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한지호

한 발짝 더, 본질을 향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9월 1일 12:00 오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이후,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침착하고 단단하다

1992 서울 출생
2007 서울예고 입학
2008 독일 에센폴크방 예술대 입학
2009 베토벤 콩쿠르 3위
2011 슈베르트 콩쿠르 2위·특별상, 텔레콤 베토벤 콩쿠르 2위·청중상
2012 하노버 음대 대학원 입학
2014 서울국제음악콩쿠르 1위, 지나 바카우어 콩쿠르 2위, ARD 콩쿠르 1위 없는 2위·청중상·현대음악특별상
2016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4위

유난히 뜨거운 8월이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와 카페로 향하는 길목에서, ‘오늘이 올해 가장 더운 날임에 분명하다’고 우리는 투덜거리며 웃었다. 그는 빠른 시간 안에 상대방을 무장해제시켰다. 가식 없는 솔직함이 한지호의 무기였다. 그의 연주에서 전달되는 직접적인 감정처럼. 역시, 타고난 성정은 음악에 배어나오게 마련이다.

내리쬐는 햇빛만큼이나 뜨거운 관심이 그에게 향하고 있는 요즘이다. ARD 콩쿠르 1위 없는 2위 수상 등으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온 한지호는 ‘2016 월간 객석 선정 차세대 젊은 예술가’에 이름을 올리며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로 꼽힌 바 있다. 그리고 지난 5월, 기대 어린 시선에 응답이라도 하듯 그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4위에 입상했다. 스무 명이 넘는 한국인 참가자 중 6위 안에 든 유일한 연주자여서 더욱 반가운 소식이었다. 현지 언론은 그를 가리켜 “거대한 감성의 소유자”라 평했고,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피아니스트 김대진은 “‘심금을 울렸다’고 표현할 만큼 호소력 강한 연주였다”는 소감을 전했다.

콩쿠르를 마치고 귀국한 그가 최근 올랐던 무대는 흥미롭게도 독주회가 아닌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와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듀오 공연이었다. 그러한 유연함이 그를 더욱 깊게 만드리라 생각한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지호도 지금, 그의 여름을 마주하고 있다.

나, 한지호의 시작

다섯 살 때, 조그만 장난감 피아노가 집에 있었어요. 그걸 뚱땅거리면서 노는 제 모습을 보시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듬해 생일에 진짜 피아노를 선물해주셨죠. 어느 날 제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집에 와서 그대로 피아노로 쳤대요. 그걸 본 가족들이 제 음악적 재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 두 분 모두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셔서 집에서 항상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으셨어요. 덕분에 늘 음악을 듣고 자랐죠. 그러던 중 연주회장에 가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실제로 연주하는 걸 들었는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나도 저렇게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CD와 DVD도 열심히 수집해서 보고 듣고, 연습도 열심히 했죠.

스승들의 가르침

중학교 시절 피경선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어요. 지금의 저를 이루는 것들의 거의 대부분을 그때 배웠죠. 피경선 선생님은 ‘음악적으로 생각하기’를 강조하셨어요. 테크닉은 연습하면 늘 수 있지만, 음악적 사고가 익숙하지 않으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표현이 인위적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잖아요. 어린 나이였지만 음악에 관한 고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주셨어요. 지금 하노버에서 저를 지도하시는 아리에 바르디 선생님은 제 상상력을 한없이 넓혀주시는 분이에요. 아무리 독특하게 연주해도 절대 지적하시지 않아요. 가끔 아이디어를 주시는데, 어떻게 연주하라는 직접적인 코멘트가 아니라 작품 자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서를 주시죠.

해외 콩쿠르 도전기

여러 콩쿠르에 참가했고 좋은 결과를 거둔 대회들도 있지만, 아쉽게 떨어진 경우도 물론 있어요. 어린 연주자들은 아무래도 콩쿠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다 보니 그에 대한 압박이 없진 않죠. 하지만 결과는 제 손에 달린 게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어떠한 상황이든 내가 좋은 연주를 하는 것이 곧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 그 이후 일어나는 일들은 내 손을 떠난다는 것. 그게 전부예요. 사실 워낙 걱정 없는 성격이기도 해요. 콩쿠르에 떨어지면 속상하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전 한두 시간 멍하니 있다가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지는 편이에요. 대부분 콩쿠르 떨어지면 바로 그 도시를 뜨는데, 전 다음 날부터 도시 구경하면서 놀아요.(웃음)

연주자로서 전환점이 된 순간

빈에서 있었던 베토벤 콩쿠르 결선 무대가 의미 있는 순간이었어요. 첫 해외 콩쿠르여서 가뜩이나 두근거렸는데, 결선 장소가 바로 무지크페라인이었죠. 유명한 연주 영상들에서만 봐오던 무지크페라인인데, 내가 이 무대에 서다니!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심지어 결선 며칠 전에는 키신이 바로 그곳에서 연주회를 했어요. 존경하는 수많은 연주자들이 올랐던 무대에서 제가 연주를 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2016 월간객석 선정 차세대 젊은 예술가

감사한 타이틀이에요. 열심히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가 선정되다니, 정말 감사하죠. 한편으로는 예술가로서 무게감과 책임감이 더 커졌습니다. ‘내 색깔을 찾고 내 음악 세계를 확실히 다질 때가 됐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지금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 제가 보내고 있는 시간들을 통해 미래의 제 모습이 만들어질 테니까요.

본질을 담아내는 음악을 위해

예전에는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에 매료됐다면, 지금은 그것이 지니는 ‘깊이’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이 담긴 음악 말이에요.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말고, 사람을 바꾸고 시대를 바꾸는 힘이 있는 음악요. 작곡가와 연주자와 청중이 음악을 통해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을 만들고 싶어요. 음악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렬한 힘을 가졌다는 걸 믿거든요. 연주가 끝나면 청중이 음악을 듣기 전과는 다른 마음을 품고 돌아가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그런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철학이나 역사, 미학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나에게 영감을 준 예술가

최근에는 호로비츠와 굴드, 포고렐리치의 연주를 즐겨 들어요. 예전에는 소위 ‘정석대로 잘 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하고 독특한 개성을 지닌 연주자들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자신만의 독창적인 색깔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도 ‘내 건 내 거다’라는 확신이 그들의 음악에서 느껴져요.

한지호만의 음악

실제로 대다수 청중이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연주는 ‘노멀하고 정확한’ 연주예요. 하지만 만약 청중이 제 해석을 너무 독특하다고 외면할 위험이 있어도, 저는 크게 괘념치 않을 것 같아요. 연주 행위 자체가 음악 안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를 드러내고 교감하는 것이 목적인데, 작품에 대한 제 본심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순 없지 않을까요? 또 스타일을 바꾼다고 해서 청중이 그 바뀐 결과에 동의하리라는 법도 없는 것 같고요. 다만 저는 연주를 듣는 사람들이 제 해석에 설득되어 공감할 수 있도록, 진심을 음악에 고스란히 담도록 노력해야겠죠. 최근 도쿄에서 플레트뇨프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를 들었습니다. 점점 커지면서 고조되는 그 유명한 도입부에서 반대로 점점 작아지더라고요. 그걸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났어요. 그뿐 아니었어요. 연주 내내 온갖 독특한 표현들이 가득했죠. 그런데 ‘와, 정말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해석에 동의가 됐어요. 다른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고요. 그의 연주가 지닌 힘이 청중을 설득한 것이겠죠. 특이한 표현에만 초점을 맞춰 인위적으로 연주했다면 그렇게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철저한 연구와 거듭된 고민을 거친,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어야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해요.

레퍼토리에 대한 고민과 욕심

프랑스 음악과 현대 작곡가의 작품을 많이 배워두고 싶어요. 충분히 무르익어 제 것으로 만들고 나서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지금은 라흐마니노프·슈만·베토벤을 좋아합니다. 묵직한 감정을 긴 호흡으로 끌고 나가는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강렬한 음악에 대해 제가 느끼는 감정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잘되는 작품에 끌려요.


▲ 2016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4위에 입상한 한지호


관심 있는 다른 예술 장르

미술 전시회를 종종 보러 가요. 얼마 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전시회를 봤어요. 예전에는 그림을 봐도 그저 ‘좋은 그림 보니까 당연히 좋지’ 하는 생각으로 전시를 다녔는데, 이번엔 좀 달랐어요. 전시회의 모든 작품을 감상하고 나니 ‘공연장에서 좋은 연주를 쭉 듣고 나왔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어요. 화가 이중섭의 감정들과 고독, 깊은 내면세계가 그림 하나하나에서 절절하게 다가왔어요. 음악도 그렇지 않나요?

평단과 대중에게 듣고 싶은 말

‘감동적이다’는 말이 듣고 싶어요. 그게 곧 제 연주의 목적이니까요. 감동이 없으면 살아 있는 연주라고 할 수 없겠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감정 교류가 일어나는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온전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요. 그리고 음악은 그 교감을 도와준다고 생각해요. 물론 모든 사람이 제 연주에서 같은 인상을 받진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하는 건 연주자의 숙명이겠죠.

앞으로의 계획

독일에서 2월에 녹음한 음반이 올해 안에 발매될 것 같아요. 쇼팽 프렐류드와 슈만 ‘크라이슬레리아나’를 담았는데, 첫 음반이다 보니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무대에서의 연주와 음반 녹음은 많은 부분이 달랐어요. 똑같은 곡을 연달아 몇 번씩 치는 과정을 겪으면서 스스로 컨트롤하는 법을 배워나갔어요. 향후 일 년 간 연주 일정은 미국, 유럽, 일본, 홍콩 등에서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의 무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네요. 어서 준비하겠습니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Bruno Vessi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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