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
글·사진 박서정 기자
“10년 전, 20년 전에 왔을 때랑 변한 게 하나 없다는 손님도 있어요. 3년 전과 비교하면 완전 그대로예요.” 몇 해 전 모습이 여전하다는 기자의 말에 재즈카페 라 끌레의 주인장 이영원이 답했다. 매일 라이브 음악이 들리는 이곳은 삼청동 작은 골목을 돌아서면 재즈 선율이 흘러나오는 건물 지하에 있다. 평일은 오후 8시 30분부터, 일요일은 그보다 30분 일찍 공연이 시작된다. 동그란 선박 창이 달린 문을 열면 색색의 줄 조명이 빈티지한 소품과 가구를 밝히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무대엔 피아노 한 대와 드럼 세트가 자리한다. 디자인 사무실로 차려져 주말마다 지인들을 불러모아 공연하던 공간을 2005년 이영원이 인수하며 지금 모습을 갖췄다. 타악기 주자 김대환, 피아니스트 임동창과 장사익이 그 시절 라 끌레(과거 상호명 ‘아트 스페이스 끌레’)에서 판을 벌였단다. 카페 벽면엔 그들이 출연한 1998년 공연 포스터가 어제 일인 양 붙어 있다. 요즘 라 끌레에서는 매일 다른 팀이 돌아가며 연주한다. 그중 화요일 공연은 정규 밴드가 아닌 긱(Geek·연주자를 그때그때 섭외하는 라이브 연주 형태를 가리키는 음악 용어)으로 꾸려진다. 악기 구성은 물론 연주자도 매번 달라져, 연주자 역시 공연장에 와서야 누구와 공연하는지 알게 된다. 이날은 기타·베이스·드럼으로 팀이 구성됐다. 이들은 피아니스트의 부재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이것이 즉흥 연주의 떨림”이라며 웃어보였다. 라 끌레에서 연주한 지 한 달 됐다는 베이시스트 함희태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장점으로 꼽았다. 쌀쌀한 가을날 화요일 팀이 연주한 첫 곡은 ‘Autumn leaves’. 1945년 작곡된 스탠더드 재즈곡으로, 무려 74년 전 노래다. 즉흥적인 재즈 음악처럼 시간의 흐름마저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 라 끌레의 매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라 끌레를 가득 채웠다. 대부분이 20대의 젊은 커플이다. 과거엔 근처 회사원들이 주로 찾았는데, 청춘남녀의 연애를 다룬 예능 프로그램 채널A ‘하트시그널’에 방영된 후 손님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중간에 운영난으로 문을 닫을 뻔했을 때 방송이 나가면서 이 동네에서 가장 붐비는 공간이 됐었죠. 지금은 다시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이처럼 지난 15년 동안 물 흐르듯 흘러왔어요. 점차 손님이 줄어 하루에 손님이 한두 명만 오는 날이 다시 올 지도 모르죠. 물길을 억지로 피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 40~50년 묵은 재즈클럽 몇 개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공간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 인식이 부족한 게 아쉽죠.” 라 끌레는 1997년부터 이 자리에 있었지만, 그간 실로 오랜 세월, 무수한 인연이 삼청동의 소박한 재즈 카페를 거쳐 갔다. 내로라하는 실용음악 교수들이 수준 높은 연주를 선보인 적도, 작은 공간에서 꿈을 키웠던 아마추어 연주자가 버클리 음대 유학 후 돌아와 뿌듯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한때는 CNN에 ‘서울 최고의 재즈바’로 소개되어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아왔다고. 장밋빛 기억 속 그들의 이름을 묻는 기자에게 초로의 주인장은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는 함께 카페를 운영하는 부인을 돕기 위해 일어선다. 손님에게 대접할 와인병을 든 채 그저 “이젠 와인을 쉽게 따게 됐다”고 말하는 그. 천천히 시간의 부력을 이겨낸 라 끌레와 주인장 노부부는 앞으로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것 같다.