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모순된 감정이 부유하는 서늘하고 이기적인 도시. 뉴욕은 우디 앨런의 영혼을 담아낸 그릇이었다.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의 콤플렉스와 소심한 도시인의 자의식을 수다스러운 재담으로 풀어낸 그에게, 뉴욕이라는 도시는 계속 품고 가야 하는 정체성에 대한 거대한 질문이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 ‘로마 위드 러브’ 등 뉴욕을 떠나 방랑하는 이방인의 삶에 집중하던 그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1950년대 뉴욕의 변두리인 코니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앞선 영화들이 낯선 이물감을 주는 대신 신선했다면, ‘원더 휠’은 익숙하고 다소 뻔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홀리는 이야기라 약간 지루하면서도 많이 반가운, 그런 익숙한 맛의 영화다.
뉴욕·섹스·재즈의 도돌이표
코니아일랜드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지니(케이트 윈슬렛)의 삶은 지루하다. 어린 아들은 걸핏하면 불을 지르고, 남편 험티(짐 벨루시)는 폭력적이다. 그런 그녀의 삶 속에 험티와 전처의 딸 캐롤라이나(주노 템플)가 나타난다. 사실 지니는 안전요원 믹키(저스틴 팀버레이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캐롤라이나는 믹키와 사랑에 빠지고, 이를 알게 된 지니는 질투에 휩싸여 신경증에 휩싸이고, 그녀의 삶은 무너진다.
알려진 것처럼 ‘원더 휠’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크게 기대고 있는 영화다. 고전연극 같은 대사와 연극 톤의 들뜬 연기, 무대 세트 같은 인위적인 가구들과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미장센은 마치 무대 위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듯하고, 자연광이 아닌 인위적인 빛을 사용해 매우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1960~1970년대 우디 앨런의 초창기 영화는 슬랩스틱에 가까웠다. 코미디 작가 겸 배우로서 자신의 캐릭터를 영화에 늘 투영시켰다. 세상의 불공평함에 대해 불평하는 신경증 환자이자,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왜소한 남자로 등장하여 자신의 세계관이 스스로 만든 캐릭터가 되는 기이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 ‘바나나 공화국’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은 마치 찰리 채플린식 무성영화의 슬랩스틱을 섹스 코미디로 녹여낸 것 같은 영화였다.
그런 그의 작품의 전환점은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애니 홀’(1977)이다. 코미디언이지만 삶에 비관적인 남자 주인공 앨비(우디 앨런)가 당차고 쾌활한 여성 애니(다이앤 키튼)와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로맨틱 코미디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뉴욕이라는 대도시 속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지난하고 보잘것없는지 보여준다. ‘뉴욕·섹스·재즈’라는 우디 앨런의 공식이 시작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원더 휠’은 1950년대 뉴욕 변두리를 배경으로 우디 앨런이 뉴욕과 섹스와 재즈를 녹여낸 작품인데, 그의 전체 영화세계의 수준에서 보자면 도돌이표 같은 작품이다. 우디 앨런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을 담아내지만, 옷을 갈아입힌 초창기 바비 인형 같은 인공적인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우디 앨런은 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사람들의 삶을 이죽거리며 비웃었다. 한국 나이로 83세의 현역 감독에게 바라는 것은 어쩌면 코미디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삶을 냉소할 수 있는 관망이라는 점에서, ‘원더 휠’은 기대에 못 미친다. 깡마르고 신경증적인 노인의 이죽거리는 입술보다는 두터운 안경 너머 여전히 초롱초롱한 그 눈빛이 조금은 더 많은 이야기를 숨겨놓았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
뻔한 줄거리를 지닌 뻔한 결말의 치정극이라는 전제를 두고 ‘원더 휠’을 보면 반전 하나 없는 통속적인 영화다. 하지만 주인공 지니를 중심으로 그녀의 감정 상태에 따라 인공적인 정도로 티 나게 변하는 빛의 변화와 빛의 변화보다 더 내밀하고 설득력 있는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를 중심으로 보자면 여전히 매혹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지니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배우 출신이라는 캐릭터를 입고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믹키가 사실은 극작가 지망생이라는 점은 진창 같은 그녀의 삶에 다른 위안이리란 상상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말한다. 자기는 지금 지루하게 사는 웨이트리스 역할을 하고 있는 거라고, 여전히 자신의 삶은 빛을 받아 반짝이게 될 거라고…….
‘원더 휠’의 배경이 되는 코니아일랜드는 사람들이 반짝이는 순간을 즐기고 떠나가는 곳이다. 역설적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전혀 반짝이지 않는다. 이방인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을 술과 두통과 치정으로 견뎌야 하는 곳이다. 계속 같은 곳을 빙빙 돌아야 하는 관람차처럼, 달아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의 삶이 그곳에 있다.
그런 삶의 불가항력에 대한 자괴감 혹은 관망이 우디 앨런 자신의 현재와 맞닿아 있다. ‘로마 위드 러브’의 제리라는 인물은 자신의 꿈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며 ‘은퇴는 곧 죽음’이라는 넋두리를 늘어놓는데, 이상하게도 우디 앨런 자신의 내밀한 고백처럼 보인다. 여전히 그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전보다 더 많이 삶을 이죽대기보다는 ‘삶이란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라고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입부, 캐롤라이나가 지친 모습으로 놀이공원에 도착하는 장면이 있다. 거대한 원더 휠을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그 원더 휠이 거대한 거미줄처럼 보이고 캐롤라이나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아 보인다. 이 장면을 맘에 새기고 ‘원더 휠’을 본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아마 휘청대며 삶에서 달아나, 코니아일랜드로 흘러들어온 지니의 시작도 그랬을 것이다. 캐롤라이나는 지니의 과거였고, 지니는 캐롤라이나의 미래가 되어 서로 뒤엉킨다.
우디 앨런은 놀이공원에서 가장 단순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상징적인 존재인 관람차처럼 인생이 돌고 돌아 결국 상승과 추락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그리고 바닥에서 중력을 딛고 공중으로 떠올라, 하늘로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구심점에 사로잡힌 채 결국 바닥으로 되돌아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원더 휠’은 그런 우디 앨런의 긴 한숨 같은 영화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테네시 윌리엄스의 3막 희곡으로 1947년 초연되었다. 미국 남부의 몰락한 지주의 딸 블랑쉬는 과거의 교양과 전통에 얽매인 귀부인인 척하며 현실 도피의 꿈속에 살고 있다. 뉴올리언스에 사는 동생 스텔라를 찾아간 그녀는 야성적인 동생의 남편에게 유린당하고 철저하게 무너진다. 결국 정신병원으로 가면서도,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현재를 부정한다. 1951년 엘리아 카잔 감독,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란도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