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이다. 영화는 줄곧 사회와 예술과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순을 보여주고, 희화화하며 조롱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것은 유럽 최고의 복지 국가 스웨덴, 그럼에도 빈민들이 거리에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제70회 칸 영화제는 예술을 조롱하는 이 ‘고급’ 예술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하며 찬사를 보냈지만, 어지럽게 뒤섞인 사회적 함의와 파편적 블랙 코미디의 요소는 영화 ‘더 스퀘어’를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이 영화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예술을 조롱하는 대상과 조금도 교감하지 않고 그저 관찰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다. 관찰하고 조롱하되 개입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더 스퀘어’가 현대예술을 읽는 태도이기도 하다.
빈민의 시대, 예술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레에스 방)은 새로운 전시 프로젝트 ‘더 스퀘어’를 준비하고 있다. 이 전시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설정된 사각형의 구역 안에서 서로를 보살피고 도와주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전시의 목적은 타인에게 무관심한 현대인의 태도를 반성하고 성찰하자는 것이다.
전시 준비를 하는 크리스티안에게 문제가 생긴다.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지갑과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하고, 이를 찾기 위해 벌인 일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이다. 그 사이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전시를 홍보하고자 하는 홍보업체의 광고를 인지하지 못한 그는 모든 논란을 책임지고 수석 큐레이터 자리에서 내려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전시를 준비하는 것보다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긴 하다.
영화의 시작은 난해한 미술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인터뷰를 진행하는 미국인 기자와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더 어려운 언어로 답변을 하는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의 불편한 인터뷰로 시작한다. 기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따져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이는 외스틀룬드가 ‘더 스퀘어’를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예술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난해한 언어를 당신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질문하고 있는가.
영화는 생명을 구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 풍경처럼 무시당하는 노숙자를 배경처럼 전시한다. 신뢰와 배려는 ‘더 스퀘어’라는 전시가 함의하고자 하는 선언이며, 의식이다. 미술관을 둘러싼, 이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들 누구도 이 전시의 의미를 실천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전시를 관람한 관객들에게도 ‘더 스퀘어’라는 전시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이 우아한 선언적 전시가 행동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어느 누구도 타인을 배려하거나 돕지 않는 실제 광장의 풍경과 거창한 의미를 담은 전시장의 풍경을 어지럽게 나열한다.
잘난 체하는 지식인으로 포장된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은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를 위협하는 남자로부터 여자를 구했다는 일종의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소매치기였다. 인간에 대한 호의는 신뢰로 이어지지 않는다. 위치추적으로 핸드폰이 있는 아파트를 찾아낸 그는 부하직원을 시켜 ‘협박 편지’를 아파트 집집마다 밀어 넣는다. 자신은 유명인이라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으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하직원을 시키는 것이다. 편지의 효과로 그는 지갑과 핸드폰을 돌려받지만, 이 편지 때문에 오해를 받은 소년이 찾아오면서 일은 더 복잡해진다. 소년은 사과를 원하지만, 그는 핑계만 늘어놓을 뿐이다.
크리스티안처럼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위선은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전시장에 초청받은 소위 사회 인사들은 전시보다는 음식에 집착하고,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들을 위한 클럽으로 변한 미술관과 왕궁에서 아는 체 위선을 떤다. 영화의 중간, 청소부가 전시작품인 자갈더미를 무너뜨리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지만, 사진을 보고 직접 다시 쌓아올리자는 큐레이터의 지시는 미술작품의 의미를 훼손하고 가치를 폄하하는 모순 그 자체이다.
야만의 시대, 예술
영화 속 전시 ‘더 스퀘어’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주목을 얻기 위해 부랑인 소녀가 폭파되는 광고 동영상을 만든다. 논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언론도 덩달아 흥분하지만, 정작 이들은 기삿거리만 취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사람들은 들어야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생명을 구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은 정작 거리에서 죽어가는 부랑자를 챙기지 않는다. 이런 위선적인 장면은 전시장 내부에서도 벌어진다. 유려한 수사로 가득한 전시 소개말을 묵묵히 듣던 사람들은, 요리사가 준비한 요리를 설명하는 순간 무시하며 케이터링 장소로 이동한다. 요리사는 자신의 말을 들으라며 버럭 화를 낸다. 평등에 대해 얘기하지만, 정작 들어야 할 사람 말만 듣고 귀담아들을 필요 없는 사람들의 말은 무시하는 현실을 담아낸 장면이다.
‘더 스퀘어’에는 오랑우탄 행위예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가 가장 힘주어 이야기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야만적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연회장에 모인 소위 지식인들은 오랑우탄의 퍼포먼스가 점점 과격해지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폭력적인 상황에 침묵한다. 공포심을 보이는 자에게 해를 가한다는 주의사항을 인지한 사람들은 오랑우탄 역할을 맡은 배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가 여자를 성추행하는 순간에 이르지만, 사람들은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끔찍하고 숨 막히는 장면이다. 한 노신사가 용기를 내어 나서자, 그제야 일어선 사람들은 오랑우탄을 연기하는 배우를 거칠게 폭행한다. 이 장면에 등장한 배우는 ‘혹성탈출’에서 유인원 역할을 직접 연기한 스턴트맨이자 연기자인 테리 노터리이다. 그는 흔히 우리가 동물이라고 부르는 오랑우탄이 야만적인 행동을 하리라 설정하고 폭력적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반려용 오랑우탄이 실제로 등장한다. 미국인 기자 집에서 함께 하는 이 오랑우탄은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용히 앉아 화장을 하는 등 사람보다 더 우아하고 얌전한 모습을 보인다.
감독 루벤 웨스틀룬드는 ‘모든 이들이 함께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바 있다. 하지만 영화 ‘더 스퀘어’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문제와 그 모순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관객으로 설정한 영화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시 쌓아올리면 그럴듯하게 다시 복원이 되어버리는 작품 속 ‘돌무더기’처럼, 영화 ‘더 스퀘어’가 직조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현대 예술에 대한 조롱이다. 예술이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지도 그 의미를 전파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토록 선명하게 설파하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지루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모순이며 동시에 핵심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은 파블로 피카소의 명언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