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의 표적’

훔쳐보기, 본능과 범죄 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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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5월 15일 10: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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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건너편 아파트에 비치는 실루엣 혹은 타인의 싸움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안전한 거리와 시선이 확보된다면? 익명의 타인을 익명의 시선으로 훔쳐보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은 단순한 훔쳐보기의 행위에서 시작해, 영화와 연극과 같은 예술작품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이 욕망이 과도해지면 사생활 폭로나 파파라치, 그리고 최근 논란이 되는 SNS상에서의 불법 촬영물 공유 등으로 이어진다. 연예인은 물론 일반인들도 참여하여 사생활을 관찰 카메라로 촬영·공유하는 리얼리티 TV는 과포화된 집단 관음증의 신경병처럼 보인다. 많은 매체가 더욱 은밀하고 노골적으로 훔쳐보기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리고 그 익명성의 안전한 거리는 살짝 한계선을 넘어서는 순간, 범죄가 된다.

 

관음의 욕망과 안전한 거리

시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일컫는 ‘관음증’은 그 욕망의 순도로만 보자면 인간의 순수 욕망에 가깝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문화와 예술 행위, 연극 및 영화는 모두 훔쳐보기의 욕망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 장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관객 입장에서 영화는 관음의 대상, 관객은 숨겨진 관음의 주체가 된다. 안전한 기분으로 훔쳐보기에 몰두할 수 있도록 영화관은 영화가 시작되면 불을 꺼준다.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도록, 그리고 잘 훔쳐볼 수 있도록 영화는 관객을 배려한다. 연극에서도 ‘제4의 벽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객석을 향한 방향이 벽인 양, 배우들이 마치 누군가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 꺼진 객석의 관객들은 훔쳐보기의 편안한 쾌락을 제공받게 된다.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인간의 관음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도덕적인 안전장치를 통해 관객들을 안심시킨다.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한 엿보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사이코’(1960)나 대상화된 여성에 대한 훔쳐보기를 다룬 ‘현기증’(1958), 그리고 영화에 대한 은유로서 훔쳐보기를 이용하는 ‘이창’(1954) 등에서 드러난 훔쳐보기는 불안정하고 나쁜 행위지만, 스릴러의 외피를 입은 훔쳐보기는 죄의식을 느끼는 관객들을 여전히 안전한 장소에 숨겨둔다. 그리고 범죄자의 처단을 통해 관객들의 죄의식을 말끔하게 지운다.

응시의 방향은 권력의 위치를 결정한다. 영화 내의 어떤 인물이 관음자의 입장에 놓여 있다면 당연히 관객도 그 관음자의 시선에 동화하게 되며, 그 동화의 강약을 조절하는 연출력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뉜다. 시대에 따라, 권력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훔쳐보기 영화는 관음증이라는 소재를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해 왔다. ‘포스트 히치콕’ 세대는 그렇게 영화 속에 시대상을 담아낸다.

히치콕 이후 가장 주목받은 관음증 스릴러의 대가 브라이언 드 팔마는 ‘침실의 표적(Body Double, 1984)’을 통해 폐소공포증과 훔쳐보기라는 히치콕 영화의 모티브를 그대로 빌려와, 인간의 훔쳐보기 욕망이 역으로 이용당하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침실의 표적’은 폐소공포증과 무대공포증을 동시에 가진 배우와 포르노 배우, 대역 배우들을 배치하며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순수한 관음증과 관객의 욕망 사이를 뒤흔든다. 훔쳐보기라는 욕망이 지닌 죄의식과 두려움을 스릴러 장르를 통해 묻어버리는 동시에, 관객들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동시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훔쳐보기의 욕망은 누구나 가진 것이지만,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은밀한 것이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위치가 관음의 대상으로 변하는 순간, 관객은 공포를 느낀다. 더 이상 느긋한 관찰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관찰의 주체에서 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관객의 시선 역시 죄라고 말한다. 훔쳐보기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단죄해야 할 범죄가 될 때, 주인공과 동화되어 타인의 삶을 침투했던 시선과 은밀한 사생활을 넘보는 것을 즐기는 관객의 시선은 도덕적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결국 관객들은 관음증의 죄의식과, 그럼에도 보아야 하는 탐식성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는 범죄가 된 훔쳐보기

‘침실의 표적’은 24시간 방영되는 케이블도, 비디오 게임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다. 모든 행위가 훔쳐보기에 집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영화 속 훔쳐보기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2007년 D.J. 카루소의 ‘디스터비아’는 훔쳐보기를 단순한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십 대들의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 버린다. 훔쳐보기에 대한 은밀한 죄의식이 바닥에 깔려있는 ‘침실의 표적’에 비해 ‘디스터비아’ 속 훔쳐보기는 오락이자 트렌드이며, 놀이문화처럼 그려진다. 그래서 커피와 도넛, 고성능 망원경과 디지털 캠코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훔쳐보기에 탄력을 더해줄 아이팟과 엑스박스, 그리고 훔쳐보기에 동참하는 친구들까지 이야기 속에 배열한다.

 

 

‘디스터비아’(2007) 포스터

이처럼 모두가 관찰자이며 방관자가 되어버린 오늘날, 죄의식의 강도는 아주 많이 낮아졌다. 사생활을 파헤치고 SNS를 기사화하며, 그 기사를 다시 SNS를 통해 퍼트리는 매체와 SNS 사이의 지독한 공생관계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개인의 정보는 각기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지만, 다수의 사람은 익명성 뒤에 몸을 숨기고 날카로운 적의를 드러낸다. 어디를 가든 따라붙는 몰래카메라, 누구든 소지하는 카메라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폰, 적외선 카메라가 숨겨진 호텔, 심지어 화장실에서까지 누군가를 훔쳐보고 그것을 즐기려는 욕망은 개인적인 욕망을 넘어서서 타인의 사유재산과 안위를 위협하는 폭력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그 속에서 여전히 훔쳐보기는 은밀한 화두이자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지만, 사생활은 더욱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하는 단단한 영역이 되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보고 있는 그 시점에, 누군가의 시선은 또 나를 향해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이가 관찰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며, 모든 화두의 주체가 되어가는 카메라와 SNS의 시대에, 관음증이라는 은밀해야 할 욕망은 대놓고 날카로운 이빨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 사실이 끔찍한 공포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공포인지도 모른다.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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