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도허티 Michael Daugherty 오늘날의 음악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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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8월 12일 12:00 오전

이르캄에서의 도허티

 

 

 

 

 

 

 

 

 

 

 

 

 

 

 

 

 

 

 

 

 

 

 

 

오늘날의 삶은 과거와 어떻게 다를까? 슈퍼맨과 같은 히어로와 함께 성장하고, 팝과 록 음악으로 젊음을 불태우며 고속도로에서 질주하는 쾌감을 즐기고, 유명인사에 열광하거나 UFO·타임머신과 같은 공상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면 분명 과거의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오늘날 특유의 라이프 스타일을 살아가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를 노래한 마이클 도허티(1954~)의 음악 또한 오늘날 특유의 음악 스타일이다.

 

도허티 가의 패밀리 밴드

장르의 구분없이 수용하다

도허티가 성장한 곳은 미국 중북부의 세다 래피즈였다. 아버지 윌리스는 재즈·컨트리·웨스턴 장르에 능숙했던 댄스밴드의 드러머였고, 어머니 이블린은 아마추어 가수였으며 할머니 조세핀은 피아니스트였다. 집에는 브로드웨이 음악을 수록한 음반이 즐비했고, 주말이면 친척들이 모여 틴 팬 앨리의 음악을 연주했던 것을 보면 도허티의 가족은 주로 뉴욕의 대중음악을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TV로 음악 프로그램을 시청하곤 했다.

도허티의 첫 음악선생님은 거실에 놓여있던 플레이어 피아노(자동 피아노)였다. 타고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는 8세에 이 피아노의 동작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피아노 연주법을 터득했다. 아버지와 삼촌인 대니 니콜로부터 록과 재즈 드럼을 배워 1963~67년에 드럼연주단인 ‘에메랄드 기사단’에서 베이스드럼을 연주했으며, 근위보병대의 드럼&버글 연주단에서 톰톰(혹은 탐탐. 드럼 세트를 구성하는 원통형의 울림통)을 연주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음악활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10세 즈음에 떠난 가족 여행은 도허티의 안목을 보다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이 조각된 러시모어 산과 나이아가라 폭포, 마이애미의 해변, 그리고 런던까지! 1960년대의 런던은 비틀즈와 지미 헨드릭스 등이 활동하던 곳으로, 도허티 가족에게 있어서는 성지순례와도 같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이와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베트남 전쟁 반대 등 연일 계속되는 거친 시위로 어수선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도 어린 도허티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폭넓고 다양한 경험과 자극은 도허티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사회와 지역을 바라보는 도허티의 음악관에 영향을 미쳤다.

고등학생때는 학교의 록·소울·펑크 등을 연주하는 밴드인 ‘소울 컴퍼니’의 리더이자 편곡자 겸 건반 연주자로 활동했다. 당시 도허티는 악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LP 레코드를 들으며 악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고등학생을 위한 여러 행사에 참여했으며, 나름대로 아이오와 주 내에서 유명해지면서 ‘데일 토마스 쇼’의 피아니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된 그는 여러 아티스트를 인터뷰하여 고등학생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후 노스 텍사스 음대로 진학한 도허티는작곡과 재즈를 공부하면서 대학 내의 재즈 연주단인 ‘투 어 클락 랩 밴드’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또한 1977년까지 여러 대중음악 스타들과 함께 지역 음악축제에서 해먼드 오르간을 연주했으며, 버라이어티 TV쇼인 ‘더 로렌스 웰크 쇼’에 고정출연했다.

 

클래식 음악에 눈 뜨다

10대부터 재즈 아티스트로서 활동해온 도허티가 클래식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새뮤얼 바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서였다. 주체할 수 없는 영감으로 ‘관현악을 위한 악장’을 작곡했고, 1974년에 노스 텍사스 대학의 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도허티의 비범한 재능을 감지한 학교의 작곡과는 그에게 장학금을 수여하여 공부를 지원했으며, 그는 1976년에 작곡과를 졸업했다.

어엿한 작곡과 출신이 된 도허티는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어린 시절의 음악적 이상향이었던 뉴욕으로 달려갔다. 재즈가 아니라 현대음악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카네기 홀의 안내원과 뉴욕 시티 발레의 연습 피아니스트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맨해튼 음대 대학원에서 찰스 우리넨에게 2년 동안 음렬음악을 배웠다.

도허티는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바쁜 가운데 틈틈이 현대음악 연주회에 참석하면서 당시 현대음악의 리더였던 밀턴 바빗·모턴 펠드먼·피에르 불레즈 등을 만났다. 특히 당시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었던 불레즈는 도허티가 1978년에 학교를 졸업하자, 자신이 1년 전에 파리에 설립한 IRCAM(이르캄)에 지원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도허티는 1979년부터 이듬해까지 약 1년간 IRCAM에서 컴퓨터 음악을 공부하게 됐다. 이 기간은 도허티가 새로운 음악을 경험하는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루치아노 베리오·제라르 그리제이·프랭크 자파 등 이미 거장이거나 곧 거장이 될 재능 있는 음악가들과 교제하면서 더 넓은 세상과 조우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기간에 파리고등음악원에서 분석 수업을 듣는 등 파리에서의 시간을 조금도 허투로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 가을, 파리에서의 밀도 높은 경험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예일 음대 작곡과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당시 예일 음대에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작곡가 중 한 사람이자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작곡가였던 제이콥 드러크먼이 학장으로 있었다. 도허티는 드러크먼의 제자가 되었으며, 퓰리처상 수상자인 버나드 렌즈와 로저 레이놀즈로부터도 배웠다. 그래픽 악보와 우연음악으로 음악사에 기록되어있는 얼 브라운도 그의 스승이었다. 또한 아론 제이 커니스와 뱅온어캔을 설립한 마이클 고든·데이빗 랭·줄리아 울프 등 뛰어난 동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길 에반스와 다름슈타트와의 인연

클래식 음악에 대한 학구열이 식을 줄 모르는 가운데서도 재즈 음악가로서의 활동 또한 멈춘 적이 없었다. 그의 할머니가 했던 것처럼 고전 무성영화를 상영하면서 신디사이저로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가졌으며, 예일 재즈 앙상블을 이끌며 재즈 혼 연주자 윌리 러프와 작업하기도 했다.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러프는 편곡 조수를 찾고 있던 재즈의 거장 길 에반스에게 도허티를 소개해주었다. 이후, 도허티는 수년간 에반스의 스튜디오가 있는 맨해튼을 오가며 악보를 정리하고 작업을 도왔다. 그와 에반스의 작업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마일스 데이비스가 1958년에 녹음할 때 사용했던 ‘포기와 베스’의 편곡을 복원한 것이었다.

1982년 여름, 도허티는 유럽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현대음악의 총본산인 다름슈타트 하계과정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퍼니호와 슈토크하우젠의 강의를 듣는 등 거장들로부터 최신 현대음악을 접했다. 하지만 도허티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슈토크하우젠의 아들이자 트럼페터인 마르쿠스와 친구가 된 일이었다. 뛰어난 즉흥연주 실력을 가진 마르쿠스와 신디사이저를 연주했던 도허티는 실험적인 즉흥연주를 즐겼다. 이 콜라보레이션은 유럽의 여러 무대에서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리게티는 도허티를 함부르크로 초청했다. 그는 함부르크 음대에 등록하여 리게티의 집에서 이루어진 작곡 수업에 참석했으며, 리게티는 그 해 ISCM에서 도허티의 음악을 소개했다. 덕분에 콘론 낸캐로우와도 친분을 가질 수 있었다. 도허티는 노스 텍사스 대학과 예일 대학에 있었던 때처럼 함부르크에서도 클래식을 공부하면서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주제는 슈퍼맨, 미국을 노래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인정받은 주요 클래식 작곡가로서 30대의 나이까지도 내세울 만한 변변한 곡이 없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도허티는 1988년부터 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휘자 데이비드 진먼의 격려를 받으며 한 작품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작 ‘메트로폴리스 심포니’(1993)를 완성했다. 이 곡의 주제는 만화 주인공 ‘슈퍼맨’! 사실 미국인에게 슈퍼맨은 단순한 만화 주인공이 아니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 등 20세기의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니체의 ‘초인’을 각색한 듯한 이름과 행적으로 미국인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존재였다. 그리고 미국은 슈퍼맨이 이끄는 ‘초국’이라는 자긍심까지 심어주었다. ‘메트로폴리스 심포니’는 이러한 미국인의 마음을 그린 작품이었다. 1994년에 데이비드 진먼이 지휘하는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초연과 함께 도허티는 일약 스타 작곡가가 되었고, 클래식 음악 작곡가 도허티의 커리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의 도허티의 작품들에는 미국인이 빠르게 공감할 수 있는 아이콘들로 채워졌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그린 ‘지붕을 올려라’(2003), ‘미국 모더니즘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바이올린 콘체르탄테 ‘달에 이르는 사다리’(2006), 그녀의 거처가 있던 뉴멕시코 주의 황량한 고스트 랜치의 인상을 더한 관현악곡 ‘고스트 랜치’(2006) 등 그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작곡의 대상, ‘인물’에 대하여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관심을 보인 대상은 ‘인물’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리버라치·라운지 리자드 등 대중음악가부터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스토코프스키, 미술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워싱턴·제퍼슨·루즈벨트·링컨·에드가 후버·로자 팍스 등의 사회적 인물, 낸시 시나트라·재클린 케네디와 같은 유명인사, 종교인 시스터 에이미·그리고 슈퍼맨과 같은 가상인물까지, 도허티는 이러한 시대적인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사회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인물을 직접 묘사하기 보다는 그 인물들과 관련된 사건과 이미지들을 소리로 변환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러한 변환은 일종의 수사학적 표현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도허티는 설명이 없어도 동시대인이 직관적으로 인지할 가능성이 높은 효과적인 표현을 택한다.

예를 들면 현악 4중주곡 ‘노래하라 노래하라: J. 에드가 후버’(1992)는 초대 FBI 국장으로서 저명인사들의 사찰을 서슴지 않았던 후버를 표현하기 위해 그의 육성 연설과 경고와도 같은 사이렌 소리, 도청을 상징하는 전화벨 소리 등 상징적이면서도 직설적인 소리가 더해져있다. 피아노 콘체르탄테 ‘리버라치의 무덤’(1996)은 클래식 음악을 브로드웨이 스타일로 편곡하여 인기를 얻은 리버라치처럼 다양한 인용과 패러디로 가득 채워 그를 기리며, 바이올린 콘체르탄테 ‘시나트라 섀그’(1997)는 팝과 현대음악의 경계가 흐려져 있다.

밴드곡 ‘로자 팍스 대로’(2001)는 흑인인권운동가 로자 팍스가 도허티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알려준 ‘오, 자유’가 단편으로 쪼개져 확대되고, 지휘자 스토코프스키를 주제로 한 밴드곡 ‘스토코프스키를 위한 종’(2002)은 스토코프스키가 바흐를 낭만적인 사운드로 거대하게 편곡한 것에 착안하여 바흐의 전주곡 다장조를 편곡하여 삽입했다.

바이올린 협주곡 ‘불과 피’(2003)의 1악장 ‘화산’은 디에고 리베라가 멕시코 출신이라는 점에 착안되었고, 2악장 ‘붉은 강’은 남편을 따라 디트로이트에 온 프리다 칼로가 유산으로 죽다 살아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를 인용했다. 네 명의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조각된 곳 ‘러시모어 산’(2010)은 그들의 말과 글을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데, 특히 1악장 ‘조지 워싱턴’의 경우 관현악이 ‘양키 두들’을 제시하면서 당시가 남북전쟁 시대임을 암시한다. 이와는 달리, 재클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마리아 칼라스·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앤디 워홀·마릴린 먼로 등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는 오페라 ‘재키 O’(1997)는 장르 특성상 인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미국 문화에 매료되어

‘장소’도 도허티가 자주 다루는 주제이다. 복합적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지만 장소에 집중되어있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밴드곡 ‘나이아가라 폭포’(1997)는 하행하는 음형이 전체를 지배하며, 관현악곡 ‘66번 도로’(1998)는 일리노이와 캘리포니아를 잇는 도로로서 경적 소리를 연상시키는 금속성 사운드와 추진력 있는 당김음 리듬이 장착되어있다. 관현악곡 ‘선셋 스트립’(1999)은 할리우드 서쪽을 지나는 도로로서 “감상자를 운전석에 앉히고”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음식점·호텔·나이트클럽·록 카페·재즈 라운지 등을 투어한다.

관현악곡 ‘모터시티 3부작’(2000)은 디트로이트의 유명음반사 ‘모타운’이 취급했던 R&B·가스펠·소울·펑크·록 등의 음악을 재현하며,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나이트클럽·술집·식당·주차장 등의 모습을 그렸다. 관현악곡 ‘필라델피아 이야기’(2001)에도 번화한 사우스 스트리트의 나이트클럽과 음악가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들을 보면, 도허티는 대도시 번화가의 나이트 라이프를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외에도 전자기타 협주곡 ‘지스 벤드’(2009)는 앨라배마에서 아프리카계들이 살던 곳으로, 퀼트가 유명했다. 그래서 도허티는 이 곡에서 록 음악과 남부의 포크 음악을 퀼트처럼 이어 붙였다. 또한 클라리넷과 밴드를 위한 ‘브루클린 다리’(2005), 튜바 콘체르탄테 ‘미시시피의 반영’(2013) 등 그의 작품에서 오늘날 미국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만화와 같은 공상적인 주제들도 흥미롭다. ‘메트로폴리스 심포니’에서도 슈퍼맨의 고향인 크립톤 행성을 미분음·글리산도·사이렌 등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를 그리고, 타악기 협주곡 ‘UFO’(1999)에서는 워터폰·사이렌 등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며 UFO가 미끄러지듯 날아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여전히 논란 중인 1947년 로즈웰 UFO 추락사건을 다룬 것도 눈길을 끈다. 관현악을 위한 ‘타임머신’(2003)은 앙상블을 셋으로 나누어 세 명의 지휘자가 연주한다. 여러 리듬들이 복잡하게 교차하여 다차원적 공간을 형성하며, 감상자는 그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음악은 음악일 뿐

이렇게 도허티의 음악은 제목과 음악적 표현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관객은 음악을 들으며 그 메시지를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접근성이 높다. 이러한 특징은 음악을 표면적이고 말초적으로 만드는 위험성이 있는데, 도허티의 음악은 주제 자체의 묘사보다는 이를 둘러싼 인상을 포괄하여 주제의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시작은 유쾌하더라도 진지하게 결론을 맺는다.

여기에는 그의 복합적인 음악언어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재즈의 감성이 깊이 녹아있고 록, 팝, 펑크 등의 대중음악의 이디엄으로 가득 차있으면서도,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거장들에게서 배운 현대적인 화음과 찬란한 음색, 복잡한 구성, 복합적인 리듬 등이 주는 당당한 무게감이 예술음악으로서의 지위를 탄탄하게 받쳐준다. “내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대상을 참고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단지 나의 음악에서 음악적이고 대위적인 구조 안에 있는 많은 요소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 것은 이와 깊이 관련되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진영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 도허티의 강렬한 인상이 없는 곡이 없으며, 흔들림 없는 완성도로 연주자와 감상자 모두의 기대를 언제나 만족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기고와 해설, 강의 등 여러 활동으로 우리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의 프리렉쳐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로서 흥미로운 음악회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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