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부터 1964년까지 피아노를 둘러싼 연주·교육·콩쿠르·유학 환경을 알아본 9월호에 이어, 10월호에도 1965·1966년의 피아노 환경과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국내 피아노 생산에 대해 살펴본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어린 음악가들의 열풍. 특히 1954년 한동일 출연 이후 피아노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9월호에서 살펴본 해외 피아니스트들의 내한, 음악계의 ‘하이틴’ ‘틴에이저’ ‘로우 틴’로 불리던 10대 피아니스트들의 활동과 미국 유학 열풍, 파벌의 형성과 문하생들의 연주 활동은 이번에 살펴볼 1965·1966년에도 변함이 없었다(몇몇 용어의 경우 역사적 맥락과 시대 상황을 고려해 표기했으며, 당대의 용어는 그대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해외 피아니스트들의 내한
1964년 3월에 내한한 유리안 폴 카롤은 이듬해인 1965년 2월에 내한하여 임원식/KBS교향악단과 서울시민회관에서 협연을 가졌다. 이상만(평론)은 특히 오케스트라 연주가 좋았다며 “절름발이식 종래의 협주 태도에서 완전히 탈피”(동아일보 1965년 2월 16일)했음을 칭찬했다. 이처럼 해외 음악가들의 내한·협연은 국내 오케스트라의 수준과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65년 호로비츠가 공백 끝에 12년 만에 선보인 공연이 외신으로 전해졌고, 1966년 7월 16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내한 연주회를 가졌다. 그의 나이 80세일 때였다. 베토벤·쇼팽·드뷔시 등을 연주했다. 김형주(평론)는 “청중은 음악인들보다 자가용 층이 많았고 (…) 음향이 좋지 못한 것은 유감이나 사상최고의 입장료와 최고의 청중동원, 그리고 최고의 연주였다”고 평했다.
1965년 내한 당시 “한국의 음악 수준이 높은 데 감명”받은 줄리아드 음악원의 문츠 교수는 이듬해 안 샤인의 내한과 협연을 추천했다. 샤인은 1966년 3월 16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베토벤·쇼팽 등으로 리사이틀을 선보였고, 17일 같은 곳에서 임원식/KBS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라흐마니노프는 한국 초연이었다. 26세의 그녀에게 언론은 ‘미모의 피아니스트’ ‘처녀 피아니스트’ 등의 헤드라인을 내걸기도 했다.
1966년 10월 6·7·8일에 “미국이 사상 최초로 자국의 오케스트라를 구(舊)대륙과 아세아 지역에 파견”한 연주회로,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그들은 미 국무성의 문화사절 자격이었다. 22세의 피아니스트 로린 호렌더가 협연자로 함께했으며, 미국은 한국 피아니스트와의 협연을 요청하기도 했다. 협연자로는 1963년 제3회 동아콩쿠르(현 동아음악콩쿠르) 수상자 윤미경(한양대 교수 역임)이 선정됐다. 신시내티 심포니가 도쿄에서 공연하는 동안 윤미경은 그곳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습했고, 7일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했다.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이 공연의 A석은 600원, B석 500원, C석 400원이었다. 자장면 한 그릇이 35원, 다방 커피 한 잔이 30원일 때였다. 7일 공연에 단체 신청을 한 중·고등학생은 100원에 입장하게 했다. 내한 공연을 주최한 동아일보는 연일 이 오케스트라에 대해 대서특필했으며, 9월 29일자에는 28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의 리뷰를 실어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당시 무대에 나란히 걸린 태극기와 성조기는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가늠케 했다.
1966년 11월에는 미국의 피아니스트 엘리 헤이모비츠가 내한했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 음악 부문의 자문관으로 재직했고, 미국에서 음악적 원조를 끌어오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조선일보가 초청한 이 연주회는 16일 전주고 교육관, 21일 대구 계성고 강당, 23일 광주(알 수 없음), 24일 서울시민회관으로 이어졌고, 티켓은 200원이었다. 헤이모비츠를 포함하여 당시 내한하는 해외 연주자들은 국내에 낯선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한동일 군 등을 길러낸 레빈 여사에게 사사”라는 기사 문구에서 알 수 있듯, 해외에서 유학·활동하는 한국음악가와 연관 지어 소개하며 친근감을 자아냈다.
한국 피아니스트들의 해외 활동
1960년대 초반에 해외 유학을 떠난 이들은 본고장의 음악적 자양분을 빨아들이며 현지에서의 콩쿠르 출전과 입상, 독주회를 갖곤 했다.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한 김정자(보스턴 음악원 교수 역임)는 1965년 21세의 나이로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1965년 3월 한동일(텍사스 주립대·울산대 교수 역임)은 시카고·위스콘신·캘리포니아·사우스다코타·미네소타 등을 순회했고, 3월 21~23일 덴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8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4월 1일 파리 리사이틀, 9일 브르느몽트 교향악단, 13일 (서독)클로그레 방송국, 16일 BBC심포니, 20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3일 BBC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의 일정을 소화했다. 국내 언론은 그의 소식을 부지런히 날랐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0월에 뉴욕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을 차지했다. 상금은 1천 달러. 콩쿠르 입상 이듬해, 한동일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1966년 5월 15일)에서 이제는 “재주 좋은 소년”이 아닌 “개런티를 받고 연주하는 직업적인 음악가”라며 군(君)이 아닌 씨(氏)로 존칭해달라고 했다. “전액의 20%는 매니저가 갖고 비행기 표, 호텔 값 그 밖의 여비가 전부 자담(自擔)”이라며, “원 스테이지 1천 달라라고 칠 때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2백 달라 정도”라고 했다.
1960년대에 미국·유럽과는 유학생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교류가 있었지만, 가까운 일본과는 국교가 단절된 관계로 교류가 거의 없었다. 1910년 한·일 합방 후, 조선의 서양악 유입에 있어 일본은 창구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한국사회는 굴욕적인 한·일협정(1965) 반대 시위로 들끓었다. 영화계에선 좀 예외적인 사례가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은 1965년 배우 교류, 1966년 한·일 합작, 1967년 일본 극영화 수입 허가를 발표했다. 음악분야에서도 한·일협정 후에 소수의 교류가 있었다. 1966년 6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일본 지휘자 오마치 요이치로가 KBS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박현자(피아노)가 협연했다. 그해 12월에는 공소자(피아노)가 일본의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초청 연주를 갖기도 했다.
1966년 문용희(피바디 음악원 교수 역임·부군 이대욱)는 서울대 1년 재학 중 오스트리아 빈으로, 서울대를 졸업한 김형규(현 한양대 명예교수)는 베를린으로, 윤미재(이화여대 교수 역임)는 인디애나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1965년 동아일보(6월 8일)에는 해외 유학생들의 명단이 실렸다. 피아노에는 한동일·한옥수·신수정·이청·이종효·김정규·김덕주·박봉희·이경숙·조성미·김정자·장혜원·백낙정·유규호·백건우·장유경 등이었다.
공무원 월급 1만원, 피아노 한 대 9만원
악기 중 가장 고가여서 그 누구도 함부로 소장할 없었던 악기가 피아노였다. 그래서 피아노는 사람들의 ‘로망’이자, 한편으론 허영의 상징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당시 피아노는 전축·텔레비전·냉장고 등과 같이 고급 소비재로 분류됐다. ‘재래의 온돌이 주는 비위생적 비활동적인 결함을 없애고’ 입식 생활을 권하는 기사(경향신문 1960년 10월 21일) 를 보면, 부유층만이 살 수 있는 이 집의 구조는 거실·침실·부엌과 식당·화장실로 구성되었는데, 거실에는 전축과 텔레비전 그리고 피아노가 놓여 있다. 한편 피아노에 관한 교육은 부모들의 허영을 부추기기도 했다.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 정서교육이라고 자처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 거기에는 다분히 허영이라는 불순한 감정이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쓸데없는 허영과 오만을 길러주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경향신문 1960년 10월 26일)
1961년 정부는 ‘사치성향 억제’와 ‘국민의 소비 성향을 검소하게 만드는 한편 외환의 인기 품목 집중을 막으려는’ 차원에서 수입 피아노에 특별세를 적용했다. 대한음악가협회에선 “피아노의 경우 (…) 종전의 물품세 20%를 50%로, 수입세 40%도 50%으로 하여 100%의 세액으로 함은 부당하다”며 수입세 면제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정치계에서는 ‘피아노 표’라는 은어가 나돌기도 했다. 개표원이 몰래 숨겨둔 인주를 손가락에 묻혀 자신들이 떨어뜨리고자 하는 후보의 표가 나오면,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인주를 발라서 알아볼 수 없는 무효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밤새 피아노를 연주한 끝에 당선된 의원은 ‘피아노 의원’으로 불렸으며, 그가 연주한 곡명은 ‘무효 소나타’라는 자조 섞인 기사들이 나오기도 했다.
1962년 피아노 밀수 사건은 1월의 뉴스를 장식했다. 피아노 60대를 밀수한 이덕성에게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3조를 적용해 사형 및 (현재 20억 원 상당의) 벌금 2억 환을 구형했다. 밀수 사건으로 인해 피아노는 음악교육을 위한 악기라기보다는 사치품이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1962년부터는 국내의 피아노 제조 산업이 활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정음피아노사가 제작한 피아노를 미국·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브라질 등으로 매달 50대씩 수출하기 시작한 것. 1962년 일본 하마마쓰에서 쾨니히 피아노 제조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재일교포 김영복은 ‘재일교포자금 1억 환과 국내자금 1억 환을 도합 2억 환으로’ 그 해 3월 서울에 피아노 제조 공장을 짓기로 했다. 국산 피아노는 1962년 산업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다. 박람회장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국가재건최고회의)은 “옛 초등학교 선생시절을 회상하는 듯 피아노를 찾아가서 몇 곡의 노래를”(경향신문 1962년 5월 3일) 연주했다.
1961년 피아노 밀수 사건의 영향으로 1962년 10월에는 피아노가 아예 수입 금지되며 “질적으로 우수한 악기를 국내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 수도피아노사와 일본 쾨니히 피아노 제조사가 제휴하여 국내 피아노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쾨니히 사의 김영복 씨와 수도피아노 사의 박중규 씨는 서울에 한일악기공업사를 설립. (…) 김동진(작곡가) 씨는 (…) ‘기본 원리에 입각해서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것을 인정하고 이만하면 외국제에 비해 손색이 없어 마음 놓고 쓸 수 있다’고 했다.”(경향신문 1963년 3월 13일)
한편 한일악기공업사에 파견된 일본 기술자들이 한국 피아노업계가 “제조상의 기초지식이 없다”고 발언하자 경쟁사인 정음피아노·서울피아노가 반발하기도 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였고, 반일 감정이 있던 때라 이러한 마찰이 일어났던 게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든다.
1960년대에 인구가 급증하고, 학교와 학급수 증가와 함께 공공교육기관에 더 많은 수의 피아노가 들어서자 피아노 제작은 급물살을 탔다.
“증권 붐의 덕분으로 피아노가 평상시의 2배 이상의 호경기를 보여 월평균 350여대나 팔렸다 (…) 대당 9만원을 호가하는 고급악기가 잘 팔린다고 하니 (…) 고객들의 대부분이 일반가정 수요이며 그 다음이 학교를 비롯한 교회 및 기타 수요임을 참작할 때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경제양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 문화생활 향상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는 퍽 반가운 일이나 어두운 우리나라의 경제현실을 볼 때 어쩐지 답답한 느낌이 앞선다고 어떤 업자는 말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5월 27일)
피아니스트들의 국내활동
1966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에 의하면 그 해의 대학 입시에서 한양대 피아노 전공이 4.4대 1, 경희대 기악과는 10.5대 1로 나온다(경희대 기악과는 피아노·관현악이었는데, 피아노 전공의 세부 경쟁률은 알 수 없음). 같은 해 조선일보 2월 13일자에 서울대 합격자 명단이 발표됐다. 기악과는 피아노 전공 31명, 성악과 30명, 현악 전공(기악과) 20명, 작곡과 15명, 국악과 15명, 관악 전공(기악과) 8명 순으로 피아노가 가장 많았다(작곡과 명단에 유일한 한글 이름이 보이는데 ‘金난새’이다). 당시 음악대 입시는 “시험관들은 응시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돌아 앉고 응시자는 칸막이 뒤에서 노래를”(동아일보 1966년 5월 21일) 하는 식이었다.
피아노 교육에 대한 수요는 악기와 전공자 수를 꾸준히 증가시켰고, 영재·입시생·연주자·교수 등의 공연은 끊이지 않았다. 서울시민회관이 서울시향·KBS교향악단 등의 협연 전용으로 사용됐고,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이 당시 국립극장으로 사용)은 개인 독주회가 주를 이루었다. 어린 학생들은 경향신문과 이화여중·고가 주최한 전국아동음악콩쿠르(현 이화경향음악콩쿠르) 입상을 거쳐,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유명 스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피아노 협주곡의 밤’이나 같은 문하에서 수학하는 대학생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지금과 달리 교수들의 교외 레슨이 허용되던 당시에는 어린 싹과 유명한 스승이 바로 직결되었고, 이들은 콩쿠르와 연주를 통해 프로 음악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1961년 개설된 동아콩쿠르(현 동아음악콩쿠르)는 파격적인 참가 자격을 내걸어 초·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 함께 겨루는 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 콩쿠르에 입상한 사람은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천재’에 가까운 음악가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국내에서 성장한 피아니스트들은 이후 ‘해외 유학’을 거쳐 국내외에 안착하며 음악가로서 결실을 맺었다.
1965년 미국 클리블랜드 음악원을 졸업한 박지혜(한양대·연세대 교수 역임)의 귀국 독주회가 있었고,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 시립음대 유학 후 모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던 공선증은 1966년에 귀국 독주회를 가졌다.
1965년 경기고 3학년에 재학 중인 이대욱(현 한양대 대우교수)은 6월에 국립극장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1962년 제2회 동아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한 그는 미국 미시간에서 열린 내셔널 뮤직 캠프와 음악제에 참석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1966년에는 이화여고 주최로 조영방(현 단국대 교수)의 독주회, 서울음대 전임강사로 재직하던 이성균(한양대·서울대 음대 교수 역임)의 독주회 등이 있었다. 그 해 4월에는 이강숙(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역임)의 독주회가 있었다. 슈베르트의 소나타 B장조 D960, 쇼팽의 야상곡 등을 포함한 7곡을 선보였는데, 슈베르트 소나타는 한국 초연이었다. 1966년 한동일은 이틀 동안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원경수/서울시향과 협연했다. 당시 구두회(작곡·숙명여대 교수 역임)는 “입장료가 너무 비쌌다”며, “국내의 음악학도들 대부분이 가서 직접 보고 듣지 못하고 좋은 기회들을 놓치게 된 것은 대단히 유감”(경향신문 1966년 6월 1일)이라 평했다. 1966년 5월에는 김영욱(바이올린)과 그의 누나 김덕주(피아노)가 함께 리사이틀을 가졌다. 서울시민회관에 오른 이 공연의 A석은 300원, B석 200원, C석 100원이었다.
음악가들의 수가 급증하다 보니 부부 음악가들의 활동도 화제를 낳곤 했다. 1966년 11월, 정두영(침신대 교수 역임)이 KBS교향악단을 지휘했는데, 협연자는 그의 아내인 한정강(목원대·침신대 교수 역임)이었다. 그녀는 맨해튼 음대에서 문츠 교수 문하에서 수학한 피아니스트였다.(부부의 삼남 정나라와 사남 정하나는 각각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지휘자와 악장으로 재직 중)
1960년대에 새로운 레퍼토리의 수용과 초연은 전에 비해 활발해졌고, 국내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이 오르기도 했다. 1959년 귀국 후 서울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정진우는 1965년 11월 10일에 김만복/서울시향과 이상근(부산대 교수 역임)이 작곡한 콘체르토 그로소를 협연했고, 같은 해에 임춘원(클라리넷)·양재표(첼로)와 트리오 공연을 선보였다. 트리오 무대는 김형주(평론)에 의하면 “차원 높은 실내악의 진미를 음미할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흥미 있는 음악을 들려주었다”.(경향신문 1965년 10월 27일)
다양한 무대에서 성장한 피아니스트들
1950년대의 ‘경향신문·이화여중고 주최 전국아동음악콩쿠르’(현 이화경향음악콩쿠르) 입상자들은 성장하여 1960년대 동아콩쿠르(현 동아음악콩쿠르)의 우승·입상자가 되기도 했다. 일례로 1952년 제1회 이화경향음악콩쿠르 2위에 입상한 신수정(당시 3위 한동일)이 1961년 동아에서 1위에 입상했고, 1958년 이화경향 1위를 차지한 윤미경(당시 특상은 정경화(바이올린))이 1963년 제3회 동아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하는 식이었다.
1965년 동아음악콩쿠르 입상자는 박현자(서울대 4)였다. 1955년 제4회 이화경향음악콩쿠르에서 전 부문을 통틀어 단 한 명에게 수여하는 특상을 수상한 그녀는 정진우 서울대 교수의 제자였고, 부친은 한국미락(비락의 전신)의 사장 박태식이었다. 입상자 인터뷰를 수록한 동아일보는 수상 소감, 음악 입문 동기, 경력, 취미, 스승, 가정환경을 기사화했고, 아버지의 직업도 거의 필수적으로 넣었다.
1965년 피아노 부문 참가자는 20명으로 전년에 비해 증가했으며 연주곡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본선곡은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 Op.54와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로, 심사위원 김순열(피아노·서울대 교수)은 “피아노의 과제곡은 높은 수준의 독주회를 가질 정도의 프로그램”(동아일보 1965년 10월 19일)이라 평했다.
1966년 동아의 우승자는 유은숙(서울대 2)이었다. 그녀도 정진우 교수를 사사했고, 부친은 음악평론가이자 부산대 교수였던 유신이었다. “기회가 있으면 외국에 가고 싶다”(동아일보 1966년 10월 23일)는 소감을 통해 당시 프로 연주자를 꿈꾸던 이들의 희망이 유학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1960년대에는 다양한 수상 제도가 생겼는데, 유학 자격을 주는 것이야말로 큰 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의 5·16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에 5·16민족상을 신설했다. 18세 미만을 대상으로 한 이 상은 1966년부터 대대적으로 홍보와 공모를 시작했고, 수상자에게는 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는 조건을 달았다. 1966년 조선일보 주최의 청룡음악장학생 선발대회도 미국 유학 자격을 주었다. 분야는 피아노·바이올린·성악이었고, 1966년에 박미애(이화여대 3)가 선정됐다.
1960년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문하생 음악회는 저명한 교수가 보증한 ‘하이틴’ ‘틴에이저’ ‘로우 틴’들의 무대로 자리 잡으며, 콩쿠르와 더불어 신인 발굴 및 다양한 무대 경험을 제공하는 공연문화로 자리 잡았다. 1965년에 설립된 우향회(宇響會)는 정진우 서울대 교수 문하생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윤미경을 포함하여 서울대 제자들은 1965년에 첫 연주회를 국립극장에서 가졌다. 같은 해 4월 장보원 연세대 교수 문하생들이 드뷔시의 곡을 중심으로 제2회 공연을 가졌다. 또한 당시 대학교수는 아니지만 ‘피아노의 명문(名門)’으로 꼽히던 백낙호(서울대 교수 역임)의 문하에서 수학한 초·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임원식/KBS교향악단과 협연했다. 이 외에도 최균선, 김원복(서울대 교수) 등의 문하생 음악회가 있었다.
당시 신문사들은 음악 인재 육성과 배출에 큰 역할을 했다. 경향신문이 이화여중·고와 전국아동음악콩쿠르(현 이화경향음악콩쿠르)를 개최하며 초등학생 발굴을 담당했고, 동아일보의 동아콩쿠르(현 동아음악콩쿠르)가 파격적으로 초·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아우르며 전문 연주가 배출에 힘썼는가 하면, 조선일보는 대학 졸업생들을 널리 알리는 신인음악회를 매해 선보였다. 1965년 제15회조선일보 신인음악회가 3월 25·26·27일에 국립극장에 있었는데, 총 33명의 출연자 중 피아노 부문에는 이방숙(서울대), 윤미재(이화여대), 문초자(경희대), 김명진(서울대), 정도자(숙명여대), 백청자(효성대), 이경숙(한양대), 조길자(이화여대), 차승희(이화여대), 김혜자(숙명여대) 이상 10명이 참가했다. 신인음악회에는 건반악기부터 관현악, 성악 등 다양한 분야와 여러 대학의 졸업생들이 참가했는데, 이 중 피아노가 가장 많았다. 특히 1965년에는 “향상된 피아노”라는 주장에 심사위원들이 입을 모았다. 1966년 제16회에는 피아노 부문에 12명이 참가했다.
‘객석’ 9월호에서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이번호에는 1965년과 1966년의 피아노를 둘러싼 연주·교육·유학 환경과 1960년부터 시작된 피아노 국내생산을 알아보았다. 다음 호에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를 살펴본다. 이 시기는 피아노 생산·소비는 더욱 급증했지만, 피아니스트들의 움직임과 음악계의 분위기는 1960년대 전반기보다 다소 침체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