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조르주 프레트르

위대한 침묵을 남기고 떠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7년 2월 1일 12:00 오전

한 존재가 남긴 흔적을 사람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측정한다. 많은 부를 축적하고 유명해지는 것을 성공이라 믿는 이들은 삶 속에 엄청나게 풍요로운 다양한 가치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에 왔다가 떠나갈 수도 있는 부류인지도 모른다.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저 짧은 여정이라 믿는 이들에게 성공한 삶이란, 살아 있는 동안 얼마만큼의 울림과 빛을 사람들과 나누고, 남기고 떠나느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큰 울림과 빛을 지녔던 한 음악가가 새해를 맞자마자 우리 곁을 떠났다. 프랑스 지휘자 조르주 프레트르(1924~2017). 그가 1월 4일, 93세의 나이로 우리에게 깊은 침묵을 남겨놓았다.

뜨거운 음악 여정의 시작

파리에서 프레트르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마치 자신의 손자들처럼 다루었다. 그에게 지휘는 한바탕 즐겁게 노는 일처럼 보였다. 당시 프레트르는 이미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매우 건장해 보였고 에너지 넘쳤다.

프레트르는 1924년 프랑스 북부 지역의 와지에에서 태어났다. 7세에는 인근 지역인 두에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두에 음악원의 교장은 학생 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해 음악적으로 뛰어난 학생들에게 오케스트라 악기를 하나씩 배우도록 했다. 음악원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값이 비싼 오보에 대신 트럼펫을 선택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프레트르는 15세의 나이로 파리고등음악원에 입학했고, 어쩔 수 없이 시작했던 트럼펫으로 학교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파리고등음악원 학생 오케스트라를 메시앙과 클뤼탕스가 보는 앞에서 지휘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어려운 시대였고, 프레트르는 돈을 벌어야 했다. 트럼피터로 파리의 연주회장에서 에디트 피아프, 샤를 트르네 등이 노래하는 그룹에서 연주했다.

20세가 되었을 때, 전쟁이 끝났고 그는 조르주 데랭이라는 이름으로 작곡을 하면서 지휘자의 꿈을 키웠다. 지휘자로서 그의 경력은 마르세유 오페라에서 시작됐다. 당시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지휘하고자 하는 두 명의 지휘자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상황이었다. 한 성악가가 마르세유 오페라의 책임자인 장 마니에게 ‘이 오페라를 매우 잘 아는 다른 젊은 지휘자가 있다’고 말했고, 장 마니는 프레트르에게 정말로 이 오페라를 지휘할 수 있는지 물었다. 프레트르는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했지만,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프레트르의 대답에 장 마니는 ‘그렇다면 다음 주에 당신이 지휘를 하라’고 말했다.

공연 당일 프로그램 북에는 프레트르의 이름이 표기되지 않았고, 성악가·무용수들도 피아노로 연습했던 프레트르를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다. 공연 직전 한 젊은이가 어둠 속에서 등장했을 때만 해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가 누구이고, 왜 마지막에 등장해 지휘대에 오르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프레트르는 긴장과 흥분으로 손이 너무나 떨린 나머지 지휘봉을 놓고 맨손으로 지휘했다. 공연은 성공리에 마무리됐고, 다음 날 장 마리는 그를 마르세유 오페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했다. 또한 장 마리는 훗날 프레트르의 장인이 된다.

그의 지휘자로서 경력이 이렇게 프랑스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날개를 펴기 시작한 것은 다른 곳에서였다. 이상하게도 프랑스 지휘자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나라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지휘자로서 크게 성장한 곳은 미국과 이탈리아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한 오페라를 연속적으로 상연할 때 최소한 사흘간의 간격을 두어야 했다. 성악가들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그의 숨가쁜 일정은 이랬다.

‘뉴욕에서 ‘파르지팔’을 지휘한 뒤 시카고에서 두 번의 연습과 지휘를 하고, 다시 뉴욕에 돌아와 ‘파르지팔’을 지휘하고 필라델피아에 가서 다른 연습과 지휘를 하고, 메트(MET)에서 바그너의 다른 오페라를 지휘하고, 그 사이 보스턴에서 또 다른 연주회를 지휘하곤 했다.’

음악가들이 사랑한 마에스트로

지휘자로서 최고로 화려한 시기일 줄 알았던 프레트르에게 또 다른 기회와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 스칼라에서 17년 동안 지휘한 것이다. 그는 각 시즌에 최소 두 편의 오페라를 지휘했다. 베를린 필으로부터 첫 번째 초대장이 날아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39세 때였다. 그는 블라허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관현악 변주곡’,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그리고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을 지휘했다. ‘전람회의 그림’은 당시 그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였다. 베를린의 청중은 프레트르에게 기립 박수로 환호했고, 그가 독일·미국·이탈리아에서 활발히 활동할수록 파리에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의 국제적 명성이 올라가자, 파리 오페라는 다시 한 번 그에게 고국에서 활동할 것을 손짓했다. 프레트르는 파리 오페라의 음악감독직을 수락했지만, 음악 외에도 너무나 많은 업무에 시달려 일 년 만에 음악감독직을 내려놓았다. 그때가 1971년,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이후 프레트르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초대로 빈 슈타츠오퍼에서 지휘했고, 오토 클렘페러를 대신해 마지막 순간에 베토벤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적 성과와 인정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뿌리를 내려갔다. 빈 필이 음악감독직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그 대신 1986년과 1991년 사이에 수석객원지휘자로 빈 필을 지휘했고, 오케스트라는 그에게 종신명예지휘자직을 수여했다. 프레트르는 모든 행정적인 일로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는 대신 음악에만 집중하고 싶어 했다. 그에게 오케스트라는 ‘순수한 피’였다. 행정적인 분주함으로 집중력과 에너지를 뺏기면, 이 ‘순수한 피’를 들끓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대부분을 지휘한 프레트르는 독일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위 ‘독일적 사운드’를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단언했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음악가들은 모두 매우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지휘자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소리와 해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프레트르의 믿음이었다.

그의 삶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작곡가 프랑시스 풀랑크다. 풀랑크는 자신의 작품 해석을 맡기기에 가장 믿을 만한 지휘자가 프레트르라고 여겼다. 비록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프레트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유롭게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도록 내버려두었을 정도다. 프레트르는 풀랑크의 ‘인간의 목소리’ ‘글로리아’를 세계 초연했고, 그의 교향곡을 녹음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은 마리아 칼라스다. 칼라스는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지휘자로 주저 없이 프레트르를 꼽았다. 프레트르는 칼라스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신이 만난 성악가 중에서 가장 소박하면서 자발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칼라스의 변덕스러운 모습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며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침묵 속에 영원히 잠들다

2008년과 2010년 프레트르가 빈 필의 신년음악회에 프랑스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초대되었을 때, 프랑스 내에서 그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뒤늦게 그에게 많은 영예와 존중을 바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가 여든을 넘어서였다. 지난해 10월 12일 빈 필을 지휘한 것이 그의 마지막 연주회였다.

자신의 집이 있는 프랑스 나베트 지역의 강가를 느긋하게 거닐며, 자연과 신이 준 그림과 음악을 보고 들으며 내면을 충전하곤 했던 조르주 프레트르. 이 커다란 영혼의 사망 소식을 처음으로 전한 것 역시 빈 필 측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르 몽드’지, ‘르 피가로’지 등 주요 일간지가 특집으로 그의 사망 기사와 그가 남기고 간 세계적인 경력을 회상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라디오 방송은 하루 종일 프레트르를 기리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난 1월 5일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가 사망한 지 일 년이 되는 날이었지만, 프레트르의 사망 소식으로 불레즈 서거 1주년 소식은 프레트르에게 지면과 시간을 양보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프레트르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음악가였는지를 말해준다.

장례식은 1월 7일 나베트에서 아주 조용하게 치러졌다. 프레트르는 자신의 장례식에 아무런 음악도 연주하지 말라고 했기에, 장례식은 침묵 속에서 가까운 이들만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침묵은 위대하고, 감동적인 음악이 존재하기 위한 바탕이다. 침묵 없이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는 남은 이들에게 침묵을 선사하고 떠났다. 프레트르는 ‘음악은 몸과 정신의 산물이고, 악보란 회화나 조각처럼 이 몸과 정신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지휘자란 결국 소리를 바탕으로 화가나 조각가가 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며 악보는 그저 정물화에 불과할 뿐, 결국 이것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음반으로 추억하는 프레트르

풀랑크 ‘인간의 목소리’
소프라노 드니 뒤발, 파리 오페라 코미크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이 음반은 풀랑크 작품에 관한 한 매우 중요한 레퍼런스로 남을 것이다.

푸치니 ‘토스카’
프레트르는 마리아 칼라스와 수많은 공연과 녹음을 했다. 이 녹음은 마리아 칼라스와 ‘토스카’를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으로, 프레트르와 칼라스의 공동 작업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녹음이라 할 수 있다. 프레트르는 칼라스와 프랑스 작곡가들의 오페라 아리아들도 EMI에서 녹음했는데, 이 역시 중요한 녹음에 속한다.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은 이 작품에 대한 프레트르의 인간적인 동시에 환상적인 해석을 잘 보여준다. 비록 프랑스는 프레트르를 늘 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 해석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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