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유롭스키/런던 필의 10주년 기념박스물 외

음악을, 그리고 변화를 기록했다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3월 4일 9:00 오전

평론가·칼럼니스트 추천 테마 음반

11년 만에 내한하는 유롭스키/런던 필이 젊은 호흡으로 빚은 3종의 음반

2007년 블라디미르 유롭스키(1972~)가 런던 필하모닉의 새로운 수장이 되었을 때, 전임 쿠르트 마주어(1927~2015)와의 나이차는 45세였다. 35세의 유롭스키에게 런던 필의 경영진이 기대한 것은 창조력과 생동감이었다. 때마침 그해 4월 유롭스키는 마르 엘더, 게르기예프, 바실리 페트렌코 등 7명의 지휘자와 함께 런던 오케스트라 문화를 변화시키는 10년 프로젝트와 그 선언에 동참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음악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유롭스키는 1990년에 가족을 따라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와 드레스덴 음대에서 지휘와 성악을 공부한 그는 아버지 미하일 유롭스키(1945~)의 대를 이어 지휘봉을 잡는다. 그의 입지전은 좀 남달랐다. 22세의 청년은 기야 칸첼리(1935~)의 희귀작품을 녹음(ECM)하는 등 시작점에 남다른 음악들을 놓았다. ‘베스트 원’을 쫓다가 지쳐 ‘온리 원’으로 넘어가는 전략이 아니라 온리 원을 베스트 원으로 끌어올리는 전략이었다.

1995년 아일랜드의 벡스포드 페스티벌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5월의 밤’을 선보여 이목을 끈 그는 1996년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LA필하모닉과 함께 한 ‘나부코’를 통해 유럽 음악계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오페라로 첫 시작을 끊은 그의 행보는 베를린 코미쉐오퍼의 카펠마이스터(1997~2000)를 거쳐 서른도 되지 않은 2001년에 영국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으로 임명(2001~2013)되며 지상무대보다는 오페라극장 피트 속 포디엄으로 이어졌다. 볼로냐 시립극장 수석객원지휘자(2000~2003),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2005~2009) 로 활약하던 그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을 이끌며 상주 오케스트라이던 런던 필과 깊은 인연을 맺어나갔다. 당시 런던 필의 수장은 쿠르트 마주어. 베토벤, 브람스 등의 전곡연주로 ‘무게’를 쌓아가던 런던 필은 런던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소도시 루이스의 글라인드본 축제에서 여름이면 유롭스키와 만나 모차르트, 베르디, 바그너는 물론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야나체크, 에트뵈시 등의 희귀작품들을 함께 하며 신세계를 경험하곤 했다. 둘의 이러한 관계는 2003년 유롭스키가 수석객원지휘자가 되며 더욱 깊어져 갔고, 결국 그는 마주어의 후임으로 2007/08시즌부터 런던 필의 새로운 지휘자가 되었다.

 

©Roman Gontcharov

드넓은 레퍼토리의 성좌(星座)

런던 필에 입성한 유롭스키는 런던 필이 2005년에 런칭한 자체 레이블(LPO)을 통해 현재까지 12종의 음반을 쏟아냈다. 마주어가 신진 지휘자를 고려해 첫 시즌에 러시아 작품을 기둥으로 세웠지만, 유롭스키는 이후 자신의 음악적 혈통만 고집하지 않는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 물론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를 담은 LPO 음반도 보이지만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그는 자신과 러시아음악을 “애증 관계”로 유지하며 새로운 레퍼토리의 지평을 구축해나갔다.

런던 필과의 10주년을 담은 박스세트물(LPO1010)은 이를 잘 보여주는 기념비다. 이 음반은 10년 동안 빚어온 ‘유로프스키 사운드’와 ‘런던 필 사운드’를 확실히 보여준다면, 21곡의 독특한 레퍼토리는 그동안 지휘자와 악단이 발굴한 ‘명작의 힘’을 보여준다. 7장 CD에는 2006년 다르고미츠스키, 2008년 칸첼리·리게티, 2009년 실베스트로프 교향곡 5번, 2010년 야나체크 ‘영원한 복음’, 2011년 무소륵스키·리스트, 2012년 시마노프스키 교향곡 3번 ‘밤의 노래’, 쳄린스키 ‘시편’, 브람스 ‘독일 레퀴엠’, 2015년 라벨·프로코피예프·타네예프·라흐마니노프·에네스쿠, 2016년 뒤카·글링카, 2017년 데니소프 교향곡 2번 등 그가 수석객원지휘자시절부터 런던 필과 함께 세공한 21곡의 실황물(로열 페스티벌홀·로열 알버트홀)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다르고미츠스키(1813~1869), 실베스트로프(1937~), 칸첼리(1935~)의 작품은 유럽의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연주로는 듣기 어려운 곡들이다.

이처럼 유롭스키의 카리스마는 지휘뿐만 아니라 프로그래밍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이 음반은 어느 한 쪽으로 결론내릴 수 없는 레퍼토리의 파노라마를 유롭스키 특유의 선곡으로 구축한 성좌(星座)와도 같다. 한마디로 런던 하늘에 띄운 ‘유롭스키자리’인 셈이다. 이러한 포진(鋪陳)적 감각이야 말로 현재 유럽 오케스트라의 세대교체를 책임지고 있는 페트렌코, 쿠렌치스와 구별되는 유롭스키만의 차별점이자 개성이다. 세 지휘자는 1972년 동갑내기다. 페트렌코의 화력을 베를린 필이 입증한다면, 쿠렌치스(슈투트가르트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는 아찔한 레이싱을 연상시키는 속도전과 현장 내 공기의 울림까지도 악기의 일부로 사용하는 레코딩 감각으로 무장했다.

상기한 바와 같이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은 유롭스키와 런던 필의 다리 역할을 한 축제다. 로열 오페라하우스와 글라인드본은 오푸스 아르테(OPUS ARTE)를 통해 현장의 히트작을 남기고 있다. 유롭스키가 런던 필과 15년 이상 쌓아온 ‘글라인드본표 노하우’를 맛보기에 ‘햄릿’만큼 좋은 작품이 없다. 오페라 ‘햄릿’ 영상물(OPUS ARTE OA BD7231 D)은 브렛 딘(1961~)이 작곡하고, 매튜 조셰린이 대본을 맡은 것으로 2017년 6월 11일 글라인드본 실황이다. 지휘자·비올리스트로도 활약 중인 딘은 1985년부터 14년간 베를린 필의 단원으로 활동했고 비올라 협주곡으로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2009)한 바 있다. 그 이름이 다소 낯설게 다가오지만 2017년 사라스테/서울시향과 비올라 협주곡을 아시아초연으로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햄릿’을 구축하는 딘의 사운드는 평범치 않다. ‘대사’로 표현할 때 언어의 한계에 갇힌 듯한 햄릿의 심리와 언어는 날카롭고 서늘한 조성의 ‘음악’을 타고 흐르며 더욱 격앙된다. 관현악과 전자사운드가 뒤섞임은 정신분열의 음화(音畵)다. 닐 암필드의 연출은 헝클어진 의상과 창백한 분장으로 미장센을 채색한다. 이처럼 무대에는 감정과 격앙의 조각의 파편화된 광기에 휩싸여있다면, 피트 속 유롭스키는 딘의 날카로운 음향조각들을 이성적으로 차분히 엮어나간다. 후반부에서 작품의 중심은 오필리어 역의 바바라 해니건으로 자연스레 옮겨간다. ‘현대음악의 프리마돈나’인 그녀의 독보적인 존재감이 돋보이지만, 삐쭉빼쭉 돌출된 분열증적 음표의 원활한 혈액순환을 담당하는 것은 철저히 유롭스키만의 이다. 21쪽 분량의 해설지(영문)에는 작곡가 인터뷰를 포함하여 초연작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해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저변의 전통을 토대로 새로움을 구축

유롭스키가 동향 작곡가들의 작품에 방점을 찍는 사이클을 고집하진 않았지만, 사후(事後)적으로 보면 그 역시 런던 필과 함께 러시아 혈통의 증명서를 내놓은 음반이 있다. 2017년에 나온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집(LPO 0101)이다. 7장 CD로 구성된 음반은 기존 발매했던 4·5번(2001), ‘만프레드’ 교향곡(2004), 1·6번(2008)에 2·3번(2006)과 ‘프란체스카 다 리미미’와 ‘현을 위한 세레나데’(2007)를 새로 추가한 구성이다. 눈꽃송이와 검은 배경의 흑백대비가 만드는 인상적인 재킷처럼 유롭스키의 지휘는 선율의 프레이즈보다 강약의 음향적 대비와 대조가 구축하는 미학을 부각시킨다. 특히 교향곡 4번·5번·6번의 긴장감과 폭발력은 믿음직스러운 음향환경이 수반되어 소리들의 구조가 명료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마치 마지막 막에 도달하여 그것을 찢고 나올듯한 기세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사그라지는 부족함이 곳곳에 보여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현재 유롭스키는 런던 필 외에 계몽시대 오케스트라와 러시아 스베틀라노프 국립 교향악단의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2017/18시즌부터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도 활동하며 런던과 베를린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2017년 6월 29일 베를린방송교향악단 취임공연에서 그는 요제프 수크,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2번을 선보였다. 그의 행보는 앞으로 런던과 베를린 두 교향악단의 색채를 상호보완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임 마렉 야노프스키의 전통에는 실험을 더하고, 런던 필에는 독일식 무게를 더하는. 그는 2021년부터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부임도 예정하고 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이달의 추천 음반 및 내한

브람스·글링카·야나체크·라벨·리게티 등 21곡 수록

7CD/LPO1010/2007년 취임 인터뷰 수록

브렛 딘 오페라 ‘햄릿’

브렛 딘(작곡), 매튜 조셰린(대본), 닐 암필드(연출), 알란 클레이톤(햄릿), 바바라 해니건(오필리어)

OPUS ARTE OA BD7231 D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1~6번) 외

7CD/LPO0101/곡목해설(16p)

 

블라디미르 유롭스키/런던 필하모닉

3월 7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율리아 피셔), 브람스 교향곡 2번 외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