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신, 에로스

유형종의 MYTH+MUSIC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7월 1일 12:00 오전

욕망을 상징하는 철부지 어린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해석


▲ 프랑수아 파스칼 시몽 제라르 ‘프시케와 에로스’(1797)

몬테베르디, 바그너, 버르토크 오페라와 프티, 맥밀런의 발레에 담긴 에로스 신화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다. 화살을 든 날개 달린 어린 신의 모습은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였다.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수위 높은 에로틱한 영화에 ‘미성년자 관람금지’ 딱지가 붙듯, 에로스는 성인에게나 허용되는 정서인데 그 실체가 어린 신이라니!

그리스 신화의 계보는 무척 산만하다. 역사가 아닌 신화일 뿐,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야기라면 앞으로 다시 정리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에로스는 그 산만함의 대표적인 사례다. 창세 신화를 보면 에로스의 이름을 진작부터 찾을 수 있다. 창세 신화도 여러 버전이 있지만,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우주에서 가장 먼저 생성된 것은 심연의 혼돈인 ‘카오스’였고, 그다음 광활한 땅인 ‘가이아(지구)’, 마지막으로 사랑의 힘인 ‘에로스’가 생겨났다. 즉, 에로스는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 중 하나였던 것이다.

카오스와 가이아가 그렇듯 근원적인 힘에 그쳤다면 신화의 소재로 부적절했을 것이다. 어떤 사연을 지닌 생명체가 아닌 절대적 존재이니, 인간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사랑에 관해 아무런 이야기도 후대에 전할 수 없었을 터. 그렇게 되었다면, 그리스 신화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에로스를 다시금 정의해야 했다.

에로스, 두 개의 화살로 세상을 움직이는 신

화살을 들고 다니는 날개 달린 에로스의 모습은 이러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단 올림포스 신 중 누군가와 관계된 아들이어야 했다. 에로스의 속성상 그 DNA는 아름다운 여신에게서 물려받았어야 하고, 정숙한 여신보다는 색을 즐길 줄 아는 여신이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여신이 바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였다. 에로스가 아르테미스의 아들이란 설도 있지만, 처녀이기를 맹세한 여신의 자식이라는 주장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다. 반면 에로스의 부친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고,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다수설에 의하면 에로스의 부친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이고, 소수설에 따르면 전쟁의 신 아레스다.

우여곡절 끝에 등장한 에로스의 속성은 정신적 사랑이 아닌 육체적 사랑이다. 하지만 어린 모습과 소년의 이미지로 인해 육체성을 띤다기보다는 남의 사랑을 조종하거나 파괴하는 매개자 구실을 한다. 에로스는 두 종류의 화살을 갖고 다니는데, 황금 화살을 맞은 자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납으로 만든 화살을 맞은 자는 증오의 감정을 갖게 된다. 어린 신이라는 것은 에로스가 철부지요, 좌충우돌하는 행보를 보이는 것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에로스는 신화나 예술 작품에서 대체적으로 조연을 맡아왔다. 미술 작품을 보더라도 그림의 중앙을 차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사랑에 빠진 주인공 사이에 살짝 끼어 있을 뿐이다. 청년 신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육욕적 사랑을 상징한다.

바로크 시대에는 오페라의 소재로 그리스 로마신화를 많이 차용했는데, 대개의 작품에서 서곡에 에로스를 등장시킨다. 초창기 오페라의 걸작인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식(1642)’을 보자. 서막에서 포르투나(행운)는 ‘비르투(미덕) 같은 건 부자도 될 수 없고, 영광도 안겨주지 않으므로 따라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으스댄다. 그러자 비르투는 ‘포르투나를 믿는 무리들은 신중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무엇이 진짜 인생인지 가르치고 있으므로 격이 다르다’고 되받는다. 거기에 아모레(에로스의 로마식 표기)가 나타나 ‘사랑의 신인 나를 빼고 세상을 논할 수 있느냐, 나는 작은 몸으로 오래전부터 다른 신들을 이겨왔다’며 ‘내가 말 한마디만 꺼내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한번 보라’고 기세를 올린다.

이 오페라에서 포페아는 권력욕에 사로 잡혀 남편을 버리고, 네로 황제가 아내를 버리도록 사주했음에도, 아모레의 도움으로 최후의 승자가 된다. 아모레는 서막뿐 아니라 극 중간에도 등장하여 포페아가 뜻을 이루도록 돕는다. 인간 욕망의 근원인 에로스가 행운과 도덕률조차 이겼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악이 선을 이겼다고는 볼 수는 없다. 에로스 자체로는 선과 악의 개념이 흐린 중립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와 프시케, 육체와 영혼의 결합

신화에서 에로스가 사랑의 매개자가 아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인간 여인 프시케와의 사랑 이야기다. 아프로디테는 사람들이 공주인 프시케가 너무나 아름다워 자신의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것조차 잊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그래서 아들 에로스를 불러 ‘네 화살을 저 무례한 여자 애한테 사용하라.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해다오’라며 사주한다. 어머니를 위해 프시케를 찾아간 에로스는 잠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기 화살에 실수로 찔려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프시케는 아름답지만 어떤 누구도 청혼을 해오는 이가 없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프시케의 아버지는 아폴론에게 신탁을 구하고, ‘프시케는 인간에게 시집갈 운명이 아니다. 산꼭대기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고, 그 어떤 신도 이를 거스를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신탁에 따라 신부의 차림을 한 프시케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도움으로, 험준한 산 위에 있는 에로스의 궁전에 도착한다.

에로스는 그날 밤부터 매일 프시케의 방으로 찾아가 사랑을 나누지만, 프시케는 남편의 숨결과 손길만 느낄 뿐 남편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자, 프시케는 너무나 무료해졌다. 하루는 남편에게 언니들을 궁전으로 부르게 해달라고 청한다. 에로스의 궁전에 도착한 두 언니는 프시케가 자신들보다 멋진 곳에 살자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그래서 괴물일지도 모르는 남자와 어떻게 같이 잘 수가 있냐며 의심을 부추긴다. 결국 언니들의 꾐에 넘어간 프시케는 몰래 등잔불을 밝혀 잠든 에로스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러나 실수로 어깨에 기름을 떨어뜨리고, 잠에서 깬 에로스는 ‘의심이 믿음을 짓눌러버렸구나. 사랑이 어찌 의심과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며 궁전을 떠난다. 이후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온갖 시련과 저주를 내리고,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프시케의 모습에 에로스는 다시금 사랑을 회복한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에로스와 프시케는 제우스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결국 아프로디테도 노여움을 풀게 된다.

프시케는 ‘나비’, 즉 영혼을 상징한다. 따라서 에로스와 프시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이 결합했다는 의미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체불명의 남편, 어울리지 않는 신분의 부부,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이야기에 대한 모티브는 물론, 의심과 호기심을 경계하라는 교훈도 준다.

오페라에서도 이런 상황들이 존재한다. 바그너의 ‘로엔그린(1850)’을 살펴보자. 남동생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엘자 앞에 미지의 백기사가 영웅처럼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엘자와 결혼을 약속한 기사는 절대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말라며 경고한다. 그러나 악녀 오르트루트가 의심을 증폭시키자, 엘자는 초야에 금지된 질문을 하고 만다. 결국 둘의 결혼은 신혼 첫날 파국을 맞이한다. 오페라에서 쓰인 ‘결혼행진곡’이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결혼행진곡이고, 실제로 이 곡을 결혼식에서 사용하기엔 다소 부적합한 게 사실이다.


▲ 메트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의 섬’ ⓒUrmana Smith

잔혹 동화를 바탕으로 하는 버르토크의 ‘푸른 수염 영주의 성(1918)’도 비슷하다. 유디트는 성 안 7개의 비밀의 방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절대 알려고 해선 안 된다는 남편을 추궁하여 방문을 열 때마다 그녀는 별것 없는 비밀을 접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일곱 번째 방에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치명적인 비밀이 숨어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랑과 죽음의 입맞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종교적 관점에서 육욕적이라는 이유로 금기시해온 에로스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그도 처음에는 에로스를 성적 욕구의 개념으로만 바라봤지만, 연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자기보존 본능’과 연결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성 충동과 자기보존을 합친 ‘삶의 본능’을 에로스로 정의했다. 사랑, 탄생, 존재, 생명의 시작 등이 에로스의 근본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에로스를 포기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스스로 삶의 희열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인간은 건강한 에로스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타나토스’를 제시했다. 타나토스 역시 신화에 등장하는데, 관련된 이야기는 없으며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히프노스(잠), 모로스(나쁜 운명), 케레스(파멸)와 형제·남매 지간으로, 죽음을 의인화한 신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타나토스는 에로스와 대조적으로 죽음에 대한 동경이다.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은 본능이며 파괴, 죽음, 무(無), 해체, 종말 등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의 역학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외부 세계의 기본적인 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예술가들의 창작욕을 자극하는 훌륭한 소재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개념이 결합했을 때 가장 폭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에는 ‘죽음과 입 맞추는 사랑’이라는 ‘에로토스(Erotos)’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전적으로 대조되는 두 개념이 만나 하나로 일체화하는 과정과, 그로 인한 결과물이 주는 강렬함이 예술적 동기를 자극하게 된다. 무모한 열정과 광기에 의해 촉발되는 결과물은 대체적으로 비극적이다.


▲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Urmana Smith

오페라에서 에로토스를 가장 강렬하게 뿜어내는 걸작은 바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1865)’일 것이다. 사랑하는 트리스탄의 죽음을 접한 이졸데는 스스로 황홀경에 빠져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그 전에 두 사람이 열락의 밤을 보내는 동안에도 죽음을 희구하는 듯한 암시가 계속된다. 발레로는 영화 ‘백야’의 도입부에도 짧게 인용되었던 장 콕토 대본, 롤랑 프티 안무의 ‘젊은이와 죽음(1946)’, 함부르크 왕가의 황태자 루돌프의 자살을 다룬 비극적인 이야기 케네스 맥밀런의 ‘마이얼링(1878)’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을 다룬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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