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오페라를 둘러싼 음악문화

ACROSS THE 1960's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8월 1일 12:00 오전

열악한 환경 뜨거운 열정 – 민간 오페라단의 약진과 국립오페라단의 활동 속에서 오페라는 이 땅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기악이 악기라는 물적 토대와 인적 훈련 과정을 가져야 하는 것에 비해, 성악은 사람의 몸만 있으면 된다는 조건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양악 중에서도 성악 전공자들이 유독 많았다. 또한 교회의 찬송가와 학교의 음악교육을 통해 퍼진 창가를 바탕으로 성악은 기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적으로 풍부해졌다.

1960년대는 극장을 비롯해 오페라에 필요한 제반 부대 시설, 연출가, 성악가, 관련 스태프 등 오페라를 제작할 수 있는 인프라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유한철(평론)은 “종합예술로서 오페라 운동은 아직은 모두 직업화하지 못한 데 난점이 있다”라며, 오페라단 소속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없지만 직업합창단의 대두, 배우와 무용수들의 참여, 무대장치와 조명 방식을 통하여 발전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쨌든 1960년대는 오페라를 하기에 넉넉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페라를 하고자 한 이유는 그것이 유럽 예술의 대표적인 장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간 오페라단과 대학 오페라의 약진
1948년 1월 16~20일에 명동 시공관에 조선오페라협회의 ‘춘희’(라 트라비아타)가 올랐다. 이는 한국 음악사에 최초의 오페라로 기록되고 있다.


▲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의 공연 장면(1948)

이 공연을 계기로 1940~1950년대는 5개의 오페라단이 창단되었고, 이후 1960년대는 4개, 1970년대는 7개, 1980년대는 8개 단체가 창단되었다.


▲ 동아일보 1960년 12월 2일

1960년 한 해만 해도 고려오페라단이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와 김대현 ‘콩쥐팥쥐’, 프리마오페라단이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한국오페라단이 베르디 ‘오텔로’를 선보였다(고려오페라단은 현존하는 (사)고려오페라단과는 관계없다).

1960년까지는 규모가 작은 명동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대부분의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졌다. 1960년 이후로는 1961년 개관한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위치)이 오페라 공연의 중심이 됐다. 국립극장에 비해 더 넓은 공연장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 1959년 건축 중인 서울시민회관(사진 내 왼쪽)

1962년 국립오페라단 창단 전부터 국립극장은 지정 공연 또는 재정후원 형태로 민간오페라단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단장이나 단원들이 사적으로 재원을 조달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58년에 창단된 프리마오페라단은 1961년에 플로토 ‘마르타’를 정기공연으로 올렸다. 연출은 최현민, 지휘는 김희조가 맡았다.


▲ 동아일보 1961년 12월 15일


▲ 대한뉴스에 나온 프리마오페라단의 ‘마르타’ 공연

‘마르타’는 대한뉴스에 나오기도 했다(대한뉴스는 1953년부터 1994년까지 매주 대한민국 정부가 제작하여 영화관에서 상영했던 영상 보도물이다).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한 당시 그랜드 오페라는 늘 화제를 낳았고, 국민의 문화적 관심과 일상에 자리 잡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공연의 생산은 수용자나 사회적 요구라기보다는 큰 무대에 서보고 싶은 성악가 자신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 경향신문 1962년 3월 27일

음악대학은 새로운 오페라와 초연작의 발생지였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토다. 사회적 책임과 경제적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음대생들은 ‘소규모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올렸다. 이화여대는 1961년 글룩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1963년 퍼셀 ‘디도와 에네아스’, 1966년 슈트라우스 ‘박쥐’, 1968년 스메타나 ‘팔려간 신부’, 1969년 훔퍼딩크 ‘헨젤과 그레텔’ 등을 본교 이대강당에 올리며, 이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서울대음대는 1962년 메노티 ‘전화’와 페르골레지 ‘마님이 된 하녀’를 국립극장에서, 1966년 푸치니 ‘쟌니 스키키’를 서울대음대 강당에서 선보였다. 연세대 음대는 1962년 메노티 ‘아말과 밤에 찾아온 손님’을 연세대 강당에서, 1963년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모차르트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을 국립극장에 올렸다. 당시 현대오페라에 속한 메노티의 두 작품이 1962년 서울대와 연세대에 의해 오른 것이 우연 치고는 재밌다.

해외 오페라 수용과 한계
1960년 오페라계는 외국 작품의 ‘수용’과 ‘초연’, 그리고 이를 위한 오페라단의 ‘양적 증가’가 활발히 일어나던 때다. 1962년 국립오페라단 창단에 이어 1968년 김자경오페라단, 1969년 박인수(테너)에 의해 서울오페라 아카데미가 창단되면서 수용과 초연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서울오페라 아카데미는 1969년 단회 공연 이후 활약이 전무하다).

당시 성악가들의 꿈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같은 오페라 무대를 만들고, 그곳에 서보는 것이었다. 1945년 대동아전쟁이 끝나고 해방 이후 성악가들이 먼저 했던 일이, 이인선(테너)을 중심으로 베르디의 ‘춘희’를 올린 것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 오페라계의 서구화 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에서 오페라란 ‘어떻게 오페라의 방법과 체계를 우리 언어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닌, 오페라를 어떻게 하면 외국 극장처럼 그대로 해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1967년 여석기(연극평론)가 쓴 ‘1967년 상반기 연극’이라는 글 속의 지적은 연극계를 향한 것이지만, 오페라계에도 얼마든지 적용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왕’, 셰익스피어 ‘햄릿’, 체호프 ‘삼자매’ ‘벚꽃동산’ 등은 고전, 근세 그리고 근대극의 각각 정수(精粹)에 속하는 것이며 이 선택에 관한 한 한국 극단들은 눈이 높고 지나칠 정도로 욕심을 부렸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눈이 높고’ 욕심이 지나친 데 있지 않을까. 고전 대작을 택했다고 해서 작품의 성과와 자동적으로 커질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모두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대작이니까 도전해볼 만하다는 정도로 달려드는 폐단이 없었던가 한번 냉정하게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거의 전편이 국내에 소개되는 진기록을 세운 때가 1960년대다. 해외 극작가의 작품에 대한 모방적 태도는 오페라에서 해외 작곡가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마찬가지였다. 연극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오페라에 베르디·푸치니·바그너가 있는 것처럼.

국립오페라단 창단
1962년 3월 21일 국립극장이 개관했다. 개관에 앞서서는 국립극단의 편성이 끝났고, 그 해 2월 국립오페라단과 국립국극단, 국립무용단이 창단됐다.


▲ 경향신문 1962년 2월 7일

5·16 이후 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는 다른 단체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여러 오페라단의 통합을 지시했다. 그 결과 서울오페라단, 한국오페라단, 고려오페라단이 국립오페라단으로 흡수·통합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오페라단들이 국립단체로 통합된 것은 교향악단이 방송사(KBS교향악단)와 서울시(서울시립교향악단) 소속으로 남아 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것은 오페라단 구성원 숫자가 교향악단처럼 많을 필요는 없었으며, 교향악단이 최소 월 1회 이상의 정기·부정기 연주회를 함으로써 월급이 지급되어야 하는 것과 달리 오페라단의 예산은 공연 제작비만 상정해도 된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단 시 이인범이 단장을, 김자경이 부단장을 맡은 국립오페라단은 당시 주요 성악가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국립오페라단 공연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당한 권위를 지니는 것이었다.


▲ 경향신문 1963년 6월 4일

국립오페라단은 창단 시 연 3회의 그랜드 오페라를 비롯해 연주회 형식의 공연도 자주 올리겠다는 계획을 피력했으나 1964년까지 연 1회 공연을 가졌고, 1965년에 들어 연 2회 공연을 유지했다. 그러나 창단한 지 일 년도 못 된 1963년, 오페라 제작비를 극장 보수비에 씀으로써 준비 중이던 베르디 ‘아이다’가 불발로 끝나버리는 등 난관에 봉착했다. 캐스팅 문제도 한 건 했다. 오페라 무대가 전무후무했기에 오페라 출연에 있어서는 누구나 ‘신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캐스팅 문제는 기성과 신진의 대립으로 치솟았다.

“출연자들의 배역에 대한 불만과 주연급 신인 등용에 대한 기성층의 반발, 부당한 출연료 문제, 국립극장의 독선적 처사로 인한 오페라단과의 알력, 단 자체의 내분이 가져온 중진 가수들의 사임 등 촉박한 시일과 외래 연출가 지휘자 문제 (···) 공연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좌절되고 만 것이다.” (동아일보 1963년 4월 4일)


▲ 동아일보 1963년 4월 4일

1964년 도니제티 ‘루치아’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캐릭터가 핵심적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고려보다는 등장인물의 수가 적다는 이유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국립오페라단은 경제적 제약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며 해외 오페라 수용과 초연에 힘썼다. 1962년 5월 모차르트 ‘돈 조반니’, 1964년 도니제티 ‘루치아’, 1965년 베르디 ‘아이다’, 1967년 베버 ‘마탄의 사수’ 등을 초연했다. 참고로 국립오페라단의 초연은 1972년 푸치니 ‘투란도트’, 1974년 바그너 ‘방황하는 화란인’, 1975년 홍연택의 창작 오페라 ‘논개’, 1976년 바그너 ‘로엔그린’, 1977년 폰키엘리 ‘라 조콘다’ 등으로 이어졌다.

창작 오페라의 시도와 한계


▲ 동아일보 1962년 4월 13일

현제명이 작곡한 창작 오페라 ‘왕자호동’의 1954년 초연 이후, 창작 오페라는 긴 침묵에 들어갔다. 그러나 1960년 김대현의 ‘콩쥐팥쥐’, 1962년 장일남의 ‘왕자호동’이 발표되면서 이른바 한국적 오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1960년대에 가시화되었고, 장일남은 자신의 세 번째 오페라로 ‘원효대사’를 공연하며 1970년대의 막을 열었다.

국립오페라단은 국내 창작 오페라의 중흥을 위해 창단 공연으로 과감하게 창작오페라를 결정하여 작품을 공모했다. 그 결과 장일남의 ‘왕자호동’이 당선되어 1962년 4월 13일부터 19일까지 이우근 지휘, 안형일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안형일은 “반평생을 두고 소망해 오던 국립오페라단의 실현을 보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데까지 기어코 민족오페라의 형성에 이바지하겠다”(동아일보 1962년 2월 8일)고 밝혔다.

이런 민족오페라의 형식과 기본 주조는 베르디나 푸치니로 대표되는 19세기 그랜드 오페라였다. 굳이 유럽 19세기 오페라를 고집한 이유는 그것들이 서양음악의 핵심처럼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민족오페라라는 명분은 그다지 실현되지 못했고, 심지어 외국 작품을 선택하여 공연할 때에도 ‘민족오페라 수립’에 도움 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한 게 아니라 경제적 문제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했다.


▲ 동아일보 1962년 4월 26일

‘왕자호동’은 현제명에 이어 장일남에 의해 두 번 태어난 격이다. 훗날 공연된 장일남의 ‘원효대사’ 역시 ‘왕자호동’과 같은 전기(傳記) 오페라다. 1960년대 창작 오페라의 소재는 대부분 고전이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었다. 19세기에 민족주의를 전개한 대표적인 나라인 러시아에서 오페라를 통해 그러한 에너지를 분출시켰던 것을 세세히 돌이켜보지 않더라도, 오페라는 어느 나라의 작곡가에게도 손쉽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개시킬 형식으로 비치지는 않는 듯 보인다. 한국 작곡가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문화적 기운은 1960년대를 지나,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이 진행된 1980년대에도 이어져 이와 같은 소재 선택과 작업은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한편에서는 실험적 창작 오페라를 위해서 그런 전통적 소재의 짐을 어깨에서 내리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아무튼 고전과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든, 현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든, 그 소재가 우리들의 현실적 삶을 왜곡시키지 않고 훌륭히 재창조한 것이며 풍요로운 정신유산으로 보존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환영할 수 있는 것이다.


▲ 동아일보 1969년 10월 3일

1960년대 창작 오페라의 위와 같은 흐름 속에서 1969년 4월, 윤이상은 뮌헨 바이에른 국립극장의 총감독 권터 레네르트로부터 1972년 뮌헨올림픽의 서막을 여는 축전오페라를 위해 새 작품을 위촉받아 국내외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극연출가들의 약진
1960년대 오페라 문화는 성악가들의 발군만으로 이뤄진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페라 공연의 성행은 둘째 치고, 작품으로서 완성도를 갖추는 데에는 여러 연출가들이 큰 몫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연출가의 종류는 크게 두 부류로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성악가로서(혹은 성악가 출신으로) 연출을 맡은 것이다. 오현명(베이스)은 1965년 푸치니 ‘라 보엠’(국립오페라단), 1966년 베르디 ‘리골레토’(국립극장 제작), 1969년 푸치니 ‘라 보엠’(서울오페라단 아카데미)을 맡았다. 그 외에 홍진표(테너), 이인영(베이스)이 활동했다. 지휘는 임원식과 김희조(서울대 김덕기 교수 아버지)가 주로 맡았다.

연출가 부류의 두 번째는 연극과 영화 등에 기반을 둔 연출가들이다. 이들은 오페라로 월경하여 연출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활동했다. 다양한 장르의 넘나듦은 예나 지금이나 활발했다는 것을 연출가 이진순, 이해랑 등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다.


▲ 동경학생예술좌 단원 시절의 한 이해랑(뒷줄 맨 왼쪽)과 이진순(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이진순(1916~1984)은 일본대학 시절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귀국 후에는 극예술연구회에서 1년간 배우로 활약했다. 정식 연출가로서의 입문은 1947년 김광주(소설가 김훈 아버지)와 조직한 극단 신지극사(新地劇社)의 ‘태양이 그리워’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연출가로 인정받은 그는 다양한 장르를 연출했다.
연출이라는 개념이 지금보다는 훨씬 희미하던 1960년대. 하지만 ‘오페라 연출’만 떼어서 본다면, 이 시기는 분명 이진순의 전성기였고, 이진순이라는 연출가를 견인차로 하여 오페라가 성숙하던 때였다. 그는 1964년 푸치니 ‘토스카’(국립오페라단), 1965년 푸치니 ‘라 보엠’(국립오페라단), 1967년 베버 ‘마탄의 사수’(국립극장 제작), 1968년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푸리마오페라단), 1969년 구노 ‘로미오와 줄리엣’과 푸치니 ‘토스카’(김자경오페라단) 등을 연출했다. 1970년대 들어 창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연출기법은 대형 무대의 스펙터클을 강조하고 시원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랜드’한 성격의 오페라 연출과 잘 맞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해랑은 이진순 다음으로 굵직한 공연들을 맡았다. 그는 1960년 베르디 ‘일트로바토레’(고려오페라단), 1965년 베르디 ‘아이다’(국립오페라단)와 현제명 ‘춘향전’(고려오페라단), 1968년 구노 ‘파우스트’(국립오페라단) 등을 연출했다.

연극연출가인 이들이 어떻게 오페라 연출을 맡았던 것일까. 여기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동경학생예술좌에서 수학했던 경력이 많은 점을 시사한다. 1934년 동경 유학생들이 ‘이 그룹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연극 수업의 길을 밟아 장차 한국으로 돌아가 연극을 통한 민족의 얼을 부흥’하고자 창단한 연극 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다. 이후 1940년 해체하기까지 이들은 연극을 중심으로 음악·무용·미술 등을 접목하여 일본 내에서 공연을 가졌고, 이를 위한 독회와 기관지 ‘막(幕)’을 발행하기도 했다. 1939년 발행한 ‘막(幕)’ 3호를 보면 ‘음악극론’ ‘무용과 연극과의 교류’ 등이 있다. 공부와 체험의 폭이 공연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아울렀음을 짐작케 한다. 이진순과 이해랑은 1935~1938년에 이곳에서 활동했다. 1960년 베르디 ‘오텔로’(한국오페라단)를 연출한 평론가 박용구(2014~2015)도 이곳 출신이다. 결과적으로 동경학생예술좌 중요 멤버인 이진순과 이해랑이 음악·연극·무용·미술 등이 ‘결합’된 오페라를 연출하는 데 유리했던 것이다.

이 외 연극연출가 김정옥이 1966년 장일남 ‘춘향전’(국립극장 제작), 연극배우 출신으로 훗날 영화 제작자·감독으로 활동한 최현민(1921~1998)이 1960년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와 1961년 플로토 ‘마르타’(푸리마오페라단)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1960년대 오페라계의 한계
오페라는 공연에 있어서 좋은 성악가도 필요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적 환경이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1960년대의 오페라 문화는 문화적·경제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와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것은 미국 음악계와의 관계다. 1950년대 미군정 아래 정치와 경제가 놓이면서 문화와 예술 역시 마찬가지의 위치가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서양음악의 본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미국에 비해 소홀했고 ‘먼 곳’이었다. ‘객석’ 6·7월호에서 다룬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한 음악계의 상황만을 보더라도 미국과의 관계는 유학, 교육, 연주 등에 있어서 유럽에 비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베르디·푸치니· 바그너 등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들의 고향이자 오랜 역사의 오페라 전용극장이 즐비한 유럽이 낳은 오페라 문화를 제대로 수용하고 교류할 수 없는 환경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한국과 미국의 긴밀한 공조 체제는 악단(樂團)과 오페라계만의 일이 아니었다. 연극계의 경우도 1950년에서 1969년까지의 해외 연극 중 가장 많이 소개된 작품들은 미국 현대극이었고, 한국과 미국의 친밀한 관계는 남산 드라마센터의 건립으로 상징화되기도 했다. 한국의 1960년대 미국과의 관계에서 서양음악의 수용과 발전에 대해서는 따로 장을 마련하기로 하며, 1960년대 한국의 오페라 문화를 여기까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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