울에는 여의사인 이모 이인숙 씨, 그리고 4촌 언니 정송자 씨와 그 형부 임원식(서울예고 교장·KBS지휘자) 씨가 살고 있다.”(조선일보 1967년 5월 18일)


▲ 조선일보 1967년 5월 17일


▲ 동아일보 1967년 5월 18일

정경화와 동갑인 주커만은 결선에서 연주 도중 활을 놓쳤다. 하지만 그의 미국 유학을 주선한 심사위원장 아이작 스턴이 재연주를 권유하여 사상 초유의 공동우승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 조선일보 1967년 5월 18일


▲ 월간 ‘객석’ 1988년 2월호 표지 핀커스 주커만

“저는 아이작 스턴의 음악은 좋아하지만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 저녁 리셉션에서 (··) 아이작 스턴이 바로 옆에 앉아서 시가를 계속 피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저는 시가 냄새를 싫어한다고 그랬더니 다른 곳으로 가버리더군요.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이 (···) 그 시가는 기가 막힌 브람스 콘체르토를 연주하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아니 그건 스턴 자신의 일이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그 후부터 스턴이 얼마나 저를 미워하는지 몰라요.”(월간 객석 1984년 4월호)


▲ 매일경제 1967년 8월 7일

2015년 조성진의 쇼팽콩쿠르 입상 후, 세계적 수준의 콩쿠르를 소개하는 기사가 넘쳐났던 것처럼 정경화의 우승 이후 세계의 각종 콩쿠르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기사(매일경제 1967년 8월 7일)는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미국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그리고 프랑스(에 존재하는, 하지만 현재 확인 할 수 없는) 작곡 콩쿠르를 소개했다. 당시 공산권이던 러시아의 콩쿠르와 반대이념을 지녔던 미국의 콩쿠르를 소개한 기사는 ‘혈맹국’ 미국과의 우호와 냉전시대의 상황을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국제적 수준의 콩쿠르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어쨌든 정경화의 우승 소식은 한국 안팎으로 큰 화제였고, 정씨 가문의 음악가 후원을 위한 재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가족들과 4중주. 정명소(플루트), 정명화(첼로), 정명근·정경화(바이올린)


▲ 1959년 큰언니 정명소가 유학 떠날 때

“음악가족 정명화 6남매를 후원하기 위한 재단이 미국서 생겼다. 워싱톤주 법에 따라 조직된 이 ‘정 코리안-아메리칸 화운데이숀’은 기업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순전히 한국의 재능 있는 5남매를 돕기 위한 조직으로 오는 11일 시아틀의 중앙극장에서 콘서트를 갖는다.”(동아일보 1967년 9월 9일)


▲ 동아일보 1963년 9월 12일

한편 국제콩쿠르를 통한 ‘별’의 탄생은 ‘진흙’ 같은 국내 음악교육계를 돌아보게도 했다.

“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금수품(禁輸品)으로 되어 있고 악보 등의 구입이 어려우니 이런 실정은 음악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 피아니스트 정진우 씨는 ‘수차에 걸쳐 격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한국의 입시지옥 하에서는 어린 음악인의 천재교육이 불가능하며 더구나 음악대학에서는 교양과목 등이 겹쳐 실기에 시간을 많이 낼 수가 없어 이런 교육제도 하에서는 세계적인 연주가의 배출은 어렵다’ (···) 고 했다.”(동아일보 1967년 5월 23일)


▲ 동아일보 1967년 5월 23일

바이올린 들고 더 넓은 세계로!


▲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1967년 줄리아드와 커티스음악원에 재직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폴 마카노비츠키를 초청하여 5월 6일 시민회관에서 임원식/KBS교향악단이 공연을 가졌다. A석 400원, B석 300원, C석 200원의 좌석은 당시 고가의 입장권이었다. 같은 해 7월 31일에는 루비노프의 리사이틀이 YMCA강당에 오르기도 했다. 11월 1일에는 47세의 아이작 스턴이 내한 리사이틀을 가졌다. 1923년 하이페츠, 1924년 크라이슬러, 1934년 짐발리스트, 1935년 엘만의 내한 이후 이뤄진 이 거장의 내한은 “일제 시대에 내한한 바이올리스트에 이어 (···) 전후(戰後)로서는 가장 거물급에 속하는 것”(동아일보 1967년 11월 2일)이었다.


▲ 동아일보 1967년 11월 2일

1960대에 한국음악계는 점점 국제화되었다. 위와 같은 유명 연주자들의 내한은 물론 해외에서 유학과 연주 활동을 하는 한국 바이올리니스트의 소식이 계속 날아왔다. 제4회 동아음악콩쿠르 입상 후 남가주대학교에 유학중인 임순복은 로스앤젤레스음악협회 주최 음악경연대회에서 입상 소식을 전했다(동아일보 1967년 7월 20일). 저 멀리 스웨덴의 이희춘은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수석으로 재직 중이었다.


▲ 동아일보 1967년 7월 2일


▲ 경향신문 1967년 7월 8일

“12세에 한국을 떠나 (···) 스웨덴의 왕립오페라단의 악장(61년)을 거쳐 3년 전부터 스톡홀름의 국립필하모니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약중인 그는 영희국민학교 6학년 재학 시 한국에 와있던 스웨덴 장교 텍스트롱 씨에게 재질을 인정받아 (···)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스웨덴 필하모니의 유일한 동양인인 그는 (···) 이번 귀국은 연주회(9월 27·28일, 시민회관)를 겸하여 오래 떨어졌던 가족들과 만나는 것이 큰 목적이라고 한다.”(동아일보 1967년 9월 9일)

그는 11세이던 1952년에 피난지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이화경향음악콩쿠르에서 특등을 했다. 1953년 스웨덴으로 떠날 때의 기사(경향신문 1953년 9월 24일)는 ‘도구(渡歐)’라는 표현을 썼다. ‘도미(渡美)’라는 표현이 익숙했던 그 시기에, 클래식 음악의 본국인 유럽은 미국보다 더 먼 곳처럼 느껴진다. 다음은 이희춘에 대한 한동일(피아노)의 회상.

“그 어린 나이에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을 정말 멋지게 연주했어요. 나중에 희춘이가 스웨덴으로 유학을 가게 돼서 제가 부산항까지 나가서 배웅을 했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바이올린 공부하러 유럽으로 떠난다는 건 당시로선 엄청난 일이었거든요.”(경향신문 2007년 4월 17일)

1967년 방훈은 파리국립음악원(CNSM)에 합격했다. 방훈은 후에 화가 방혜자의 동생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 동아일보 1967년 12월 14일

“서울예고 2년에 재학 중 65년 도불했던 바이올리니스트 방훈(18) 군이 불란서국립음악학교에 입학했다. (···) 지난 6월에 벨사이유 국립음악학교 바이올린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었다.”(동아일보 1967년 12월 14일)

지난 호에 이어 두 회에 걸쳐 1960년대 바이올린을 둘러싼 음악환경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초반에 국내 콩쿠르와 참가자들의 ‘경쟁’이 예비 음악도들의 ‘발굴’로 자연스레 이어졌다면, 중·후반을 지나면서부터는 이들의 유학행과 해외에서의 성과로 인해 한국 바이올린 환경은 점점 발전하고 국제적 감각을 체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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