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소리의 기록에서 벗어나 스튜디오의 독창적 작품으로 발전하다
한참의 세월을 유럽에서 방황하다가 마흔 넘긴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그의 고국 미국에 가까스로 알리게 된 시드니 베셰(1897~1959)는 1940년 그의 친구 존 라이드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베셰 혼자서 여러 악기를 오버더빙으로 녹음해 하나의 곡을 완성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클라리넷, 소프라노와 테너 색소폰, 피아노를 연주했던 베셰는 몇 달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패츠 월러의 연주로 유명했던 ‘The Sheik of Araby’와 자신의 새로운 곡 ‘Blues of Bechet’를 위한 더블베이스와 드럼 파트를 완벽하게 습득했다. 이듬해인 1941년 4월 시드니와 존은 오버더빙 레코딩을 위해 RCA-빅터 스튜디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버더빙에 관한 환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1925년 마이크로폰의 발명과 함께 전기 녹음 방식이 시작되면서 음반 제작자들은 더욱 다양한 소리를 녹음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어쿠스틱 녹음 방식으로는 어려웠던 관현악단의 큰 음량을 전기 녹음 방식으로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제작자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1902년에 녹음된 최초의 음반인 엔리코 카루소의 노래를 들으며 아쉬워했다. 1920년대 후반에도 카루소의 이 음반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였지만 1902년의 녹음은 단순히 피아노 반주로 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카루소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녹음을 소유하고 있던 RCA-빅터는 1916년 오리지널 마스터 스탬퍼에 손상이 생길 것에 대비해 오리지널 마스터를 복사하는 ‘빅터 S/8’이란 장비를 개발했다. 이 장비로 원본으로부터 복사본을 떠놓고 그 위에 새로운 소리를 골(groove)에 덧입힐 수 있었는데, 그리하여 카루소의 최초 녹음은 그의 사후(死後)에 녹음된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시드니 베셰의 녹음 작업은 여전히 무모한 도전이었다. 단순히 한 번의 오케스트라 녹음을 입혔던 카루소의 작업과는 달리 베셰의 프로젝트는 여섯 개의 악기를 따로따로 녹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셰와 라이드가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이미 프로듀서 스티븐 스콜스와 엔지니어 프레드 메이시의 표정은 불안함과 피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 베셰의 두 곡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매우 짧은 2분 8초와 1분 51초에 불과했지만, 전체 4분을 녹음하기 위해서는 한 악기의 녹음이 끝날 때마다 계속해서 복사본을 만들어 그 위에 소리를 덧입히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녹음은 무려 두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스튜디오가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두 번째 곡 ‘Blues of Bechet’에서는 베이스와 드럼 녹음을 생략한 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두 곡은 ‘시드니 베셰 원맨밴드’란 이름으로 발매되었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오버더빙은 두 가지 점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녹음이라는 것이 소리를 바늘의 진동으로 음반 표면에 직접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연주가 잘못되었을 때 이전 녹음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해서 반드시 복사본을 만들어 그 위에서 더빙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둘째로 연주가 잘못되면 수정이 불가능하므로 처음부터 다시 연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베셰의 경우에도 이전 녹음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새로운 파트를 오버더빙했는데, 연주 도중 이어폰이 빠져 연주를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연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지난한 과정의 오버더빙은 1947년을 기점으로 음악 녹음의 보편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로 마그네틱테이프의 등장이었다.
사실 에디슨의 레코드 실린더나 베를리너의 레코드 디스크가 처음 등장했던 19세기 말, 소리를 기록하는 방식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동시대의 오벌린 스미스, 발데마르 포울센 등의 발명가들은 자석을 통해 강철선 같은 물체에 소리를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방식은 상용화와 상품화에 문제가 있었지만 마그네틱테이프의 개발로 기술의 급격한 진보를 이루면서 1930년대 나치 정권 아래 독일에서 완벽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78회전 레코드보다 음질 면에서 월등했을 뿐 아니라 3분대로 갇혀 있던 78회전 음반의 수록 시간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제국방숙국협회의 자료실에서 마그네틱테이프로 생생하게 녹음된 수십 개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음악회 실황을 발견하고는 충격에 빠졌다. 미국의 암펙스 사는 곧바로 그 기술을 분석, 모방했고 얼마 후 빙 크로스비는 자신의 라디오 방송을 릴 테이프에 담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는 기존의 음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다.
이제 월등한 음질과 간편한 녹음의 방식은 분명해졌다. 녹음을 음반 표면에 직접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마그네틱테이프에 담아 한꺼번에 음반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존 멀린과 암펙스가 제작한 6.35mm 녹음테이프에는 초기에 두 개의 녹음 트랙을 실을 수 있었는데, 1948년에 이르러서는 여덟 트랙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마그네틱테이프를 이용한 패티 페이지(1927~2013)의 ‘Confess’는 그녀의 목소리를 4번 더빙하여 환상적인 화음을 만들어냈다(78회전 음반 레이블 위에는 그녀의 이름이 네 번 쓰여 있었다). 기타리스트 레스 폴(1915~2009)은 1948년부터 자신의 기타를 8번 녹음해 두 배의 속도로 빠르게 재생한 녹음 ‘Lover’를 발표했고, 1950년 아내 메리 포드의 음성을 더빙한 곡 ‘How High The Moon’을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이 신기술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제 오버더빙은 보편적인 녹음 방식이 되었고, 녹음 중 오류가 발생해도 그 부분만을 다시 녹음해 테이프로 간편히 이어 붙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음반은 실제의 소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 스튜디오의 독자적 생산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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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스 폴 ‘The Best of The Capitol Masters: 90th Birthday Edition’
Capitol/09463-11411-2-6|1948~1950년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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