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노래의 인문학_7
‘마녀’라는 이름
이름에 마(魔)가 끼기로는 마왕이나 마녀나 마찬가지지만 연상되는 이미지는 천양지차다. 마왕이라고 하면 괴테의 시나 슈베르트의 음악이 떠오르면서 뭔가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상징하는 이름처럼 들리지 않나. 그에 비해 마녀라는 이름은 가혹하고도 잔인하다. 쉽게 떠오르는 연관단어가 언제나 재판 아니면 사냥이니, 마녀는 사람이 아닌 악마이거나 사람보다 못한 짐승에 불과한 거다. 마왕은 사람을 초월하는 신화와 예술의 세계에 살지만, 마녀는 사람들 속에서 악마와 짐승으로 몰리며 현실의 세계를 살아간다. 아무리 판타지의 옷을 입혀도 마녀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리얼리티의 냉기가 배어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녀가 누구인지를 보다 보면 누가 마녀를 만들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면모는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의 주인공 메데이아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여자의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남편의 왕위를 가로챈 숙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딸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토막 내어 삶아버리게 만드는 것도 끔찍하고, 남편의 애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에게 마법의 옷을 입혀 산 채로 불태우는 것도 잔인하지만, 자기를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기 아이들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면 더 이상 설명할 말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메데이아는 비극의 수많은 주인공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물이지만 그의 유명(有名)은 오로지 악명(惡名)일 뿐이다. 메데이아는 마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에게서 악마의 사술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을 읽어낸다. 한 나라의 공주이자 신들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지혜를 갖춘 여자이지만, 남편의 나라 그리스에서 메데이아는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자 마술을 쓰는 사특한 존재일 뿐이다. 이방인인 그에게 말할 권리 따위는 없다. 남편의 배신은 단순한 외도가 아니라 메데이아의 존재 근거를 그리스에서 온전히 박탈해버리는 사회적 매장인 것이다. 하지만 메데이아의 곤경을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다. 이방인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에게도 그리스 시민의 권리는 허락되지 않는다. 메데이아는 자기 아이들의 목숨을 앗음으로써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극심한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혀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는 이는 메데이아지만 권리 없는 사람들을 사회적 죽음으로 이끄는 집단은 바로 그리스 사회라는 사실을 동시에 보게 만드는 것이다. 비극이든 역사이든 마녀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동화가 해맑을 수 있는 건 마녀가 끝내 죽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녀가 죽지 않는다면? 그가 왜 마녀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면? 뮤지컬 ‘위키드’의 마녀 엘파바에게도 메데이아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도로시가 아닌, 엘파바
사실 뮤지컬 ‘위키드’는 결코 어둡지 않은, 오히려 해맑은 작품이다. 동화의 반죽 위에 약간의 현실성을 덧바르고 우정과 사랑을 토핑으로 얹었으니 화려하게 재미있고 적당하게 교훈적인 뮤지컬로 ‘위키드’만한 작품도 없을 거다. 천문학적인 흥행성과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 2003년 초연된 이래로 우리 돈으로 1조원이 넘는 매출을 넘어선 게 벌써 몇 년 전이라니 흥행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원작을 생각해보면 이런 흥행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뮤지컬의 원작은 소설 ‘위키드’인데, 이 소설의 분위기는 해맑기는커녕 비판적이고 냉소적이기 때문이다. 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뒤집었다고 하지만 소설 ‘위키드’는 동화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서쪽마녀 엘파바를 비롯한 동화 속 인물들은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고 권력의 본질을 고발하며 온갖 모순에 대항해 싸워나가는 ‘경계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로 탈바꿈한다. 옆으로는 엘파바와 함께 한 동료들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아래로는 엘파바의 가문 이야기로 뻗어나가느라 소설의 분량은 장장 6권에 달하도록 방대하다. 내용은 분명하다. 정의를 추구하기 위한 모험담, 그리고 불온한 정치적 세력을 향한 투쟁기. 소설 ‘위키드’가 뒤집고 싶은 것은 동화가 아니라 현실인바, 내용으로나 분량으로나 뮤지컬로 담아내기에는 만만치 않은 원작인 셈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맞춰 보자면 오히려 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차용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오즈의 마법사’는, 요약하자면, 도로시와 친구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원래의 자기를 회복하는 것과도 같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지혜, 용기, 마음은 나에게 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잊고 있었던 것임을 깨닫게 될지니! 그들의 시간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 멈추지 않고 이뤄질 수 있는 희망을 향해 흘러간다. 이것이 곧 성장일 터. 길 위에서 맞닥뜨리는 모험을 통해 소녀와 친구들은 자기의 세계를 일궈나간다. 동화는 소중한 것을 찾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동화의 해맑음만큼 잘 어울리는 영혼의 단짝도 없을 거다. 뮤지컬 ‘위키드’가 선택한 방식은 일종의 절충이다. 인종차별, 권력남용, 이민족에 대한 배척, 진실에 대한 왜곡 등 은유적인 설정들은 소설 원작을 그대로 따른다. 대학에 들어온 엘파바가 소외되는 장면에서 소수자 혐오가 떠오르고, 지식을 갖춘 동물들이 말을 빼앗긴 채 감금되는 장면에서 파시즘이 연상되는 식이다. 하지만 현실을 빗대는 이러한 은유가 직접적인 메시지로 달궈지지는 않는다. 원작의 설정은 살아있지만 원작의 과격함은 줄어든 거다. 왜냐, 이건 뮤지컬이니까! 과격함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뮤지컬 특유의 낙천적인 설정들이다. 못난이 시골뜨기와 세련된 도시 소녀가 친구가 되어 우정을 쌓는 성장드라마였다가, 멋진 남자애 때문에 삼각관계에 빠지는 청춘 로맨스였다가, 자기의 능력을 자각하고 악당과 대결하는 영웅담으로, 뮤지컬 ‘위키드’의 색채는 밝고 발걸음은 발랄하다. 뮤지컬의 안전한 전형이 소설의 공격적인 상상력을 가볍게 덮어버리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전형에도 불구하고 이 뮤지컬의 해맑음에는 그늘이 있다. 이유는 하나다. 여전히 이 작품의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 도로시가 아닌, 집을 떠나는 마녀 엘파바이기 때문이다.
엘파바, 그리고 메데이아
엘파바와 메데이아, 두 마녀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피부색부터 그렇다. 검은 메데이아와 푸른 엘파바. 이들의 정체성은 남들과 다른 ‘색깔’로부터 비롯된다. 그 색깔 때문에 그들의 삶은 쉽지가 않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검은 피부의 메데이아는 야만적이고, 오즈의 사람들에게 초록 피부의 엘파바는 이질적이다. 메데이아가 그리스인 남편에게 배신당하는 것이나 엘파바가 대학의 동료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색깔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시각적인 다름은 때로는 불길함으로 때로는 비웃음으로 쉽게 모욕당한다. 하지만 메데이아와 엘파바는 자기만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유한 능력은 권력의 필요와 만날 때 ‘마술’처럼 크게 빛난다. 왕위를 되찾기 위해 황금 모피를 얻어야 하는 이아손에게 메데이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 도시를 감시하기 위해 날개 달린 원숭이가 필요한 오즈에게 엘파바는 꼭 필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더 이상 권력과 손잡기를 거절할 때 그들의 능력은 순식간에 위험한 사회악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들은 ‘마녀’가 되는 지점은 여기부터다. 기존 질서의 반대편에 서서 불법과 부정을 향해 메데이아와 엘파바는 말하기 시작한다. 메데이아의 일갈은 신성한 맹세를 파기한 이아손을 향한다. 자신을 야만과 구별하는 그리스의 자존감은 맹세를 신성하게 여기는 제우스의 법에서 비롯되는 것이거늘, 자기의 이익을 위해 결혼의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이아손의 행위가 그리스의 가치에서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이방인인 메데이아가 묻는 것이다. 엘파바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언어를 가진 ‘동물’이 강단에서 쫓겨나는 일은 정당하지 않음을, 그들을 철창 안에 가두어 진짜 짐승을 만들어버리는 정책은 악한 것임을, 위대한 권력자의 밑창에는 치졸한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엘파바는 거침없이 폭로해버린다. 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마녀라는 이름이다. 불순물이었던 그들은 어느새 독극물이 되어버린다. 마녀들에게 주어지는 운명은 하나, 바로 추방이다. 메데이아는 그리스에서 추방을 명령받는다. 그리스 어디에도 그의 자리와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엘파바도 더 이상 오즈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오즈의 권력자에 맞섰기 때문이다. 엘파바와 메데이아의 행로는 여기서 갈린다. 두 마녀는 추방당할 운명 앞에서 각각 다른 길을 선택한다. 메데이아는 남편의 새로운 아내가 될 코린토스의 공주를 죽이고 남편의 영원한 기쁨인 두 아들을 죽인 후, 이 모든 일의 원인은 결혼의 맹세를 깨버린 이아손에게 있음을 분명히 짚으면서 용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떠나버린다. 메데이아는 끔찍한 복수를 통해 그리스 문명의 잔혹한 오만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되비치는 것이다. 메데이아가 떠난 자리를 채우는 것은 이아손의 통곡이다. 이 울음의 사연을 묻는 사람은 메데이아라는 이방인의 목소리 역시 듣게 될 터. 그 목소리에는 시민의 권리를 그토록 중요시했던 그리스에서 가장 쉽게 짓밟힌 것이 사람의 권리였다는 사실이 담겨 있을 거다. 검은 피부의 마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리스 사회의 검은 그늘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기
그렇다면 엘파바는? 메데이아는 당당히 하늘로 날아가지만 엘파바는 조용히 사라져버린다. 엘파바와 메데이아의 가장 큰 차이는 죄책감에 있다. 메데이아는 자기가 죽인 사람들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지만, 엘파바는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향한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메데이아에게 그리스가 온전한 타향이었던 것과는 달리, 엘파바에게 초록의 에메랄드 시티는 ‘인생 처음으로 어딘가에 속한 기분’을 느끼게 한 동질의 세계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은폐된 폭력과 왜곡된 진실을 보고 만 거다. 그것에 대항해 싸움을 건 대가는 크다. 동생의 죽음 그리고 연인의 실종 등. 세상을 향하던 엘파바의 의심은 어느새 자기 자신을 향한다. 나의 싸움은 정말 선을 위한 싸움이었나? 나를 과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엘파바의 싸움은 멈춰버리고 만다. 세상에 대항하기를 포기한 마녀가 서 있을 자리는 없다. 초록마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즈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마녀의 무덤에 침을 뱉을 것이고, 동정심 따위는 갖지 않을 것이며, 악행의 처참한 종말을 보겠다는, 더욱 완고해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엘파바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글린다 하나다. 글린다는 엘파바 본인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엘파바의 초록색은 그가 부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드러내는 표식인 것을!)까지 모든 것을 다 아는 유일한 친구이다. 하지만 글린다가 엘파바와의 우정을 통해 성장했음을 증명할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즈를 이끌 ‘선한 마법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글린다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까? 엘파바의 생사와 행방을 모르는 것만큼 그의 생각과 가치를 글린다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엘파바가 홀로 고군분투할 때 글린다는 아무것도 결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즈의 새로운 희망이 되기에 백색의 마법사 글린다는 기존의 기득권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별다른 희망도 없이 뮤지컬 ‘위키드’는 끝나버린다. 1막의 흥미진진함에 비하자면 2막의 지지부진함은 정말이지 의외다. 방대한 원작을 압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까? 뮤지컬 각색기술이 부족해서 초래된 결과로 치부하면 모든 문제는 쉬워질 거다. 하지만 초록마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언뜻 보이는 세계가 있다. ‘소네트를 읽는 사슴’과 ‘철학을 논하는 영양’을 향해 ‘동물은 구경거리다, 입을 닥쳐라’라는 말이 쏟아지는 곳, ‘불화와 반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략이 공공연한 곳, 크고 무서운 가면 뒤에 숨은 ‘삼류 떠돌이’가 권력자의 행세를 이어가는 곳. 여기는 과연 어디일까? 무능한 권력자와 자본에 기생하는 지식인이 이끄는, 다양성을 위협하고 전쟁을 주도하는 사회. 오즈는 미국의 은유이다. 오즈를 향한 소설의 태도는 명확하다. 저항하라, 싸워라! 하지만 뮤지컬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관타나모에서 ‘마녀’를 만들어내는 ‘오즈 같은 미국’에서 초록의 마녀가 될 것인지 아니면 백색의 마법사가 될 것인지. 현재진행형의 질문에 대한 뮤지컬의 대답은 언뜻 허탈하다. 엘파바의 귀환도, 글린다의 성장도, 하다못해 동물들의 연대도, 그 어떤 희망의 징후도 없다. ‘엘파바는 떠났습니다. 글린다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오즈의 사람들은 예전과 똑같습니다. 끝.’ 하지만, 어쩌면 이런 결론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오즈의 판타지가 아닌 미국의 현실에서 낙천적인 장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실천은 함부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일 테니 말이다.
글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