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F 앙상블 ‘뮤직&일렉트로닉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7년 1월 1일 12:00 오전

2016년 11월 24일
올림푸스홀

우리 시대의 악기, 우리 시대의 목소리, 우리 시대의 메시지

“역사는 종언(終焉)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89년 발표한 이 도발적인 선언은 클래식 음악, 특히 악기의 역사에 얼추 들어맞는다. 오늘날 제작되는 바이올린족 악기는 16세기 초 크레모나 명기들의 복제품이며, 관악기는 19세기 악기에 장식을 몇 개 더 추가한 정도다. 하지만 후쿠야마가 1999년에 과학기술이 새로운 변수임을 스스로 지적했듯, 20세기 초에 실험적으로 개발된 전자악기는 종언된 듯한 악기사의 마지막 챕터를 늘려가고 있다. 컴퓨터의 발전과 스마트폰의 탄생은 그 끝을 더욱 멀리 밀어놓았다.

TIMF 앙상블의 전자음악 연주회의 첫 곡 그자비에르 가르시아의 ‘메피스토’는 이러한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비록 무대가 좁아 작곡가가 원하는 ‘스마트폰의 합창’을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음악과 (동작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무용을 아우르며 멀티미디어적 차원으로 나아간다. 스마트폰이 (기존 악기의 복제가 아닌) 새로운 악기가 된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점지한다.

연주를 마이크로 수음하여 실시간 변조를 통해 스피커로 내보내는 ‘생전자음악(live electronics)’은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후지쿠라 다이의 ‘프리즘 스펙트라’는 상당한 스태미나를 요구하는 비올라 독주와 생전자음악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자기로부터 발현했지만 변화하고 확장된 형태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부메랑 현상은 우리의 삶과 닮지 않았던가? 그저 이들이 선한 형태로 돌아오기를, 그래서 자기와 긍정적인 조화를 이루기를 바랄 뿐이다. 비올리스트 라세원과 크레마(CREAMA)의 사운드는 이러한 점에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요즘과 같은 난세에도 희망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병무의 ‘자이로-페이즈’는 이번 연주회에서 가장 다양한 악기(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타악기)가 사용된 작품으로, 그만큼 다채로운 음색이 돋보였다. 서로 다른 음색을 가진 악기들이 만나고 흩어짐으로써 형성되는 다이내믹은 소리 자체보다는 감상자의 인지 작용으로 감각되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후반부 첫 곡인 얀 마레스의 ‘메탈릭스’는 트럼펫과 전자음악을 위한 작품으로, 다양한 약음기로 트럼펫의 음색을 컨트롤한 점이 눈에 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입력 변수의 변화 폭을 더욱 확장하여, 그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사운드를 얻었다. 그만큼 돋보이는 독주로 소리 풍경(sound-scape)을 배경으로 고독한 트럼페터가 펼치는 순수음향의 모노드라마가 되었다.

카이야 사리아호의 ‘넹페아’는 현악 4중주와 전자음악을 위한 곡으로, 특히 현악 4중주는 소음과 음악의 경계에서 수련이 떠다니는 모습을 음화한 듯한 난무하는 글리산도가 전체를 지배하며, 다양한 음악적 표현과 제스처를 포함한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시 낭독도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전자음악은? 해설에 쓰인 대로 ‘화성적인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음향을 풍부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비교적 소극적인 적용이지만 어쿠스틱과 전자음악의 조화는 단연 최고다.

마지막 곡 실바의 ‘프레임 #87’은 클라리넷 독주와 전자음악, 그리고 영상이 함께 등장한다. 자주 깜박거리고 원색적인 영상은 정신착란을 유발할 듯한 상당한 고통을 주며, 클라리넷은 이러한 시각적 다이내믹에 동조한다.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날아드는 펀치에 청중은 어느덧 너덜너덜하게 쓰러져 있게 된다. 이러한 일종의 폭력은 사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모습이다. 어쩌면 눈사태 속에서 동사할 위기에 처한 동료들을 깨우기 위해 뺨을 세차게 내려치는 것처럼, 이 작품은 변덕스러운 세상에서 깨어 있으라는 정신적 자극임에 분명하다.

사진 TIMF 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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