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1월 1일 12:00 오전

음악이 하나인 이유

10월 19일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니스트가 애호하는 아시아 작곡가 작품 연주회’가 열렸다. 한국피아노학회가 주최하고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가 후원한 이날 음악회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작곡가의 피아노 작품을 각국의 피아니스트들이 한 무대에서 연주해 우리나라의 공연 예술과 창작, 그리고 국제교류 활성화에 큰 의미를 남겼다.

이날 연주회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5인의 피아니스트 장혜원, 이경숙, 이대욱, 조영방, 함영림이 무대에 올랐다. 재즈 피아니스트 이우창과 신지화도 특별 출연해 색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첫 곡은 일본 피아니스트 에노키다 마사시의 연주로 펼쳐졌는데 안정된 테크닉과 곡에 대한 이해가 피아노 선율 속에 잘 살아나 있었다. 요시다 다카코의 ‘카노네’ 역시 멜로디와 작품 색깔이 연주자의 피아니즘과 잘 어울렸다.

박정선의 작품은 피아니스트 조영방이 연주했다. 조영방은 과도한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섬세하고 풍부한 음악성으로 슬픈 감성을 잘 표현했다. 왕양빈의 섬세한 연주에 이어 소프라노 신지화와 피아니스트 장혜원이 권용진의 ‘정원’을 들려주었다. 서로의 음악적인 조화가 곡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특히 장혜원의 섬세하고 풍부한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전반부의 마지막은 이경숙이 연주한 이영자의 ‘엄마야 누나야’였다. 서정적이고 따뜻한 감성이 절제된 피아노 선율 속에 묻어나 깊은 감동을 준 시간이었다.

후반부는 베트남 피아니스트 응웬 찌네 훙과 응웬 티 탄 반(하노이국립음대 교수)의 연주로 시작되었다. 이종구의 ‘한국풍의 아리아’는 함영림의 완성도 높은 연주로 이어졌고 니콜라스 옹(난양예술종합학교 교수)은 작품의 구조를 잘 살려 피아노 선율 속에 담아냈다. 이대욱의 연주 역시 탄둔 작품 내면을 충실히 이해한 훌륭한 연주였다. 이계석의 ‘초록빛 바다’는 베이스 허진호와 피아니스트 이우창이 호흡을 맞췄다. 리드미컬한 전개가 돋보이는 가운데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마지막 곡은 김동환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어린시절’이었다. 장혜원은 순수하고 맑은 피아니즘으로 이날 연주회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아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 아시아 문화의 창이 되기 위한 노력이 각 분야마다 활발할 가운데 피아니스트가 좋아하는 아시아 작곡가 작품 연주회는 의미도 여운도 깊은 시간이었다. 서로 음악으로 하나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가 무대에서 발현된 것이야말로 이날 연주회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국지연

우리는 모두 작가다

‘상실’과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를 본다는 것, 그 시간을 ‘공유’한다는 건 그야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들이 개인―사회, 시대―시대를 관통하고 있다면, 그 매체가 공연예술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객석에 앉아 부새롬 연출의 김은성의 신작을 보는 내내 ‘이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싶은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 묵직하게 자리했다.

소설가 승우가 써내려가는 소설은 1940년대 일본군 위안부, 한국전쟁, 제주 4·3사건, 군사 정권 등을 지나 극 중 현재인 2019년까지 파란만장한 우리네 근현대사를 펼쳐놓는다. 이 시대의 간극에서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병의 전장일기 수첩은 중요한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너덜너덜한 수첩에 써내려간 크고 작고 아픈 개인의 오늘은 역사가 되었고, 그 궤적을 이루는 하나의 점으로서 ‘나’라는 존재들의 이야기는 결국 낯선 타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닫는 순간이었다.

소년병의 전장 일기를 연상케 하는 공연 프로그램 북, 공연 내내 생존 확인의 노크 소리 ‘똑, 똑똑, 똑똑똑’, 제주 해녀의 숨비소리를 닮은 휘파람,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포크 음악 등 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는 크게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상징적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공연 후 싱어송라이터 최고은, 프로듀서 황현우가 작곡·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연극으로는 드물게 O.S.T가 발매됐다는 소식 또한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편 길고 긴, 인터미션 포함 180분의 시간 동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연 전반부가 끝난 뒤에도 아직 등장하지 못한 인물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절반이나 읽은 소설의 끝은 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호소력 짙은 작가의 목소리와는 별개로, 어느 정도 예상되는 전개와 결말에 다다르는 정직한 시간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객이 내 주변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 모두 작가’이며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외침 덕에 그동안의 삶에서 잠시 가둬두고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지극히 개인적인, 하지만 언젠가 역사의 한 점이 될 순간들 말이다. 김선영

불편하고 두려운 햄릿

타이거 릴리스와 리퍼블리크 시어터가 선보인 음악극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희곡에서 드러낸 다층적 의미를 곱씹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 이 시대 모습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수작이었다. 여기에 상징적이면서도 색다르고, 위트 있는 무대예술이 더해져 이 작품이 오래도록 기록될 만한 또 하나 새로운 ‘햄릿’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했다.

리퍼블리크 시어터는 덴마크 코펜하겐을 대표하는 극장으로 2009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연출가이자 무대 디자이너인 마르틴 툴리니우스와 디렉터 한스 크리스티안 김벨이 운영하고 있다. 툴리니우스는 음악극 형식의 ‘햄릿’을 구상하며 자연스레 영국의 3인조 컬트 밴드 타이거 릴리스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들의 현대적 해석에 동감한 타이거 릴리스의 보컬 마틴 자크가 19곡의 멜로디와 가사를 만들었고, 자크는 작품 속에서 해설자로 등장해 카스트라토 창법으로 노래를 부른다. 타이거 릴리스와 리퍼블리크 시어터의 배우들은 무대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가사의 표현, 영상 활용, 구조물의 움직임, 조명 등 모든 면에서 과감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햄릿과 거트루드가 싸우는 장면에서는 벽이 90도로 천천히 쏟아지고, 둘은 그 벽을 통과해 위에 올라서서 장면을 이어갔는데, 운명의 무게를 드러내면서도 욕망의 크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상적인 연출이었다. 오필리어가 줄에 매달려 공중으로 치솟아 물속을 배경으로 유영하듯 춤추는 장면, 줄에 매달린 배우들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춤추는 장면 등에서 풍부한 상상력을 느낄 수 있었다.

마틴 자크의 기괴한 목소리와 시적인 가사는 가슴을 울렸지만, 비슷한 분위기와 선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후반부에서는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들었고, 나중에는 오히려 극의 몰입을 방해한 점은 아쉬웠다.

궤변과 진실, 욕망과 절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면서도 이를 시종 희화화하는 접근법은, 도무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극이 흐르며 점점 조롱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할 지경이었는데, 정확히 연출가의 의도였으리라. 이 시대의 ‘햄릿’을 만난,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김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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