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신연식

조진주의 THE ART OF PRACTIC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1월 1일 12:00 오전

개인을 향한 시선, 진정성을 비추는 예술

얽히고설킨 무리의 틈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한참 지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의 인생이 생각보다 많이 지나가버렸음을 느끼기에, 그 흐름에 대한 회의가 불 일듯 일어나게 마련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진정 나의 것은 무엇이 남아 있던가, 무엇을 쌓아가며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나 따위의 감상적인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이런 순간과 마주할 때다. 어쩌면 나약한 예술가 특유의 자기 위로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무리 속에 묻혀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사람은 독창성과 개인성을 주체로 자아를 빚어가게 마련이니까. 시간과, 사회에 얽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삶의 방향을 걱정하는 건 많은 이가 공유하고 있는, 무척 흔한 감상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전체의 시선으로 개인을 바라보게 되는 건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행동인 걸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전통이나 종교의 규칙을 바탕으로 개인을 평가하고, 성향과 행동 양식에 딱지를 붙여 사람을 분류한다. 나는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보다는, 강해지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혼자일 때 초라하던 모습도 여러 사람과 함께할 땐 강한 것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열심히 주위의 것들을 끌어 모은다. 사람을 모으고, 물건을 모으고, 지식을 모으고, 취향을 뼛속부터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뒤늦게 영화 ‘동주’를 봤다. 그 여운은 깊고 짙었다.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전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은 철학적·예술적으로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시대의 상황(전체)이라는 배경에 인물(개인)을 그려 넣는 기존 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시대에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사람이 송몽규의 캐릭터에 공감하는 것을 보면서 놀랍고 의아했던 기억도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들은 용감하고 행동적인 송몽규를 동경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한 것일까.

‘동주’의 극본, 즉 영화의 시선을 책임진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 이 글을 쓰지 않고 싶을 정도로 신연식 감독과의 만남은 뜻깊었다. 전체의 틀을 이해하고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소유자,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 특별함을 소중히 여기는 예술가와의 만남은 분명히 감동적인 일이었다.

수련의 진화 _무엇을, 왜 해야 하는가

영화는 흥미로운 문화예술 분야다. 같은 매체 수단을 사용함에도 상업영화·예술영화로 구분되어 있고, 또 그것이 모호한 경우도 있다. 필요한 자본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만큼 관계 또한 복잡하다. 이 정글 같은 세계에서 작가, 감독 그리고 제작자로서 살아가는 신연식 감독은 어떻게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감독마다 기초와 역량이 각각 달라서 기획자형 감독이 있는 반면, 비즈니스에 강한 인물도 있어요. 분류하자면 저는 작가형이에요.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직업 선택의 개념으로 접근하기보다 그저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안 쓰면 정말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고등학생 시절부터 엄청나게 써내려갔죠.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소설을 썼는데 영화라는 매체를 접하면서 표현 방식이 이렇게 폭넓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어요. 그 시절 하루에 원고지 100장정도를 쓰면서 글쓰기 훈련에 필요한 절대량을 일찌감치 채운 것 같아요. 대학에서 전공도 연극영화과나 문예창작과가 아니어서 과제 때문에 글을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작품 하나를 완성해나간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떠오르는 것들을 쓰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심지어 학교 시험 기간에 공부도 안 하고 글을 써내려가는 제 자신이 저주스럽고 정말 싫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이 작가 기질인 것 같아요. 그 기질이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살기 위해 표현하는 것. 이런 절박함을 나는 그 어디에서 목격했던가. 이것을 하지 않았다면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만, ‘살기 위해’ 어떤 행위를 반복한다는 것은 사뭇 다른 느낌이다. 내 안에는 과연 그런 절박함이 있나? 다른 사람의 곡을 해석하는 것이 주된 일인 연주자로선 경험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창작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랄까. 내 안에 있는 이것을 꺼내놓지 않으면 목숨이 끊길 것 같은 긴박감은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상상조차 잘되지 않는다.

내겐 진로 상담을 해달라며 찾아오는 아이들이 유독 많은 편이다. 겨우 28세인 내가 얼마나 안다고 자꾸만 조언을 구하는지 모르지만, 예전에 가르치던 학생부터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해 오는 학생까지 각양각색이다. 생각해보면 그들도 나름대로 절박하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 비해 질문은 대부분 비슷하다.

‘선생님 같은 연주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니 도대체 왜 나처럼 비루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 도저히 이해를 못할 일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진로를 바꿔 돈을(또는 명예나 성공을) 많이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얘들아, 나도 알고 싶다… 많이 벌어들이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질문이라 할 수조차 없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답답함보다 안타까움을 더 크게 느끼곤 한다. 이런 질문들은 ‘쫓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크게, 더 일찍 무엇인가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던지는 질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친구들이 좀 더 시간을 갖고 스스로 생각해보길, 남을 동경하기보다 더 나은 모습의 자신을 꿈꿔보길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인 걸까. 표면적인 속도는 잠시 내려놓고 내 안에서 긴박하게 꺼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성찰하길 바라는 것은 아둔한 생각인걸까. 신연식 감독 또한 이런 친구들을 많이 봐온 듯했다.

“영화 지망생, 예비 감독이나 연기자들을 만나고 가르치다 보면 자신의 인생이 답답한 것과 정말 절실한 것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절실한 아이들은 스스로 어떤 시도를 해보고, 내·외적 갈등을 겪는 동안 시행착오를 경험하니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아이들은 피상적인 질문만 늘어놓죠. 상식적이고, 모두가 아는 이야기만 합니다. 남 핑계도 많이 대요. 반면 절실한 아이들은 상식적인 이야기를 안 해요. 타인이 내놓은 이미지나 현상만 놓고 사유하지 않죠. 자신이 하려는 일을 진지하게 대하려면 그에 걸맞은 성찰이 필요해요. 이 땅에 태어나 세상에 할 얘기가 있는지, 이 일을 왜 하는지, 그로써 어떤 의미가 형성되는지에 관해서 말이죠. 어떤 대상을 통해 벌어진 현상이 나와 만났을 때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를 내면화하는 과정 가운데 진정성이 나오니까요. 그저 좋아서, 멋있어서 하는 것은 ‘왜’ 하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어요.”

행동과 관념의 수련 _진정성을 가려내는 방법

픽션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비록 나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대상에 이입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미약하게나마 숨기며 더욱 솔직하고 대담한 세계를 그려내고, 자신을 펼쳐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픽션이어도, 내면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면화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영화는 허구로 진짜를 그려내는 작업인 것이다. 피카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예술이란 진실을 보게 만드는 거짓말’이라고.

“진정성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철저히 맞춰 기획하고 부응할 때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다르게 포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건 심각한 것과는 다른 거예요. 예를 들어 ‘재미’가 핵심이라면 관객에게 오락적 요소를 성실하게 전달해야 해요. 끝내주게 재밌게 만들어 돈 벌면 되는 거죠.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봐요. 하지만 거기에 명예까지 얻고 싶어서 무언가를 첨가하거나, ‘가짜 비극’을 만들어내는 건 사기이고 부도덕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가짜’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이 있기에 대부분의 사기 행각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자세히 묘사하고 설명하죠. 그렇게 해야 속일 수 있는 거죠. 하지만 그건 인간과 시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정성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 거짓을 통해 진정한 사실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창작 과정이다. 어떤 현상의 실체는 생각보다 허무하고 손쉽게 가려지기에, 잘 속일 수 있다면 굳이 진실의 밑바닥으로 파고들어가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젠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조차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나 종교적 논쟁 또한 진짜가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특유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줄 세우기’가 만연해졌죠. 이런 사회에선 소비 패턴조차 순서에 맞춰 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를테면 작은 평수의 집에서 큰 평수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욕망,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이 생략되고, 부조리에 대한 분노나 고통이 마비되죠. 개개인의 본질을 생략한 채 줄을 서서 기다리는 바보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에 분노해야 하는데 그런 시간과 힘조차 뺏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그래서 개인의 고통을 자꾸만 외면하게 돼요. 진정성을 갖기 점점 더 힘든 상황인 거죠.”

언제부턴가 ‘강하다’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상황을 가리킬 때가 많아졌다. 자신의 생각이 확고하고,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고 싶은 사람은 오히려 외면당하는 경우도 많다. ‘강력한 개인’이야말로 사회의 틀을 변화시키고, 자본이 쌓아온 데이터베이스에 생소함을 던지는 것으로 각자의 주체성을 찾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강력한 개인, 나아가 유일무이한 자율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개인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마지막 수련 _불편한 본질에 가까워지기

우리는 각자 모두 다르다. 잠을 자고,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요의를 해결하고, 무언가를 먹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행동의 패턴이 비슷할지라도, 양상이나 디테일은 제각각이다. 어쩌면 끊임없이 흘러가는 커다란 수레바퀴를 이해하기 위해, 아주 작은 존재인 우리의 면면을 더욱 유심히 관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욕망, 나의 아름다움, 나의 추악함을… 비록 그것이 불편할지라도 말이다. 진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늘상 불편하기 마련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금, 불행하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스스로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와 있다는 방증이다.

“사람은 상품이 아니잖아요. 사람은 유기체이거든요. 어떤 사람의 장점은 단점이기도 해요. 결국 그 사람의 특징인거죠. 기능적인 것들은 특징이 맞아떨어지면 다 잘하게 되어 있어요. 나를 통해 일어났으면 하는 현상이 무엇인지, 그 현상이 자신의 욕망과 특징에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생각하며 표현 방식을 이어간다면, 행복과 불행이 반복되더라도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성취감으로, 의식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함께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신연식 감독은 손끝이나 발끝에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전체적인 몸의 중심을 느끼라는 디렉션을 내게 주었다. 예술, 그리고 인생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피부로 느껴졌다. 억지 노력을 하기보다 지금 가진 자신의 특징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방향은 자연스럽게 잡혀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의 거대함에 짓눌리기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표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저는 영화를 동경하지 않습니다. 그래봤자 영화이니까요. 평범하게 때론 정확하게 받아들일 뿐, 동경하거나 숭배하는 건 그 대상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으니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에 맞춰 이야기를 택하고, 작품을 만드는 거죠. 환상 없이.”

환상과 함께 부풀려진 꿈을 꾸기보다 현실을 오롯이 바라보고 올바른 방향을 가꾸어나가는 것. 시선을 ‘전체’에 맞추고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전체를 향한 시선은 본질의 심연까지 꿰뚫어보기엔 너무나 얄팍하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의 시선을 빌려 대입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그만이 만드는 것이기에. 세상도, 종교도, 가족도, 음악도, 반려자도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닐 게다. 오직 나만이 나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개인적인 시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만이 ‘나’라는 미약한 존재를 통해 소중한 가치를 표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본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 ‘참회록’, 윤동주

영화감독 신연식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개성 짙은 영화를 제작사 (주)루스이소니도스를 통해 내놓고 있는 신연식 감독은 독립장편 ‘좋은 배우’(2005), 안성기·이하나 주연 ‘페어러브’(2010), ‘러시안 소설’(2012), ‘배우는 배우다’(2013), ‘조류인간’(2014), ‘프랑스 영화처럼’(2015) 등을 선보였다. 특히 지난해 그가 각본·제작을 맡고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동주’(2015)는 대중과 평단에 큰 울림을 남겼다. ‘동주’로 새 장을 연 신연식 감독의 예술인 시리즈는 이후 가수 이난영을 조명할 예정이다

글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는 한국에서 태어나 예원학교를 수석 입학, 재학 중 인생의 멘토 폴 켄터를 만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국 클리블랜드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커티스 음악원을 거쳐 다시 폴 켄터의 문하로 돌아가 클리블랜드 음악원 학사 학위를 마쳤다. 제이미 라레도 교수와 동 학교에서 석사, 전문사 과정을 마쳤으며 2014년 세계 3대 콩쿠르인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1위를 수상했다.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거리 공연 프로젝트 ‘클래시컬 레볼루션 코리아’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2016년 여름 음악 캠프인 앙코르 체임버 뮤직(www.encorechambermusic.org) 음악감독을 맡았다. 동물을 사랑하고, 아이폰 중독자이며, 자연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TV 보는 것을 음악보다 좋아한다

사진 심규태(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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