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진 경제 수준과 피아노 인구의 급증

ACROSS THE 1960'S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1월 1일 12:00 오전

지난 9월호(1960~1964)와 10월호(1965·1966)에 이어 1967년부터 1969년까지 피아노를 둘러싼 연주·교육·콩쿠르·유학 환경을 살펴볼 차례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달라지는 정치·경제 등의 환경이 피아노 보급과 교육에 영향을 주었고, 보급률이 높았던 피아노는 국내 음악 문화에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 경향신문 1967년 3월 22일

1960년대는 “폐쇄된 우리문화의 문이 국제적으로 활짝 열리기 시작한 시대(경향신문 1967년 3월 22일)”였다. 1962년 서울국제음악제를 비롯해 1962년과 1966년 서울 아시아영화제가 개최되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한국 음악계는 세계 음악계의 중심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당시 서울시교향악단 지휘자 김만복이 동아일보(1968년 9월 28일)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나는 8월 중순 뉴욕에 있는 뮤지칼 다이제스트 지의 주필 부르크 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 내용은 10년 전만 해도 세계음악계의 동향이 유럽이나 미국 중심이었는데 이제는 동양, 특히 한국과 일본 중심으로 옮겨져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1969년 백건우가 참가한 이탈리아 볼자노 시의 콩쿠르 결과에 대해 국내 언론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한국 참가자들의 가능성이 커지던 시기였다.

“17개국의 피아니스트 3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1위는 미국의 우살라, 2위는 이태리의 안나 지골리, 3위는 일본의 가다가와 아끼꼬 양이 각각 차지했다. 심사원들은 4위와 5위 입상자는 없다고 밝혔으나 백건우 군의 장래성을 인정, 금년에 한해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경향신문 1969년 9월 5일).”

1968년, 뉴욕에서 백남준은 샤롯 무어만과 함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퍼포먼스를 관람했던 황병기(가야금)는 “내가 보기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남준이가 빨가벗고 나타나서 그랜드피아노를 이마로 친 것(경향 1968년 6월 29일)”이라며, 그 내용을 담은 엽서를 한국으로 보내왔다. 문화와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폐쇄된 우리문화의 문이 국제적으로 활짝 열리기 시작한 시대”를 알리는 경종과도 같았다.


▲ 동아일보 1969년 3월 23일

이처럼 예술계의 비중이 커지면서 국내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1969년에 “문화공보부는 예술창작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예술인들이 현행세법에 의해 부담하는 과중한 담세율을 경감시킴으로써 창작의욕을 북돋아주기(경향신문 1969년 3월 12일)”도 했다. 이 법안은 “원고료에 대해서만 적용하던 소득세 면세를 서화료, 조각료, 도안료, 작곡료에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한국음악협회는 연주료에 대해 “연주자의 경우 연주는 그 자체가 창작활동인 셈이데 작곡료는 면세되면서 연주료는 안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동아일보 1969년 3월 13일)”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피아노는 어떤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나. 9월호에서 1960년부터 1964년까지, 10월호에서 1965년과 1966년에 피아노를 둘러싼 연주·교육·유학 환경을 살펴보았다. 그 특징으로 해외 피아니스트들의 내한, ‘하이틴’ ‘틴에이저’ ‘로우 틴’으로 불리던 10대 피아니스트들의 활동과 미국 유학 열풍, 파벌의 형성과 문하생들의 연주 활동, 그리고 1960년부터 시작된 피아노 국내 생산을 살펴보았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살펴볼 이번 호에서는 1960년대 초·중반과 다른 특징이 도출된다.

피아노 다음으로 그 인구가 가장 많은 바이올린과 달리, 1962년부터 국내의 피아노 제조산업이 활발히 고개를 들면서 악기 보급률과 교육의 수요가 높아졌다.

“증권 붐의 덕분으로 피아노가 평상시의 2배 이상의 호경기를 보여 월평균 350여대나 팔렸다. (…) 대당 9만원을 호가하는 고급악기가 잘 팔린다고 하니 (…) 고객들의 대부분이 일반가정 수요이며 그 다음이 학교를 비롯한 교회 및 기타 수요임을 참작할 때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경제양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경향신문 1963년 5월 27일).”

1963년에 나온 위와 같은 기사에 이어, 1969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돈’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당시 새롭게 등장한 신종 직업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피아노 개인교수라는 좀 색다른 직업이 성행하기에는 외국과의 기술제휴로 국산 피아노가 생산되고 값비싼 피아노가 월부 만매로 중류 급 가정에 널리 보급되면서 부터이다. (…) 이들이 교수료로 받아내는 수입에도 격차가 심하다. 미국 쥬리아드 음악대학을 나와 국내 공개연주에서 장래성이 널리 인정된 A급 교수의 경우는 통상 주2회를 가르치고 월 1만5천원에서부터 최고 2만원까지 받는다. (…) 반면 대졸·고졸의 짧은 경력만으로 개업을 할 경우는 주 4~5회까지 강행군을 하지만 실제 교수료는 최고 4천원에서 최하 2천원까지 떨어지고 있다. (…) 재능을 가르치고 재능을 파는 이러한 피아노 개인 교수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공개연주에서 얻어지는 쥐꼬리만한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아노를 갖고 있는 가정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일 것이다(매일경제 1969년 3월 13일).”

일간지에는 피아노 광고가 매일 실리다시피 했고,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부추겼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사치성 소비성향은 어떤 새로운 바람이 불지 않는 한 계속 늘어날 것이다. 월 2만 원 짜리 월급장이도 TV수상기나 피아노를 월부로라도 사들이는 판이니까(동아일보 1968년 1월 1일).”

당시 공무원 월급이 1만원, 피아노 한 대 가격이 9만원이던 때였다.

해외의 한국 피아니스트들

1960년대 초반, 해외 유학생들의 소식이 콩쿠르와 연주회 중심이었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언론은 그들의 작은 소식에도 귀 기울였다. 교내 시험 및 경연대회 입상, 현지 독주회와 협연, 졸업시험 통과, 일시적인 귀국 소식까지 담았다. 특정 몇 명을 제외하곤 이들은 대부분 공통의 학습 과정을 겪었다. 경향신문의 전국아동음악콩쿠르(현 이화경향음악콩쿠르)·동아콩쿠르(현 동아음악콩쿠르)에서 입상 후 대서특필되어 주목을 받았고, 중·고등학교 진학 후 독주회를 치른 뒤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따라서 언론이 전하는 그들의 희보는 마치 그들의 ‘젊은 날의 초상’이거나, 그 기록과도 같았다.

1960년대 초반에 유학을 간 유학생들의 결실이 나오던 때가 1960년대 중·후반이었다. 1967년 신수정이 빈 국립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독주회를 가졌고, 이화여대 졸업 후에 국비장학생으로 프랑크푸르트 음대에 유학 중이던 장혜원은 스위스 바젤 심포니와 협연 무대를 가졌다(바젤 심포니는 2015년에 처음으로 내한했으며, 현재 윤소영이 악장이다).


▲ 동아일보 1969년 3월 13일

유학지로 미국·독일·프랑스 등이 선호되었지만, 예상 밖의 국가에서 전해오는 희보도 있었다. 1967년, 16세의 이경란은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가진 독주회에서 베토벤 ‘열정’, 리스트 헝가리안 랩소디 2번 등을 연주했다. 스승은 1962년 브라질로 이민 간 목진태였다. 스웨덴에서 조선(造船)학을 연구하던 김정훈 박사의 딸 김혜경이 현지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 A장조를 협연했다(당시 이희춘(바이올린)은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으로 재직 중이었다).

1960년대에 유학생을 중심으로 미국·유럽과 교류가 있었지만, 일본은 국교가 단절된 관계로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967년 수교가 체결되면서 소수의 교류가 생겼다. 1967년 일본대판음악대학 초청으로 서울음대교향악단이 합동 공연을 가져 “우리 학생들은 빈틈없는 태세여서 우리의 수준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동아일보 1967년 7월 18일)”는 평을 들었다. 일본과의 교류는 제국/식민의 기억을 토대로 경쟁을 의식한 듯했다. “67년 5월 오스트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문교부 일본주재 수석장학관 신진호 씨)에게 들렀다가 (…) 리사이틀(조선일보 1967년 10월 15일)”을 가진 신수정도 “양악은 동양에서는 일본만이 번창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릇된 지식이란 걸 제가 여실히 증명해 줬다고들 신문에 써 주더군요(조선일보 1967년 10월 15일)”라고 했다.


▲ 경향신문 1968년 6월 8일


▲ 경향신문 1968년 10월 7일

1960년대 후반에 활동하던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여성이었다. 1968년 김혜자가 “백낙정·신수정 양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빈 아카데미 졸업생이 되었고(동아일보 1968년 2월 29일)”, 장혜원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며 프랑크푸르트 교향악단과 협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에 있었던 장혜원의 국내 독주회를 보고 박용구(평론)는 “수석으로 졸업한 경력의 무게를 십분 감당해낸 충실한 독주회”이자, “얌전한 동양의 여성다운 표현의 한계를 뚫고 넘어서는 포인트(동아일보 1968년 10월 19일)”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1968년에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한 23세의 이선경이 알렉산드로 카사그란데 콩쿠르에 입상했다. 윤홍천이 입상하기도 했던 이 콩쿠르는 현재 유명 콩쿠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국에서의 활동에 주목하던 경향 때문인지 미국 유학생들만큼 크게 다뤄지지는 않았다.


▲ 동아일보 1968년 7월 13일

앞서 살펴본 신수정, 김혜경처럼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조력이 연주자에게 큰 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이 유학생들을 다룰 때, 그들은 가정사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1967년 국립오페라단 단장을 역임한 이인범(테너)과 이정자(피아노)의 딸이며 정진우의 제자인 이방숙은 미네소타 독주회를 가졌다. 당시 조선일보는 대학 졸업생들을 널리 알리는 신인음악회를 매해 선보이고 있었는데, 이방숙은 1965년(제15회)에 출연하기도 했다.


▲ 경향신문 1969년 4월 16일

1967년 제1회 5·16민족상 피아노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던 문미현(14, 경북여중 1년)은 제3회(1969)에 재출전하여 특상을 수상했다. 당시 16세로, 서울예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문미현의 “아버지 문길용 씨는 현재 미국 맨해턴에서 바이얼린을, 어머니 김해숙 씨도 이대음대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동생 미진 양(예원중 2년)도 바이얼린을 공부”하는 음악 가족이었다. 이 상의 본상과 특상에는 50만원, 장려상과 우수상에는 20만원의 상금을 수여했다.

차세대 피아니스트들의 중심지, 줄리아드


▲ 경향신문 1968년 10월 5일

“그보다 앞서 (···) 줄리어드에 간 이령인, 황은영, 강동석 등과 대음악가를 꿈꾸는 한국의 귀염둥이다(경향신문 1968년 10월 5일).”

1968년, 동북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12세의 김영호는 줄리아드 음악원 문츠 교수의 주선으로 줄리아드로 떠났다. 문츠는 “많은 한국음악도들을 발탁, 줄리아드에 입교시킨(동아일보 1968년 11월 28일)” 인물로 한국 음악계에서 주목받았다. 심지어 1968년 피아노과 주임교수로 선임됐다는 작은 소식이 한국 음악계에 전해질 정도였다. 그는 한마디로 피아노로 한국과 미국을 잇는 다리였다.

줄리아드 음악원의 한국 유학생 중 피아노 전공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줄리아드 재학생 장유경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줄리아드 전체의 10%가량이 동양 사람인데요, 한국 학생은 양으로나 질로나 일본에 지지 않아요(조선일보 1968년 11월 17일).”

현지에선 학생이었지만, 국내에선 선각자이자 천재 대우를 받았다. 고국의 무대는 그들의 소식과 내한을 반겼다. 1968년 11월, 조선일보 주최로 장유경은 서울시민회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1부 독주, 2부 정회석/연세대 오케스트라와 쇼팽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밤 9시가 지나 뜻깊은 콘서트의 막을 내린 장양은 내빈과 친지들을 초치(招致)하고 9시 10분쯤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이날 회갑을 맞은 납북된 아버지 장희창 교수의 생일을 축하하는 티파티를 열었다(조선일보 1968년 11월 20일).”

장희창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연세대 상과대 교수로 재직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납북됐고 장유경은 유복녀로 태어났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의 회갑에 맞춰 연주회를 가졌던 것이다. 쇼팽 협주곡 1번을 들은 유한철(평론)은 “6·25 유복녀라는 특수 환경을 극복한 장유경의 청초한 청춘을 상징한 너무나 맑은 음악”이라 평했다. 연주회의 수익금은 연세대 상과대에 기증했다.

‘뺑뺑이’ 입시와 피아노 교육

오늘날 예체능계의 사교육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이 뿌리와 시작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싹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악기를 소유해야 하는 현·관악기와 달리 교습소에 악기를 비치하고 학생들의 몸만 오고가도 되는 피아노 교습소의 환경은 수많은 부모로 하여금 자녀를 그곳으로 보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입시 환경의 변화는 아이들에게 예체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과도한 입시 경쟁 등을 이유로 1969년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1970년 부산·대구·광주·인천·전주·대전 6개 대도시에서 연차적으로 중학교 무시험제가 실시되었던 것. 초등학교 교육의 정상화, 과열 과외 공부의 해소, 극단적인 학교 간 격차의 해소, 입시 준비로 인한 과도한 학부모 부담의 경감 등이 목표였다. 1971년에는 전국적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이 폐지되고 추첨제로 바뀌었다. 이른바 ‘뺑뺑이’라 불리는 물레 모양의 추첨기를 돌리면 각각의 중학교 고유번호가 적힌 공이 튀어나오는 방식이었다.


▲ 경향신문 1969년 5월 12일

이러한 배경 속에 음악교육의 풍경도 달라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학 입시 때문에 4학년 이상으로 음악 레슨을 받는 어린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5·6학년 어린이들이 다시 옛날 선생을 찾아 레슨을 계속”하기도 했다. “수업료는 학원연합회규정에 따라 월 3천원. 그러나 (…) M학원은 1주에 한 시간 씩 두 번 하는데 3천원, 네 번에 4천원, 매일하면 5천원을 받고 (…) 정식인가 없이 학원의 시설을 갖춘 곳은 서울에 약 100개소가 되며 개인집에서 가르치는 곳은 1천 군데가 넘는다. (…) 피아노가 가장 많고 다음이 바이올린이다(경향신문 1969년 5월 12일).”


▲ 동아일보 1969년 4월 10일

1969년 4월 10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技(기)만 파는 예능교육’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이른바 입시지옥이 없어지자 상당수의 부모들이 (…) 예능교육을 과외로 시키는 현상”이 두드러졌고, “선생들은 개인 지도를 교수가 아닌 하나의 모리(謨利) 사업으로까지 보아 넘기는 경향”은 지금과 하등 달라진 게 없어 씁쓸함을 자아낸다.

“보통 예능계 지망생들은 고3이 되면 지망 대학의 교수 밑에 몰려간다. 지방 학생들의 경우 돈이 많은 학생은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가 입시 한 두 달 전쯤 상경, 교수로부터 단기 완성 교육을 받기도 한다. (…) 음악의 경우를 보면 피아노 개인지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현악기 목관 작곡의 순서다. 보통 각 음대에서 입김이 센 피아노 교수들은 1급이면 30~40명, 2급이면 20~30명의 학생들을 맡고 있다. 입시 시즌이면 학생들의 수는 더욱 불어난다(동아일보 1969년 4월 10일).”

대학들이 예체능계에 한해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예비고사를 면제해주자 이른바 단기간의 교육을 통해 대학 간판을 따려는 일이 비일비재하기도 했다. 위의 내용을 다룬 기사들 모두가 이러한 심리의 저변에 “자녀들의 소질 여부(동아일보 1969년 4월 10일)”를 파악하지 않은 채 달려드는 부모들의 “허영심(경향신문 1969년 5월 12일)”이 있음을 꼬집고 있다.

천재 교육을 위하여

한편 1960년대에 한동일(피아노)과 정경화(바이올린)의 해외 콩쿠르 입상을 계기로 음악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국내 음악 교육에 대한 반성은 짙어졌다. 어린 나이부터 기초를 익혀야 하지만 극소수 예술 중·고등학교는 이러한 교육에 발맞춰 나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기껏해야 대학교가 베이비붐에 맞춰 학생 수를 증원했을 뿐이었다. 1947년에 피아노·관현악·성악·작곡과의 체계를 갖춘 이화여대는 1967년 피아노 30명, 관현악 20명, 종교음악 10명으로 증원했다.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에 1952년에 개설된 피아노과는 1967년에 음악과를 기악과와 성악과로 분리하며 기악 20명, 성악 20명으로 늘렸다.

하지만 ‘천재 교육’을 운운하며 더욱 선진적인 조기 교육 시스템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1967년 5월 23일 동아일보를 살펴보자.

“국내에서는 음악교육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것 (…) 피아니스트 정진우 씨는 ‘수차에 걸쳐 격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한국의 입시지옥 하에서는 어린 음악인의 천재교육이 불가능하며 더구나 음악대학에서는 교양과목 등이 겹쳐 실기에 시간을 많이 낼 수가 없어 이런 교육 제도 하에서는 세계적인 연주가의 배출은 어렵다’고 말하고 있어 결국 음악에 뜻을 둔 청소년은 세계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외국에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 1969년 6월 21일

앞서 말한 줄리아드의 문츠 교수가 국내에서 영웅적 존재가 된 이유도 여기 있다. 그의 방한과 그로 인한 미국으로의 유학은 ‘천재 교육’의 대안이자 당시의 최선이었다. 1969년 미국 국무성의 파견과 동아일보의 초청으로 문츠가 내한하여 서울대·이화여대·수도사대·경희대·숙명여대·연세대·서울예고에서 마스터클래스 및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1969년 6월 21일)에서 “음악에 전념하는 학생과 과도한 경비를 들여서라도 천재를 만들려는 부모의 열의”는 “매우 높은 수준”이지만, “지나친 야심이 오히려 약점이 될까 걱정”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1969년, 줄리아드 내의 한국 유학생은 “단위국가로는 가장 많은 35명(동아일보 1969년 6월 21일)”에 달했다.


▲ 동아일보 1967년 6월 17일

음악대학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의 국내 활동은 유학을 준비하는, 한마디로 유학을 위한 전초전과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유학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금의환향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1967년 6월 21일 서울시민회관에서 한옥수가 연주회를 가졌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한옥수는 미국 신시내티와 줄리아드에서 수학했고, 에릭 시몬 매니지먼트에서 활약하며 당시 뉴욕 롱아일랜드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앞서 살펴본 장유경도 그렇고, 당시 내한하는 피아니스트들은 1부를 독주로, 2부를 협주곡으로 채우는 것이 관례였던 것 같다. “내년 1월 7일 카네기매인홀에 데뷰를 앞두고 일시귀국(동아일보 1967년 6월 12일)”한 그녀는 공연 1부에서 베토벤 소나타 8번 ‘비창’, 쇼팽 소나타 2번 Op.35를, 2부에서 리스트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헝가리 민속 춤곡에 의한 환상곡을 김만복/서울시립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선보였다. 관람료는 A석 300원, B석 250원, C석 200원, D석 50원. 당시 고가에 속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들은 한마디로 국가대표였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음악적 배경이 달라요. 이러한 차이점을 극복하면서 서양인들과 대등한 입장에 서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여하간 노력과 인내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지요(한옥수, 동아일보 1967년 6월 17일).”


▲ 동아일보 1967년 11월 27일

특히 전 세계 그 어느 인구보다 많은 수를 차지하는 피아노계에서 한국 유학생이 해외 유학을 거치고 경쟁을 통해 현지에 전문 연주자로 안착한다는 것은 국력이 약하던 한국이 서양과 대등해지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67년 귀국 독주회(서울시민회관)를 가진 신수정에 대해서도 “1966년 빈 국립음악아카데미서 영예의 수석졸업을 한 수재(동아일보 1967년 11월 27일)”라며 ‘수석 졸업’에 방점을 찍었다. 이처럼 이들은 국민들과 한국 음악계의 희망을 한 몸에 받았다. 6월과 7월이 방학을 맞아 내한하는 해외 유학생들의 독주회가 다른 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1967년 6월 김정자는 임시 귀국 독주회(국립극장)를 가졌고, 줄리아드 음악원에 재학 중인 이대욱이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는 것이 신문에 실렸으며, 이어 9월에 임원식/KBS교향악단과 협연(서울시민회관)하기도 했다.

국내 피아노계를 둘러싼 사건들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피아니스트들은 증가했고 이들을 수용하는 무대도 많아졌다. 특히 1~2시간의 독주회를 홀로 감당할 수 없었던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에게 오케스트라 협연은 무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자 존재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7년에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한 황선은 김선주/서울시교향악단(서울시민회관)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서울대 음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이민숙은 임원식/KBS교향악단(국립극장)과 협연 후 연주차 미국으로 떠났다. 같은 해에 이화여중 3학년 박은희는 임원식/KBS교향악단(국립극장)과 협연했다. 피아노 학도들의 증가와 무대 경험을 쌓고자 하는 바람이 불자, 1969년 서울시향은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10대 독주자’를 모집하기도 했다.

피아노는 공부하고 종사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분야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들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시작된 조선일보 신인음악회 제17회(1967년) 중 모든 분야를 통틀어 참가자 37명 중 피아노가 13명을 차지했고, 1968년에는 15명이 출연했다.

종사하는 인구가 많다 보니 피아노와 관련하여 이슈도 많이 나왔다. 1968년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48세의 김순열이 14년 만에독주회를 가졌고 베토벤 소나타의 32곡 ‘전곡’을 선보였다. 지금은 ‘전곡 연주’가 흔한 일이지만, 유명 작곡가의 대표작만을 선보이며 레퍼토리 쏠림 현상이 심하던 당시에 전곡을 선보인다는 것은 생소하고 생경한 일이었다.

1968년 시각장애를 지닌 김태용은 24세에 연세대 음대를 졸업하며 “맹인으로선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사 학위를” 받았다.

“방대한 점자 피아노곡을 하나하나 손으로 더듬어서 이를 88개나 되는 건반에 옮기는데 있어 (…)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동아일보 1968년 2월 12일).”

그는 졸업하던 해에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에 출연하여 또다시 화제가 됐다.

같은 해에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시각 장애가 있음에도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계명대에 출강 중이던 38세의 김경환이 음독자살 시도 후 중태에 빠진 것이다. “학장이 그랜드 피아노 구입비 70만원을 내면 전임강사직을 주겠다고 하여 30만원을 마련, 사정해보았으나 갑자기 해임된 것(경향신문 1968년 3월 29일)”이었다. 음악대학 교수 임용의 비리를 놓고 벌어진 일화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씁쓸하다.

피아노를 위한 창작곡들

1960년대 후반의 특징 중 하나는 국내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위한 창작곡을 발표한 것이다. 1967년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본부 주최로 열린 제2회 현대음악발표회(서울음대 콘서트홀)에서 두 곡의 피아노 독주곡이 연주되었다. 이를 지켜본 강석희(작곡, 서울대 교수 역임)는 정회갑의 “피아노 조곡 ‘코리언 댄스’는 (…) 주로 농악의 리듬과 가락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창의성”이, 이영자의 “피아노 조곡 ‘로맨틱’은 당일의 이색적 프로로 시정을 살리려고 하는 여성다운 면이 엿보여 11월의 신작 발표에 기대를 걸게 한(경향신문 1967년 11월 15일)” 작품이라 평했다. 이화여대와 동 대학원 졸업 후 파리국립음악원 작곡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영자는 그 해 11월 가진 작곡발표회(국립극장)에서 ‘피아노를 위한 조곡 로망티크’를 발표했다.


▲ 경향신문 1968년 3월 6일

1968년에는 나운영이 피아노 협주곡을 발표했다. 효성여대 강당에서 열린 연주회는 이기홍/대구시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이강숙이 협연했다. “국내 작가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되기는 처음(경향신문 1968년 3월 6일)”이었다. 이 곡은 같은 달 서울시향과 안희숙의 협연으로 국립극장 무대에서 재연되었다.

1968년 6월, 국립극장에서 서울대 교수 정진우의 문하 4명(임헌원·손국임·이경숙·이숙영)은 정회갑·서영세·신영림·이성재·이상한·김달성의 신작을 연주했다. 이 공연에 대해 김정길(작곡, 서울대 교수 역임)은 “우리 작품에 눈을 돌려 그들 모두가 능숙하고 세련된 솜씨로 성실하고 책임있는 연주(경향신문 1968년 6월 26일)”였다고 평했다. 1969년 임원식/국립교향악단은 제1회 정기연주회에서 바그너 ‘파르지팔’의 일부,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그리고 이상근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임자향의 협연으로 위촉·초연했다. 같은 해 동아일보(1969년 11월 29일)에 의하면 “프랑스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보야 톤시즈 씨는 서울음대 교수 정회갑 씨의 피아노 조곡 ‘한국무곡’을 프랑스의 렌느와 네델란드의 아인드 호벤, 베르겐에서 순회연주, 절찬을 받았”고, “이 같은 사실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연주가들이 우리 작품을 활발히 연주, 소개할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3회에 걸쳐 연재한 1960년대 피아노를 둘러싼 연주·교육·유학 환경을 정리해보자. 현악기, 관악기와 달리 많은 인구가 종사했던 피아노는 1960년대 초반 많은 음악가와 유학생을 배출한 요충지였다. 게다가 피아노 제작은 초반에 국가산업 부흥의 붐에 힘입었고, 그 결과 악기의 보급률을 높였다. 보급률이 증가하는 후반으로 갈수록 피아노를 공부하거나 즐기는 사람이 급증했다. 이러한 환경이 음악 조기 교육, 대학교 증원과 증설, 국내 창작 경향 등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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